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코리아, 마산재건교회, 선교통일한국협의회 공동주관 제4회 통일선교 학술세미나
정종기 ACTS 북한선교학과 교수(한선통일목회연구소 소장)는 지난 11월 초 루마니아를 방문하며 만난 현지인 목회자들과 국립대, 신학대 교수의 진술, 루마니아 선교사들의 편지 등을 근거로 '루마니아 체제 전환 이후 기독교 현황과 전망'을 발제했다. 루마니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왕국이 붕괴되고 1947년 소련의 지원으로 인민공화국으로 전환됐으며, 1965~1989년 니콜라이 차우셰스쿠가 강력한 독재정권을 구축했다. 그러나 루마니아 혁명으로 1989년 차우셰스쿠가 총살당한 후 공산주의 체제에서 민주사회로 전환됐다. 현재 루마니아 인구는 2,200만 명이며, 기독교 인구는 2.4%인 52만8,000명(정부는 6.4%로 제공)이다. 개신교회 수는 약 5,400개로, 이중 오순절교회가 약 3,200개, 침례교회가 약 1,500개, 형제교회가 약 700개다.
기독교를 사회와 상관없는 종교로 만든 루마니아 공산정권
정 교수는 공산주의 체제하의 루마니아 교회에 대해 "공산정권은 무신론 정책으로 종교를 탄압했는데, 종교를 없애진 못하고 주변으로 몰아넣고 자기들끼리 종교적 활동을 하도록 했다"며 "공산당 간부들은 교회 지도자들을 가까이 두고 통제하고, 교회 지도자들은 항상 공산당의 승인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결국 교회 리더들은 공산당과 협력할 수밖에 없었고, 공산당과 협력하지 않으면 쫓겨나고 감옥에 갔다. 그는 "이 기간 공산정부는 기독교를 사회와 상관없는 종교로 만들어버렸고, 오직 교회 내에서 성도들끼리만 교제하도록 만들었다"며 "교회는 주일 오전, 오후 모임 이외에는 모임을 할 수 없었지만, 가정 모임은 공산당도 어쩔 수 없었다. 루마니아 성도들은 기도하는 모임을 가정에서 가졌고 기도하는 루마니아 교회가 되었다"고 소개했다. "이들은 기도뿐 아니라 고난이 무엇인지도 알았다. 그 결과 루마니아에서는 아주 강한 복음주의 신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그는 덧붙였다.
루마니아 공산정권은 1947년, 1948년 두 해에 걸쳐 교회 재정과 재산 및 행정 권한을 접수하면서 교회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했다. 1948년 종교부가 발표한 법령으로 개신교회, 정교회, 우니아트교회 등 모든 종파는 해산되고 재산도 몰수됐다. 학교에서는 종교 강의를 할 수 없어 이민 희망자들이 늘었고, 정부에 대한 어떤 비판이나 도전적 행위는 용납되지 않았다. 정 교수는 "차우셰스쿠의 종교 탄압 심화, 이데올로기의 강조, 권력집중 심화, 소수층 부의 독점은 대중을 더 소외시켰고, 이 과정에서 대중은 낮은 생활 수준과 기아, 영양실조 등이 심화되면서 종교는 국민에게 고난의 현실을 도피하는 메커니즘을 제공했다"고 말했다. 루마니아는 1948년 11월 북한과 수교했으나, 한국과 루마니아가 수교한 후 북한과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이날 정 교수는 "루마니아 교회가 체제 전환 이후 겪은 여러 가지 변화는 북한의 체제 변화에 대비해 북한선교에서 준비해야 할 과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1989년 루마니아 혁명이 일어날 때 사회 내 불만이 가득했으나, 조직화 된 차우셰스쿠에 대한 반대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라며 "루마니아는 단순한 시민혁명으로 시작된 것으로 보아야 하는데, 북한에서는 그 같은 혁명은 기대하기 어려운 것은 아닌가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교수는 "루마니아에서 사회적 불만은 교회로부터 시작되었다. 라즐로 퇴게스 헝가리계 개신교 목사를 추방하려는 비밀경찰에 항의하는 성도들로부터였다"며 "퇴게스 목사는 공산당과 챠우세스쿠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 교회를 일깨우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퇴출 위기에 놓였을 때 교회 성도들을 중심으로 촛불혁명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루마니아는 공산치하에 있다 하더라도 교회가 작은 단위로 지속할 수 있었지만, 북한은 기독교가 완전 축출되어 현재 관제교회나 그루터기 교회, 지하교회가 이러한 촛불혁명의 불씨를 제공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미지수"라며 "북한선교에서 지하교회와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연구가 진행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체제 전환 후 '세속주의' '젊은이 탈루마니아' 위기 등에 직면한 루마니아 교회
루마니아 교회는 공산주의 체제에서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된 이후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정 교수는 "루마니아 교회가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지만, '세속주의'라는 새로운 도전이 다가왔다"며 "세속주의 영향으로 루마니아 교회는 물질화되고, 교인들에게는 물질만능주의가 생겨났다. 지하교회에서 지상교회로 이전했으나 신앙의 변질에 대한 문제가 생긴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북한도 마찬가지로 고민해야 할 문제로, 현재 북한교회의 대세가 지하교회라면 이들이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지상교회로 올라올 때 이들의 신앙 변질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과거 성도였다가 핍박으로 신앙을 버린 자들이 다시 교회에 나오게 될 때, 배교자들에 대한 처분을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젊은이들의 탈루마니아'라는 새로운 현상은 루마니아 교회의 노령화와 과거의 체험적 신앙에서 벗어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 외에도 공산주의 정권 아래서 오랜 시간 개인주의화 된 기독교회가 아직까지 사회변혁과 사회봉사가 미흡하고, 사회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다.
정종기 교수는 "현재 루마니아 개신교회는 기독교인들이 사회에서 어떻게 살고 어떻게 증거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며 "루마니아 교회는 한국교회의 부흥성장을 배우기를 원하고, 약 50년 간 공산 치하에서의 기독교 박해를 경험 삼아 여전히 독재국가로 남아 있는 북한에 복음을 전하는 데 역할을 하기 위해 한국교회에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면서 "이제 한국교회가 루마니아 개신교회와 협력하여 북한선교를 준비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공산 정권의 박해 아래에서 기독교 신앙의 명맥을 이어온 루마니아 교회 연합체인 루마니아복음주의협의회(REA)는 이를 위해 지난 5월 선교통일한국협의회(선통협)과 업무협약(MOU)을 맺기도 했다.
이규영 서강대 교수(신아시아연구소 이사)는 '동독 체제 전환 이후 기독교의 현황과 전망'에서 "1960년대만 해도 독일에서는 주일이 되면 평균 68%의 교인이 예배당에 왔으며, 조금만 늦으면 별관, 교육관, 예배당 밖 교회 정원 벤치에 앉아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으면서 예배드렸다"고 말했다. 그러나 "독일통일 이후 동독 내 무종교주의자(atheist)가 증가했고, 동독 시기에는 교회가 '보호의 공간'으로 감동을 주었다가 이후 주요 교회 인사와 국가보위부 간의 내통 사실이 드러나면서 성도들이 교회로부터 등을 돌리고, 교회는 도덕적, 정치적 신뢰를 상실했다"고 말했다.
또 통일 이전과 과정에서는 교회 안에서 자유로운 의견 개진이 가능하고, 교회가 비판적 기능을 하며 주민의 정치적, 사회적 관심을 대변했다면, 통일 이후에는 교회가 사회 내 공식 인정된 합법화된 기관으로 부각되면서 '지배교회'로 변질됐다는 비판을 받았고, 동독교회에 대한 주민의 매력과 동정심이 사라졌다.
이규영 교수는 "어느 순간부터 교회의 자리가 비기 시작하고, 크나큰 위기를 맞이했다. 라인 강의 기적으로 이룬 급작스러운 경제 번영과 주5일제 근무, 일부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 등이 주된 이유"라고 설명했다. 독일인 하이노 팔케(H. Falcke) 교수는 독일교회가 당면한 위기로 '소수교회로 전락' '재정위기' '중대성과 역할의 위기' '습관적 무신론과 동독 시절 비(非)교회화' '종교다원주의의 침투와 다원화된 사회로의 진입' '점점 더 정치적, 사회적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교회' 등이라고 주장했다. 독일연합교회(EKD) 회장을 역임한 만프레드 콕크(Manfred Kock) 목사는 독일 통일 10주년 연설에서 "10년 전 우리는 통일이 되면 개신교가 보다 부흥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오늘에 와서 조심스럽게 생각해 보면 자타가 인정하는 신앙 전수의 단절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며 "가정, 학교, 공동체, 선교 과업을 이행하는 그 어떤 현장에서든지 우리 교회의 최상의 우선순위를 마땅히 잊어서는 안 될 것"이라며 독일교회 상황과 통일독일에서 교회의 사명과 위치를 강조했다.
어려움 있지만 말씀 증거, 섬김 부흥 외치는 독일교회
이규영 교수는 오늘날 독일교회의 특징으로 △교회에 나오면서도 전혀 교회 일에 관계를 갖지 않고 방관자적 태도를 갖는 '무관심' △종교와 신앙에 관심이 없는 불신 상태인 '무신앙' △'통일 이후에도 동독 내 사회주의 잔재 강력'을 꼽았다. 이 교수는 "많은 성도가 등록교인이긴 하나 교회 공식예배 내지 프로그램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으며, 종교세를 내지만 교회와 전혀 관계를 갖지 않는다"며 "또 교인은 교인대로, 비교인은 비교인대로 교회와 상관없는 생활을 하며, 독일 서부보다 동부에서 이런 현상이 더욱 심한데, 동부 교회의 75% 정도가 무신앙 상태"라고 말했다. 동독 내 사회주의 잔재 현상으로 청소년 축복식에는 50%, 입교식에는 14%만 참가하는 실정이다.
이 교수는 이러한 어려움 앞에서도 통일 이후 독일교회가 말씀 증거와 섬김, 부흥을 외치는 교회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교회를 바로 세우고 유지하며 새롭게 하시는 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라는 신학적 근거와 '교회갱신, 각성, 전도'를 주제로 민족교회의 회개와 중생을 위해 뜻을 모으고 있다는 것이다.
통일 이후 독일교회에서 한국교회가 배울 교훈
이규영 교수는 "독일에서 목회 중인 한 목사는 동독지역 교회의 현실에 대해 '공산주의는 사실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었으나, 한 가지 분명하게 해낸 것은 기독교인의 마음에서 하나님을 없애는 일을 성공적으로 했다'고 말했다"며 "통일 이후에도 동독 주민 상당수가 신앙은 '민중의 아편'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 공산주의가 다 실패하더라도 기독교 핍박에 있어서만은 확실한 결과가 있다"며 "지금 북한의 실정은 분명히 무신론이 압도적인 만큼 북한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사전에 준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통일 이후 독일교회'의 현실이 '통일을 앞둔 한국교회'에 말하는 점으로 △한국의 통일을 위해 분단 전후, 통일 전후이든지 교회적으로 많은 준비가 요구되며 △통일은 그저 좋은 것만은 아니며 △통일이 교회 부흥으로 반드시 이어지지 않고 △한국의 통일을 위해 한국교회는 사역을 위한 창구의 단일화가 필요하며 △기독교와 민족의 관계를 성경적으로 바로 정립해야 하고 △한국교회는 성경에 입각한 통일신학의 확립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세미나를 주관한 마산재건교회와 하나의 코리아는 초대글을 통해 "풀러신학교 박사 논문을 보면 분단 이후 1950년~2006년 북한에서 순교한 사람이 1만5,657명이라고 한다"며 "70년 세월을 생각하면 이틀에 한 명씩 순교한 것이고, 기록으로 추측할 수 없는 더 많은 순교자가 있다면 하루도 쉬지 않고 순교의 피가 흐른 곳이 북한"이라고 말했다.
주최 측은 "이런 북한에 교회를 재건할 때 건물을 세우는 것도 필요하지만, 순교의 정신을 이어받은 영적 재건이 필요하다"며 "복음통일은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를 꿈꾸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재건하는 것"이라며 "북한에 교회를 세우는 것은 기독교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으로 시작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지희 기자 jsowue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