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선교신학회(회장 박영환)가 18일(목) 오전 11시 2010년 제1차 정기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신진학자 이종만 박사가 “복음주의 북한 선교운동의 정치적-신학적 기원”란 주제로 발표했다. 본지는 이 박사의 논문을 두 차례에 걸쳐 전문 게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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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북한 선교 운동의 신학적 기원
지금까지 북한 선교에 영향을 준 교회의 북한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이해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해방 이후 갈등으로부터 살펴보았다. 이것을 전쟁 이후에 유지되어온 북한 체제에 대한 ‘정치적 이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북한 복음화 운동으로서의 북한 선교가 이러한 정치적 이해 속에서 어떻게 복음적 선교운동과 결합하게 되었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3.1. 국가 재건에 있어서 기독교 신앙
해방은 단지 식민지의 속박에서 자유만을 가져다 준 것은 아니다. 한 순간에 정치적 변혁을 한반도에 가져왔으며, 특별히 권력 국가의 개념을 불어넣어 주었다. 식민지 시대 기독교 민족주의 진영에서 견지해오며 국가는 곧 민족의 공동체(nation)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국가 권력에 접근할 수 없는 상황에서 민족주의 운동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며, 민족-교회(church and nation or church and people)의 관계는 서구 기독교가 전파될 때부터 1930년대까지 기독교 민족주의의 틀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해방과 더불어 정치 권력에로의 접근을 방해하던 장애가 제거되고 기존의 민족 공동체(nation)의 이해가 독립된 국가 권력을 소유하는 포괄적이고 대외적인 국가(state)의 의미로 확대되었다. 식민지 시대 민족주의 운동의 현실 인식의 바탕인 민족-교회(church and nation)라는 틀이 해방과 더불어 국가-교회(church and state)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기존의 민족-교회는 민족과 주권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국가(state)로 확대된 것이다. 그러므로 해방은 교회가 국가를 민족이라는 제한된 틀을 벗어나 독립된 주권국가 안에서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현실 인식을 반영한 듯1945년 11월 28일 정동교회에서 열린 남부대회 역시 교회의 재건을 주된 안건으로 다루었지만, 동시에 해방 직후 사회 정치적 해결에 대한 참여를 공식화했다. 대회 직후 산하 기관으로 기독교 사회운동을 위한 기구로 출범한 기독교신민회도 이러한 취지에서 구성되었다. 이들은 다음 두 가지를 결의하였다.
- 우리는 김구 주석을 수반으로 한 대한임시정부를 절대 지지하며 대업완성을 위하여 십자가의 정신으로 헌신할 것
- 우리는 현존 교회의 발전과 전국적으로 억압 폐쇄된 교회들의 재건을 위하여 적극 노력할 것
이러한 기독교신민회는 이승만의 리더십 아래에 있던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의 일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이승만의 정치 세력으로 흡수되었다. 중도파로 분류되는 김규식이 수장을 맡고 있었던 조선기독교청년회전국연합회도 “일본의 악마적 세력이 해체시켰던 교회내의 청년조직체를 부활시켜 1) 하나님의 교회에 절대봉사하며 2) 조선의 완전 독립과 건설에 헌신하려는 일념”에서 창립한다고 성명하였다.
교회와 국가의 재건을 교회의 사명(missions)으로 동일시하는 이러한 입장은 당시 기독교 지도자들 사이에 기독교 정신 위에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다는 논리가 퍼져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김재준 교수는 불교와 유교가 이미 한국에서 건국의 기초로 시험되었던 것처럼, 이제 기독교를 건국의 기초로 시험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단언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한국의 건설은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해야 하는데, 그것은 사후에 들어가 경험되는 나라만이 아니고 이 땅에서도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신학적 이상을 정치적 현실에 실현하고자 하는 기독교인들의 의도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 정치에 대한 이상은 한경직 목사를 통해 더욱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청교도의 신앙 위에 건설된 미국은 그 신앙의 유산으로 인해 복을 누리며 강력한 국가가 될 수 있었다는 논리이다. 그래서 신앙적 기초 위에 세우는 국가가 해방된 한반도에서 이뤄져야 할 궁극적 이상이어야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모형은 서구 기독교 사회를 추구하는 것으로 구체화되었다. 특별히 국가-교회의 이상적 모델로서 미국은 종종 장려되고 독려되었다. 미국 상하의원들이 국가 비상기도의 날을 공동 결의했고 트루먼 대통령이 이를 승인했다는 보도가 나가자 기독공보는 기독 정치인들이 분발을 촉구하고 나섰다.
"오늘 우리 국회에 교계 출신 인물이 얼마며 원수 이대통령을 비롯하여 행정당국의 중요 멤버- 가 대부분이 아니었던가? 먼저 교회적으로 교계출신 인물은 크게 각성하여야 할 것이며 법으로 결의안건으로 채택은 못하더라도 최소한도 그런 노력만이라도 있어야 할 것이다"
제주기독교연합회에서는 6월 15일 휴전에 관한 정부지지 궐기대회를 갖고 이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보냈다. 이 성명은 에스더의 결단을 통한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과 니느웨 도성의 회개를 언급하며 기독교인들의 결단을 촉구하였다.
"각하께서 국내 각 기독교파 백만신도에게 일정한 기간에 일제히 구국금식기도를 올리도록 유시를 나리시는 동시에 각하 친히 이 기도에 참석하시면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반드시 한국을 건져주실 줄 믿고… "
결국 1953년 7월 3일에 휴전 회담 성사를 앞두고 이승만 대통령은 7월 4일을 한국 및 세계 평화 기도일로 제정하는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제주기독교연합회의 진정서 내용은 시국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국가-교회의 인식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곧 해방으로 회복된 세속적 권력(state)의 자주권을 보호하기 위해서 신적 기관(church)의 자기 역할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국가의 재건을 위해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교회의 역할을 이해하고 있었을까? 기독공보 창간호에 강흥수 목사는 새로 건설될 국가는 복음화 운동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단언하였다. 한경직 목사는 민족의 희망을 복음의 전파에 두고1950년 구국 전도대를 결성하였고 34명의 전도자를 지리산에 파견하기도 하였다. 초대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의 통리였던 김관식 목사는 해방 직후 일어났던 민족 복음화 운동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었다.
"선포된 말씀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총을 말하는 오랜 복음이었지만, 새로운 한국을 건국하는 데에 도덕적이고 영적인 갱신을 위해 필요한 열성이 덧보태졌다"
건국의 기초를 세우는데 도덕적이고 영적인 갱신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복음으로 더해졌다는 것이다. 결국, 복음을 통한 기독교의 확산은 기독교적 국가의 재건에 필요하다는 것이다. 전쟁 중에도 이러한 주장은 계속되었다. 기독공보의 한 사설은 복음이 전파되어 교회 없는 지역이 한반도에서 사라진다면 한국의 독립은 완성될 것이며 국가적 위엄과 번영을 회복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결국, 세속적 기관에 속하는 국가(state)의 독립과 재건을 위해 신적 기관에 속하는 교회(church)의 복음 운동을 통해 강화된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입장이 국가 재건 운동에 있어서 복음화 운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국가-교회(church-state)의 관계 속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국가와 교회가 성쇠의 관점에서 동일한 운명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일제 강점의 시대가 준 교훈이기도 했다. 그래서 해방 직후 새로운 국가 건설은 곧 새로운 교회의 운명처럼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복음 전파는 세속적 권력 기관인 국가를 재건하는 것으로 각인되었던 것이다.
3.2. 기독교 신앙의 민주주의적 공헌
복음전파는 단지 국가재건에만 필요한 것으로 그치지 않고, 민주주의 건설에도 필수적인 것으로 주장되었다. 해방 직후부터 공산주의와의 투쟁은 전체주의로부터 자유를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을 고취시켰으며, 더 나아가 신앙의 자유를 지키는 것은 교회 생존의 문제로 여겨지게 되었다. 기독신보의 한 사설은 전후 한국 교회 안에서 자유에 대한 관점이 남북한의 정치 체계를 구분하는 강력한 기준이 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으로 신앙의 자유가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다 또는 실제로도 자유를 향유하고 있다. 그러나 공산치하에 있는 북한은 법적으로 실제로 신앙의 자유가 없으며 교인으로 자처하는 사람은 한 사람의 인민도 없다"
결국 자유는 민주주의의 다른 이름으로 불리우기 시작했으며, 민주주의는 자유의 척도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자유가 기준이 된 이유는 해방 이후 이데올로기 투쟁에서 경험된 것처럼, 자유를 통해서 전체주의에서 찾을 수 없는 인간의 존엄과 권리가 보장될 수 있다는 논리 때문이었다. 그래서 민주주의의 개념은 자유를 보장함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는 사회의 원리로 이해되고 있었다. 이렇게 자유의 관점에서 남북의 체제를 구분하는 태도는 민주주의를 교회의 선교적 사명(missions)으로 인식하게 하는 동시에, 민주주의의 사수가 교회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인식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박상증 목사는 다음과 같이 기독교의 운명이 민주주의를 세우는데 있다고 단언하고 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고창하며 이것을 기독교적인 것으로 세례를 베풀고 거룩한 것으로 만들어 하나의 ‘신화’를 조성한다. 민주주의의 운명은 기독교의 운명이며 전 자유진영의 운명은 기독교의 운명으로 생각한다"
곧 교회의 운명이 민주주의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민주주의는 교회의 운명을 결정하며 동시에 복음의 전파는 민주주의를 세워간다는 것이다. 복음전파와 민주주의의 확립은 민주주의가 기독교 신앙에서 출발하고 발전했다는 논리로 인해 강화되었다. 박형규 목사는 민주주의에 대한 기독교의 공헌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민주주의가 기독교적 정신 풍토에서만 가능한 사회제도라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독단일지 모른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또 현실적으로 기독교적 인간 이해가 이 제도를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김형석 교수도 민주주의가 기독교 신앙의 산물이라고 주장했으며, 1974년 5월 박정희 대통령과의 조찬 기도회에서 한경직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가 민주주의의 영원한 토대라고 설교하였다. 송정율 목사는 기독교가 민주주의를 위한 독특한 영적 원동력이며,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막중한 사명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기독교와 함께 발전한 민주주의가 복음 확산을 통해 기독교 정신이 사회 속에 확립될 때, 민주주의는 세워지며 동시에 자유와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가 실현될 것이라고 주창되었다. 조향록 목사는 기독교 신앙의 전파를 통한 자유 정신과 민주주의의 전파가 국가 안보를 강화한다고 주장하였다.
"민족복음화로 신앙 전선을 더욱 확대하고 인간의 자유권을 더욱 신장함으로써 전국민이 나의 생존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그들과 죽움을 걸고 맞서겠다는 실질적 반공세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처럼 기독교 지도자들은 복음 전파를 통해 민주주의가 확립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세속적 권력(state)’ 안에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교회의 선교적 노력은 자유와 인권을 존중히 여기는 사회를 세워나기 위한 필수적인 것이라고 확신했다. 더 나아가 복음 전파를 통한 민주주의 건설은 북한 공산주의를 이기는 원동력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궁극적으로 남북 대결을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 대결로 인식하면서, 복음으로 자유와 인권이 보장되는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이 국가와 교회를 공산주의의 위협에서 건지는 방편이라는 입장을 취하였던 것이다.
4. 자유 이념의 확산으로서의 북한 선교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남한 기독교인들에게 복음은 자유정신과 민주주의 전파의 방편으로 이해되고 있었다. 결국 북한에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는 일도 북한 선교도 자유 이념의 확산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북한에 대한 정치적 이해는 두 가지 상반된 관점, 곧 적대감과 동정이었다. 북한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해방 이후 이데올로기적 갈등에서 생겨난 것이며, 자유의 관점에서 공산주의 정권에 대한 적대감 그리고 그 밑에서 억압 받는 사람들로 나누는 입장이었다. 북한 선교 문제를 다루는 한 사설은 이러한 두 가지의 시각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북한 땅을 강제로 점령하고 있는 공산주의자들을 증오한 나머지 사실 북쪽의 전부가 공산당의 것으로 잘못 알고 북한에 대한 관심을 갖지 않았다…. 공산당에게 쫓겨 우리가 두고 온 교회, 우리가 두고 온 교인, 우리가 두고 온 산하를 하루 속히 찾아야 한다"
안병욱 교수도 우리의 적은 소수의 공산주의자이지 결코 그 아래에서 억압받는 애국적 북한 동포들이 아니며, 전자에게는 군사적 대응으로 후자에게는 긍휼과 사랑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상반된 관점은 북한에 대한 정치적 이해를 반영하는 것이며, 또한 선교운동이 북한 정권을 무너뜨리고 북한 동포를 그 속박에서 해방시켜야 한다는 논리로 비약하게 되었다. 이것이 복음주의 북한 선교운동의 방향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전체주의 체제 아래서 고통 당하는 동포들에게 자유의 정신을 전파할 때 해방이 가능한데, 그것이 복음을 통해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었다.
"북한의 종교화한 이념을 해방시키고 그 빈자리에 그리스도의 사랑과 의의 십자가를 심음이 없는 통일이나 북한선교는 결국 공허한 것이라는 우리의 신념과 신앙을 우리의 통일 원칙으로 밀고 나갈 세력은 오직 한국 교회 뿐임을 자부할 때에 오늘의 한국 교회야말로 북의 겨레를 사람의 사상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심어야 할 사명을 수행할 수 있는 순수한 애국적 정신력이다"
이러한 북한 선교 접근 방법은 기독교 신앙과 민주주의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이해를 반영하고 있다. 곧 기독교 신앙이 자유와 민주주의 이념을 확산시켜 궁극적으로 북한 정권의 해체와 북한 동포에게 해방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확신이다. 그래서 북한 선교 운동의 궁극적 목표는 전쟁과 투쟁 없는 평화통일을 이루는 것으로 귀결된다.
"또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세계 여론에 호소하여 이북동포에게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도록 국제적 압력을 조성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북한 동포가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로 튼튼히 설 때에 호전적인 독재자의 발붙일 곳이 없어질 것이며 한국문제의 한국화가 그 빛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복음주의를 중심으로 한 북한 선교는 북한을 두 가지 상반된 시각으로 보는 정치적 입장과 동시에 기독교 신앙의 전파를 자유와 인권을 중심으로 한 민주주의 정신의 확신으로 인식하는 기독교인들의 신학적 태도에서 기인한 것이다. 북한에 대한 이중적 관점은 단지 교회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해방 이후 남한 사회에서 반공 이데올로기를 유지하는 강력한 정치적 논리였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이해가 선교와 함께 접목되어 기독교를 민주적 이념의 정신적 기초로 여기는 기독교지도자들 사이에, 기독교 신앙이 자유의 정신을 북한에 심어 공산체제를 무너뜨리고 북한 동포를 해방하여 궁극적으로 평화적 통일을 이루자는 결론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결국 복음주의 북한 선교 운동은 이미 그 선교적 전략과 이념에서 해방 직후부터 남북간의 이데올로기의 갈등과 투쟁 그리고 민족 분단의 아픔과 상처를 통한 역사적 경험의 귀결이라 할 것이다. (끝)
이종만 박사 (예장합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