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성경
디모데후서 3장 14-17절
서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참으로 혼란스럽습니다. 진리와 거짓의 경계는 흐려지고, 절대적 기준은 무너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가치관과 생각을 옳다고 주장하지만, 정작 인간의 마음은 더욱 공허해지고 삶은 불안과 혼란 속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로마의 차가운 감옥에서 순교를 앞둔 채, 자신의 영적 아들이자 에베소교회의 젊은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마지막 권면을 전합니다. 그는 장차 나타날 말세의 영적 현실과 성도들이 마주하게 될 위험을 분명하게 경고합니다. 디모데는 세상이 주목하는 영웅이나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믿음의 가정에서 자라난 평범한 청년이었고, 때로는 두려움과 연약함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신실함과 순종을 귀하게 보시고 초대교회의 중요한 지도자로 사용하셨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믿음 안에서 참 아들’이라 부를 만큼 깊이 신뢰했습니다. 또한 생애 마지막 순간에도 그를 곁으로 부를 만큼 각별한 애정을 가졌습니다. 이는 디모데가 뛰어난 재능 때문이 아니라 변함없는 충성과 믿음을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능력 있는 사람은 많지만,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충성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화려한 재능의 소유자가 아니라 맡겨진 자리에서 끝까지 신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디모데의 삶과 믿음을 살펴보며, 혼란한 시대 속에서도 하나님께 인정받고 귀하게 쓰임 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디모데후서 3장 1절에서 바울은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라고 경고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고통’의 본질은 경제적인 위기나 외적인 전쟁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 내면의 총체적인 부패와 왜곡된 사랑’입니다. 2절 이하를 보면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고 교만하며, 거룩하지 아니하고, 하나님보다 쾌락 사랑하기를 더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땅히 하나님께 향해야 할 인간의 사랑이 ‘자기 자신’과 ‘돈’과 ‘쾌락’으로 뒤틀려 버린 상태, 이것이 성경이 진단하는 말세의 비극입니다.
그런데 더 무서운 경고는 5절에 등장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이 말세의 징조가 교회 바깥세상의 이야기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종교적인 형식과 직분, 거룩해 보이는 언어와 예식이라는 ‘모양’은 가득하지만, 정작 죄를 이기고 삶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실제적인 ‘능력’은 상실한 자들이 가득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바울은 13절에서 이 어두운 시대의 정점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기도 하고 속이기도 하나니.” 이는 죄와 거짓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깊어지고 확산된다는 뜻입니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을 속이지만, 결국에는 자신도 그 거짓에 속아 진실과 거짓을 분별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죄는 결코 한 자리에 머물지 않습니다. 양심을 무디게 하고 영적 분별력을 흐리게 하여 사람을 점점 더 깊은 어둠으로 끌고 갑니다. 그래서 거짓을 말하던 사람이 스스로 그 거짓을 진실로 믿게 되고, 진리를 거부하던 사람이 결국에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영적 무감각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이 말세의 무서운 특징입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거짓 사상과 왜곡된 가치관이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세상의 소리에 흔들리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진리를 떠난 사람은 결국 다른 사람뿐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 속이게 되지만, 말씀 안에 거하는 사람은 어떤 시대 속에서도 바른길을 분별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사방이 흔들리고 모든 것이 뒤틀려 가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붙잡아야 합니까? 우리는 어디에 우리의 영혼의 닻을 내려야 합니까?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을 듣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본론
1. “그러나 너는”, 하나님의 숨결 위에 서라
모든 것이 속고 속이며 악화 일로를 걷고 있는 절망적인 풍조 바로 뒤에, 바울은 반전의 포문을 엽니다. 본문 디모데후서 3장 14절의 첫 단어는 헬라어로 ‘쉬 데(Σὺ δὲ)’, 즉 “그러나 너는(But as for you)”입니다. 이 짧은 선언은 우리 가슴에 거대한 영적 전선을 형성합니다. 온 세상이 타락의 조류를 따라 휩쓸려 내려갈지라도, 세상의 모든 교회가 경건의 모양만 남긴 채 표류할지라도, “디모데 너만큼은, 그리고 거룩한 구별된 성도인 너희만큼은 달라야 한다”는 하나님의 엄중한 명령입니다.
그렇다면 세상과 구별되어 거해야 할 그 자리는 어디입니까?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딤후 3:14) 바울은 디모데에게 새로운 트렌드나 세상의 세련된 방법론을 찾아 정처 없이 헤매지 말고, 이미 그가 전수받은 순전한 복음의 진리 위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영구히 머물라고 명령합니다.
성도 여러분, 흔들리는 시대일수록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은 기본입니다. 본질입니다. 바울은 15절에서 그 본질의 실체를 명확히 선포합니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여기서 우리는 세상의 학문과 성경의 결정적인 차이를 발견합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세상의 인문학이나 철학, 심리학과 자기계발서를 탐독합니다. 물론 인문학은 인간이 누구인지 이해하고 우리의 심리적 아픔을 공감하는 데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저 역시 목회하기 전까지는 심리학을 전공으로 연구하고 가르쳐봤지만, 그것은 한계가 있음을 연구할수록 더 많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문학에는 치명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비극을 진단할 수는 있으되, 구원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철학도, 위대한 문학도, 세련된 심리학도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인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야 할 죄인을 살려내는 길을 단 한 줄도 제시하지 못합니다. 오직 성경만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는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지혜를 독점적으로 보유하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의 기원이 인간에게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1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성경은 인간 저자들의 천재적인 문학적 영감의 산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감동’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테오프뉴스토스(θεόπνευ스τος)’, 즉 “하나님께서 친히 그분의 숨결을 불어 넣으신 책(God-breathed)”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학사 에스라가 백성들 앞에서 율법책을 펼쳐 읽을 때, 모든 백성은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에스라가 여호와 하나님을 송축하자 백성들은 손을 들고 “아멘, 아멘”으로 화답하였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께 경배했습니다(느 8:5~6).
왜 그들은 그렇게 반응했을까요? 그들이 들은 것은 단순한 글이나 지식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통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있었습니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종이 위에 인쇄된 활자를 읽는 행위가 아닙니다. 지금도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며, 하나님의 호흡을 직접 대면하는 거룩한 순간입니다. 말씀을 읽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말씀을 들을 때 성령께서 우리의 심령을 깨우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경을 대할 때 지식을 얻기 위한 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성경을 가까이 두고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말씀을 읽지만 순종하지 않고, 들으면서도 마음에 새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에스라 시대의 백성들처럼 말씀 앞에 겸손히 서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삶이 변화되는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숨결이 담긴 성경이 우리 안에 들어올 때 네 가지 영적 역사가 일어납니다. 첫째, 우리가 걸어가야 할 진리의 길을 보여 주는 교훈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둘째, 잘못된 길로 벗어났을 때 죄를 깨닫게 하고 양심을 일깨우는 책망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셋째, 부러진 뼈를 바로 맞추듯 왜곡된 생각과 삶의 방향을 바로잡는 바르게 함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넷째, 바른길을 지속적으로 걸어갈 수 있도록 거룩한 습관과 인격을 세워 가는 의로 교육함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성도는 이 네 단계를 통과하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져 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바울은 17절에서 성경의 궁극적인 목적을 선언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딤후 3:17) 여기서 ‘온전하게’라는 말은 부족함 없이 성숙하고 완성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또한 “갖추게 하려 함이라”는 말은 전쟁에 나서는 군사가 필요한 모든 무장을 완비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즉 성경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히 세우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영적으로 무장시키는 책입니다. 말씀으로 훈련된 사람은 세상의 거짓과 유혹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으며,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일을 감당할 능력을 갖추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능력은 세상의 경험이나 지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옵니다. 말씀으로 채워진 사람은 흔들리는 시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어두운 세상 가운데서도 진리의 빛을 비추며 살아가게 됩니다.
세상의 책은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하고 일시적인 위로를 줄지 모르지만, 우리를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내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호흡인 성경만이 우리를 거룩하게 변화시키고, 이 어두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인 ‘선한 일’을 넉넉히 감당할 영적 체력과 실제적인 능력을 공급해 줍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 양육과 삶의 중심에 다른 인간의 사상이나 가공된 프로그램이 주교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 요약해 놓은 세련된 책들은 디딤돌일 뿐입니다. 우리는 가공되지 않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 그 자체로 돌아가 하나님의 숨결을 직접 들이마셔야 합니다. 그 말씀 앞에 온전히 직면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2. 성경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라
오늘 바울이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와 능력을 이토록 극찬했다면, 우리는 동시에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복음서의 말씀,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이 던지시는 치명적인 경고의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바울이 성경의 권위를 가르쳤다면, 예수님은 성경을 대하는 인간들의 무서운 왜곡과 맹점을 고발하십니다.
요한복음 5장의 배경을 보면, 예수님은 안식일에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동안 신음하던 절망적인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생명의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성경의 전문가라고 자부했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병자가 나은 기적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왜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걸어가느냐”며 율법 조항을 들이대고 예수님을 죽이려 들었습니다.
그들을 향해 예수님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성경의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를 선포하십니다. 본문 요한복음 5장 39절과 4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성경 박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의 글자 수를 세어가며 주야로 율법을 묵상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소유하고, 성경을 연구하는 그 종교적인 행위 자체에 영생이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선언하신 성경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성경의 모든 역사와 제사의 피와 선지자들의 눈물과 예언은 단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그 자체가 종착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실체를 가리키는 이정표에 불과합니다. 이정표를 붙잡고 그것이 집이라고 우겨서는 안 됩니다.
디모데후서 3장 15절에서도 바울이 그냥 성경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라고 합니다.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다고 못 박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렌즈를 통하지 않고 성경을 읽는 모든 행위는 알맹이가 빠진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유대인들의 비극이 무엇이었습니까? 성경을 평생 연구했는데, 정작 그 성경이 가리키는 실체이신 예수님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는 그분을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 했습니다. 텍스트에 대한 지식적인 집착이, 실체이신 예수님에 대한 거부로 이어진 영적 소경의 상태였습니다.
예수님은 38절에서 그들의 상태를 냉정하게 진단하십니다.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 그들은 성경을 머리로 외우고 몸에 지니고 다녔지만, 말씀이 그들의 중심에 ‘거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의 통치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이 정말 그들 내면에 살아 있었다면, 말씀의 실체이신 예수님을 보았을 때 즉각 알아보고 엎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말씀의 지식만 있었을 뿐, 말씀의 생명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왜 많은 사람이 성경을 읽고도 변화되지 못할까요? 왜 교회를 오래 다녀도 삶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을까요? 바로 바울이 말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딤후 3:5)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모양’은 겉으로 드러나는 종교적 형식을 의미합니다. 예배에 참석하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며, 신앙인의 언어를 사용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능력’은 성령과 말씀을 통해 삶이 변화되는 실제적인 역사입니다.
다시 말해, 경건의 모양은 있는데 경건의 능력은 없다는 것은 신앙의 외형은 갖추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삶을 지배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입술로는 믿음을 고백하지만, 삶에서는 여전히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살고, 성경을 읽지만 순종하지 않으며, 죄를 깨달아도 회개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3. 종교적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라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그들은 왜 그토록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면서도 눈앞의 예수님을 믿지 못했을까요? 무엇이 그들의 눈을 그토록 멀게 만들었습니까?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내면에 숨겨진 왜곡된 영적 동기를 날카롭게 발가벗기십니다.
42절입니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충격적인 선언입니다. 그들의 밤샘 성경 연구, 그들의 철저한 율법 준수, 그들의 대단한 종교적 열심의 뿌리에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있었습니까? 44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그들이 성경을 연구한 진짜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기 영광’이었습니다. 종교적인 사회 안에서 성경 지식을 자랑하여 박학다식하다는 평판을 얻고,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는 모습을 통해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영광을 취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철저히 낮아지셔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셨고(41절), 마침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러니 자기 영광에 눈이 멀고, 자기를 사랑하는 유대인들의 눈에, 낮아지신 예수님이 메시아로 보일 리가 만무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디모데후서 3장 2절에서 바울이 말세의 첫 번째 특징으로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라고 지적한 것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세상의 평판을 두려워하며, 교회 안에서조차 ‘서로의 영광을 취하려는’ 자들은 성경을 아무리 많이 읽고 연구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진짜로 무릎 꿇을 수 없습니다. 도리어 그 성경 지식을 가지고 남을 정죄하고, 자신의 영적 우월감을 채우는 무서운 독약으로 삼을 뿐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성경을 보수적으로 믿는다고 자부하고, 수많은 제자훈련을 수료했다고 자랑하지만, 정작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겸손함, 긍휼과 사랑의 성품이 나타나고 있습니까?
성경을 많이 알아서 교리적인 논쟁에서는 백전백승할지 몰라도, 삶의 현장에서는 여전히 돈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며, 내 자존심 하나 내려놓지 못해 피를 흘리고 있다면, 우리는 요한복음 5장의 바리새인들과 다를 바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성경 연구의 목적은 지식의 축적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는 목적은 내 종교적 경력을 쌓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유일한 목적은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 그분과 연합하고, 그분의 생명을 얻는 것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결론
말세의 조류를 거스르는 말씀의 사람이 되십시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세상은 앞으로 더욱 영악해질 것이며, 사단은 끊임없이 경건의 모양만 붙잡고 안심하라고 우리를 미혹할 것입니다. 세상의 온갖 화려한 지식과 심리학적 위로가 복음의 자리를 대체하려고 밀고 들어올 것입니다. 이 흔들리는 말세의 한복판에서,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강력하게 도전하십니다. “쉬 데(Σὺ δὲ) — 그러나 너는!” 세상이 아무리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며 흘러갈지라도, “그러나 너는” 하나님의 숨결이 담긴 성경으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경의 문자에만 머무는 종교인이 되지 말고, 성경이 가리키는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오라는 초청입니다.
이제 세 가지 결단으로 우리의 삶을 조정하기를 원합니다. 첫째, 지식을 쌓는 성경 읽기에서, 내 존재를 깨뜨리는 성경 읽기로 전환하십시오. 매일 말씀을 펼칠 때마다 지식만을 얻으려 하지 말고, 하나님의 호흡 앞에 내 부끄러운 모습을 직면하십시오. 말씀이 나를 교훈하고, 나를 책망하여 가슴을 치게 만들고, 뒤틀린 내 삶을 바르게 교정하시도록 여러분의 내면을 말씀 앞에 날마다 내어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교회 안에서 ‘서로의 영광’을 구하는 교만을 멈추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십시오. 우리의 직분과 봉사와 성경 지식이 내 영적 우월감을 채우는 도구가 되지 않게 하십시오.
성경을 알면 알수록, “나는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으로 가장 낮고 어두운 곳을 섬기는 진짜 경건의 능력을 회복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셋째, 말세의 조류를 거스르는 말씀의 야성을 깨우십시오. 주일에만 성경책을 들고 오는 무력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삶의 현장에서 세상의 성공 방정식과 유행을 거스르는 자들이 되십시오. 비록 손해를 보고 바보라 무시를 당할지라도, “성경이 가라 하면 가고, 성경이 멈추라 하면 멈춘다”는 말씀의 절대 권위 앞에 나를 복종시키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십시오.
그리하여 이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전하게 구비되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든 선한 일을 넉넉히 행할 능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예수의 참된 제자로 우뚝 서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속고 속이는 어두운 말세의 조류 속에서 우리를 “그러나 너는” 하시는 말씀의 자리로 불러주심에 감사합니다. 경건의 모양만 남은 채 내 영광과 자기를 사랑했던 우리의 종교적 교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제 세상의 헛된 지식과 위로가 아닌, 하나님의 숨결인 성경으로 돌아가게 하옵소서. 성경을 읽을 때마다 그 안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시고, 그분의 생명으로 충만하여 삶의 현장에서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춘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들로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최원호 목사 (서울 상봉동 은혜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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