인류의 심각한 문제들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2019년 12월 중국 우환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 구석구석을 코로나19의 암울한 소식들로 가득 채웠던 만 2년의 세월, 2021년 12월도 역사 속으로 도도히 흘러가고 있다. 급속한 백신 개발과 함께 신속한 접종을 통해 국가적 집단 면역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나라마다 앞다퉈 전력질주하고 있다. 그러나 집단면역의 꿈을 비웃기라도 하듯, 국민 백신 접종 70%~80%를 완료 했지만 코로나는 끊임없이 재확산 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감기처럼 위드(With) 코로나19 시대로 가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실상은 방역 당국도 방역 일선의 의료진들도 이 문제를 완전히 불식시킬 묘안은 없어 보인다. 당분간 우리는 여전히 불투명하고 불안한 현실 가운데 놓여있음이 틀림없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선한 일로 인하여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선한 일을 위하여’ 구원받았다. 사도 바울은 성경의 목적이 ‘선행을 낳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딤후 3:16~16). 성경의 주요 주제인 구속은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구속받은 자들이 그들의 행동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더 중요하다(엡 2:8~10).
그렇다면, 기독교적 선행(선한 일)의 필수적이고 충분한 기준은 무엇인가!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이교도의 도덕적인 문제에 대한 반응으로 ‘선행’을 본격적으로 다루었다. 개혁주의 신학은 인간이 본성적으로 완전히 부패했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이 악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각과 말과 행위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은혜가 없다면 우리 가운데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선한 어떤 것도 행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선행을 하는 믿지 않는 자들’을 보게 된다. 최근 한국의 여성 사업가 한 분이 카이스트(KAIST)에 평생 모은 766억 전 재산을 과학기술 연구기금으로 기부한 일이 있었다. 그분의 신앙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우리 사회의 보통 사람들도 자신의 가족을 사랑하고,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관용을 베풀고, 이웃에게 친절함을 보인다.
하지만 개혁주의 신학은 이런 보통의 기준에 의문을 제기한다. 개혁주의 신학은 불신자들이 종종 사회의 진보에 기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런 식의 기여를 ‘시민적 의’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불신자들의 죄를 제어하시려는 하나님의 일반 은혜에서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한 시민적 의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적으로 세 가지 특징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①그 행위가 믿음으로 깨끗하게 된 마음에서 나오지 않고 ②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바른 방식으로 행해지지도 않고 ③올바른 목적인 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지 않는다면 그 행위는 기독교적 선행이 아니다. 그렇다고 카이스트가 아닌 교회나 오픈도어 선교에 헌금으로 드렸어야 했다는 식의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선행은 ①믿음으로 깨끗하게 된 마음과 ②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과 ③올바른 목적,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필수적 요건을 충족할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무엇이 기독교적 선행의 우선순위가 되어야 하는가?
다양한 활동이 있을 수 있지만, 오픈도어는 전 세계에 신앙의 이유로 박해를 받고 있는 믿음의 지체들을 위한 선행을 하고 있다. 믿음의 지체들을 위해 기도하고 돕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 믿기 때문이다. 2021년 현재 기독교 신앙의 이유로 전 세계 박해 인구는 3억 4천만 명이 넘는다. 전년도 대비 3천만 명이 증가한 수치이다. 박해지수가 가장 높은 등급의 국가 수도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돕는 것이 최선의 방법인가?
첫째, 실상 가장 효과적인 도움의 방식은 역시 마음을 모아 함께 기도하는 것이다. 공간적, 문화적, 시간적, 감정적 한계를 뛰어넘어 박해 현장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달려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성령 안에서 마음을 모아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 성령 안에서 그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고, 함께 위로받고, 함께 기뻐할 수 있다. 성령께서 그들과 일치된 마음을 부어 주시기 때문이다.
둘째, 또 다른 현실적인 최선의 방법은 나의 삶의 일부분을 기독교 신앙 때문에 고난 받는 이들을 위하여 남겨두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도 고아와 과부와 객(이웃들)을 위하여 추수할 곡식의 일부분을 남겨두라고 하지 않으셨는가? 나의 소득의 일부분을 박해 받는 성도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하여 매일 조금씩 쌓아가다 보면 나의 마음이 어느새 그들에게 향하게 된다. 예수님의 시선이 머무는 그곳에 나의 시선이 머물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야 할 점은, 박해의 현장에 여성과 어린이, 청소년들의 피해 사례가 점차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족으로부터 분리와 소외를 경험하는 것은 사회적 분리의 차원을 넘어 생존 그 자체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 왜냐하면 가족은 생활에 있어 가장 기본적이며 사회의 최소한의 안전장치이기 때문이다. 오픈도어가 여성과 어린이, 청소년에게 관심을 갖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오픈도어는 지금까지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프로젝트와 희망의 선물들을 위해 지정한 후원금이 그대로 현장으로 전달되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 실제로 지정헌금의 90%를 국제 오픈도어(ODI)로 그대로 송금하고 있고, 나머지 10%도 현장으로 보내기 위해 선교회의 운영에 필요한 경비를 이사회비와 교회의 후원금으로 충당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더 많은 한국의 믿음의 지체들이 예수님의 시선이 있는 곳에 함께 시선을 두고 기도와 물질로 오픈도어 사역에 함께 동참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신현필 목사(한국오픈도어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