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는 사람
제목
내게 부르짖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성경
호세아 7장 1~7절

서론

하나님의 본심은 심판이 아니라 상처를 싸매고 본래의 상태로 회복시키시는 ‘치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을 치료하려 하실 때, 그동안 감추어져 있던 총체적인 죄악들이 환부의 고름처럼 터져 나왔습니다. 빛이 비추어지자 어둠이 폭로된 것입니다. 본문은 치료의 은혜를 거부한 채 완악함과 영적 불감증에 빠져버린 북이스라엘의 참혹한 영적 실상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본론

Ⅰ. 치료의 은혜를 거부하는 숨겨진 죄악의 폭발 (호세아 7:1~2)

1절: “내가 이스라엘을 치료하려 할 때에 에브라임의 죄와 사마리아의 악이 드러나도다 그들은 거짓을 행하며 안으로 도둑질하고 밖으로 떼 지어 노략질하며”

2절: “내가 모든 악을 기억하였음을 그들이 마음에 생각하지 아니하거니와 이제 그들의 행위가 그들을 에워싸고 내 얼굴 앞에 있도다”

“내가 이스라엘을 치료하려 할 때에”: 하나님의 본심은 심판이 아니라 ‘치료’(raphah)입니다. 하나님은 상처를 싸매고 본래의 거룩한 상태로 회복시키시는 여호와 라파의 하나님이십니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출애굽기 15:26) “내가 그들의 반역을 고치고 기쁘게 그들을 사랑하리니” (호세아 14:4) 하나님은 죄인을 멸망시키기 전에 먼저 치료하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에브라임의 죄와 사마리아의 악이 드러나도다”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을 대표하는 가장 강력한 지파이며, 사마리아는 그 수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치료의 은혜를 베풀려고 하시자, 오히려 그동안 감추어져 있던 죄악이 환부의 고름처럼 터져 나왔습니다. 빛이 비추어지자 어둠이 드러난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는 한두 가지 특정한 죄가 아니라 북이스라엘 전체를 병들게 한 총체적인 죄악을 의미합니다. 첫째, 우상숭배의 죄입니다.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죄였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 1세 이후 금송아지를 섬기고 바알 숭배에 빠졌습니다.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호 4:1)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의지하는 영적 간음에 빠졌습니다. 둘째, 거짓과 속임수의 죄입니다. 호세아는 에브라임을 ‘속이는 자’(호 12:1)라고 부릅니다. 정직이 사라지고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거짓과 기만이 만연했습니다.

셋째, 탐욕과 불의의 죄입니다. “안으로 도둑질하고 밖으로 떼 지어 노략질하며” 힘 있는 자들이 약자를 착취하고 가난한 자들을 억압했습니다. 재물과 이익을 위해 정의를 무너뜨렸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부정부패, 불공정, 경제적 착취와 같은 죄입니다. 넷째, 권력욕과 폭력의 죄입니다. 호세아 7장은 왕들의 암살과 쿠데타가 끊이지 않았던 시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지도자들은 나라보다 권력을 사랑했고, 권력을 얻기 위해 피 흘리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다섯째, 형식적인 종교의 죄입니다. 그들은 제사를 드리고 절기를 지켰지만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마음으로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며” (호 7:14) 입술로는 하나님을 섬겼지만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심각한 것은 회개하지 않는 죄입니다. “내가 모든 악을 기억하였음을 그들이 마음에 생각하지 아니하거니와” 죄를 지은 것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경고하시고 징계하시며 치료하려 하셨지만, 그들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도 않았고 하나님께 돌아오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에브라임의 죄와 사마리아의 악의 본질은 하나님을 떠난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보다 우상과 재물과 권력과 자신의 욕망을 더 사랑한 결과, 우상숭배와 거짓, 탐욕과 불의, 폭력과 형식주의, 그리고 회개하지 않는 완악함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드러내신 북이스라엘의 영적 실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가장 먼저 죄가 드러납니다. 빛은 어둠을 숨기지 않고 폭로하기 때문입니다.

“안으로 도둑질하고 밖으로 떼 지어 노략질하며”: 죄의 전방위적 만연성을 뜻합니다. 내적으로는 도덕적 붕괴(도둑질)가 일어나고, 외적으로는 사회적 법질서의 붕괴(노략질)가 동시에 발생하여 총체적 무법천지가 되었음을 고발합니다. “그들의 입은 저주와 속임과 포학이 가득하고” (시편 10:7) “네 지도자들은 패역하여 도둑과 짝하며” (이사야 1:23) 개인의 타락은 결국 공동체의 타락으로 이어집니다.

“내가 모든 악을 기억하였음을 그들이 마음에 생각하지 아니하거니와”: 인간 영적 타락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의 행동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는 ‘하나님 망각증’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를 보지 아니하시며 야곱의 하나님은 깨닫지 아니하시리라 하나” (시편 94:7) “그들이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지 아니하시며 여호와께서 이 땅을 버리셨다 하느니라” (에스겔 8:12) 죄인은 하나님이 보지 않으신다고 착각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고 계십니다.

“이제 그들의 행위가 그들을 에워싸고 내 얼굴 앞에 있도다”: 죄는 짓는 순간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사방으로 가두는 감옥(에워쌈)이 되며, 하나님의 불꽃 같은 눈동자 바로 앞에(coram Deo) 직면하게 됩니다. “악인은 자기의 악에 걸리며 그 죄의 줄에 매이나니” (잠언 5:22)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라디아서 6:7) 죄는 결국 죄인을 포위하고 심판의 자리로 끌고 갑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돌아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근 6.3 지방선거를 둘러싸고 선거의 공정성과 투명성에 대한 여러 논란과 의혹들이 제기되면서 많은 국민이 불신과 갈등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특정 정치적 입장을 지지하느냐 반대하느냐가 아닙니다. 호세아가 고발하는 핵심은 죄 그 자체보다도 죄를 직면하지 않으려는 태도입니다. 만일 사회 속에 불의가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밝혀져야 하고, 만일 의혹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것 역시 분명하게 드러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시며, 빛은 결국 어둠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대저 숨겨진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눅 8:17) 문제는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사람들이 진실을 찾기보다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는 태도입니다. 이것이 영적 불감증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상대방만 비난하며, 회개보다 진영 논리에 매몰될 때 사회는 더욱 분열됩니다. 호세아 시대의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라가 무너지고 있었지만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죄를 직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 역시 사회의 문제를 말하기 전에 먼저 내 안의 에브라임의 죄와 사마리아의 악이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공동체의 정의를 세우시기 전에 먼저 우리의 양심을 깨우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히브리서 3:15)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즉시 반응하라는 뜻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처음에는 말씀을 들으면 찔림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음성을 계속 무시하면 점점 무뎌집니다. 처음에는 죄라고 느끼던 것도 반복되면 아무렇지 않게 여기게 됩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녀의 잘못을 지적하면 처음에는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그러나 계속 변명하고 거부하면 나중에는 부모의 말 자체를 듣기 싫어하게 됩니다. 하나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종을 미루는 것이 반복되면 결국 마음이 굳어집니다.

여기서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고집을 부리거나 변명하거나 순종을 미루지 말라는 뜻입니다. 회개하라고 하시면 회개하고, 용서하라고 하시면 용서하고, 기도하라고 하시면 기도하고, 순종하라고 하시면 순종해야 합니다. 특히 중요한 단어는 ‘오늘’입니다. 하나님은 ‘언젠가’가 아니라 ‘오늘’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순종을 미루는 동안 마음은 더욱 굳어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수없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홍해를 건넜고 만나를 먹었으며 반석에서 물을 마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평하고 원망하며 마음을 완고하게 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바로 그 실패를 교훈으로 삼아 “오늘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든 마음을 닫지 말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책망하시고 깨우시는 목적은 정죄가 아니라 회복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느냐” (롬 2:4)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리의 죄를 드러내시는 것은 우리를 버리기 위함이 아니라 고치시기 위함입니다. 양심을 찌르시는 것은 상처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회개와 회복의 자리로 인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이 찔린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신호입니다. 그 순간 변명하지 말고, 미루지 말고, 즉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미루는 사람은 마음이 굳어지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즉시 순종하는 사람은 변화되고 회복됩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3장 15절과 로마서 2장 4절이 함께 가르치는 은혜의 원리입니다.

특히 2절의 말씀은 소름 돋는 경고입니다. “그들이 마음에 생각하지 아니하거니와”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가 아니었습니다. 절기를 지키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설마 하나님이 내 사소한 탐욕과 은밀한 음란, 남을 비방한 말들까지 다 기억하시겠어?”라는 실천적 무신론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이사야 29:13) 죄가 삶의 구조가 되어버리면, 인간은 죄를 지으면서도 불안해하지 않는 ‘양심 화인’의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디모데전서 4:2) 여기서 ‘화인’(火印)이란 옛날에 뜨겁게 달군 쇠로 사람이나 가축의 피부에 낙인을 찍는 것을 말합니다. 불에 덴 피부는 감각이 없어집니다. 아무리 만져도 이전처럼 아픔을 느끼지 못합니다.

바울은 바로 이 모습을 양심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처음 죄를 지을 때는 양심이 괴롭습니다. 거짓말을 하면 마음이 불편하고, 남을 미워하면 찔림이 있고, 예배를 소홀히 하면 죄책감이 생깁니다. 그런데 회개하지 않고 반복하면 양심이 점점 무뎌집니다. 처음에는 죄를 짓고 잠을 못 자던 사람이, 나중에는 죄를 지어도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양심이 화인을 맞은 상태입니다.

바로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을 통해 계속 말씀하셨지만, 그는 마음을 완고하게 했습니다. 결국 나중에는 하나님의 경고를 들어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룟 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돈궤를 맡은 제자였지만 탐욕을 반복하다가 결국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았습니다.

양심이 화인을 맞으면 세 가지 증상이 나타납니다. 첫째, 죄를 죄로 느끼지 못합니다. 둘째, 말씀을 들어도 찔림이 없습니다. 셋째, 회개보다 변명이 많아집니다. 그래서 이것은 매우 위험한 영적 상태입니다. 다윗은 죄를 지었지만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자마자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삼하 12:13)고 회개했습니다. 양심이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양심이 화인을 맞은 사람은 책망을 들어도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화를 내거나 정당화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찔러 주실 때 감사해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마음이 아프고 죄가 보이고 회개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그것은 양심이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Ⅱ. 정욕과 권력욕으로 달궈진 화덕 (호세아 7:3~6)

호세아 선지자는 당시 북이스라엘의 참혹한 영적 상태를 ‘달궈진 화덕’이라는 강력한 시각적 비유로 고발합니다. 본문 3절은 “그들이 그 악으로 왕을, 그 거짓으로 지도자들을 기쁘게 하도다”라고 말씀합니다. 당시 사회 지배층은 공의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진실을 말하는 자를 멀리하고, 자신을 기쁘게 하는 아첨꾼들을 가까이했습니다. 아첨꾼들은 거짓으로 왕의 비위를 맞추었고, 왕은 그 감언이설을 즐겨 들었습니다. 권력과 악이 추악하게 야합한 것입니다. 잠언 29장 12절에 “통치자가 거짓말을 좋아하면 그의 신하들은 다 악하게 되느니라”고 하신 말씀 그대로입니다. 리더가 중심을 잃고 거짓을 용인할 때, 그 공동체 전체는 순식간에 병들고 맙니다.

이어지는 4절에서 호세아는 이들의 내면을 본격적으로 파헤칩니다. “그들은 다 간음하는 자라 빵 굽는 자가 달구어 놓은 화덕 같도다 그가 반죽을 뭉침으로 발효되기까지만 불 일으키기를 그칠 뿐이니라” 성경이 이들을 향해 “다 간음하는 자”라고 선언할 때, 이는 단순한 육체적 음란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고, 성공과 쾌락을 추구하는 ‘영적 간음’을 포괄합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화덕은 인간 내면에 자리 잡은 통제되지 않는 탐욕, 권력욕, 시기심, 분노를 지칭합니다.

특히 “발효되기까지만 불 일으키기를 그칠 뿐”이라는 4절 후반부의 비유는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빵 굽는 자는 반죽이 숙성되는 동안 잠시 불길을 낮추거나 덮어둡니다. 겉보기에는 불이 꺼진 것 같지만, 화덕문 안쪽의 열기는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습니다. 죄의 속성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죄악이 잠시 멈춘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들이 회개했기 때문이 아니라, 더 큰 죄를 짓기 위해 타이밍을 노리며 은밀하게 ‘잠복’하고 있는 상태라는 뜻입니다.

야고보서 1장 14~15절은 이 영적 메커니즘을 정확히 관통합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죄는 어느 날 갑자기 충동적으로 폭발하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마음의 화덕 안에서 발효되고 숙성된 후에 삶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사람을 넘어뜨리는 결정적인 원인은 외부의 거친 환경이 아니라, 내면에서 다스려지지 않는 정욕입니다.

5절과 6절은 이 달궈진 화덕이 어떻게 파멸의 불꽃으로 번지는지를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우리 왕의 날에 지도자들은 술의 뜨거움으로 병이 나며 왕은 오만한 자들과 더불어 악수하는도다 그들이 엎드려 기다릴 때에 그들의 마음은 화덕 같으니 그들의 분노는 밤새도록 자고 아침에 피어오르는 불꽃 같도다” 국가적 잔칫날, 지도자들은 위기를 망각한 채 술의 뜨거움과 향락에 취해 분별력을 잃었습니다.

왕은 은밀한 반역자들과 손을 잡는 어리석음을 범합니다. 반역자들은 겉으로는 왕을 향해 미소를 짓고 있지만, 속으로는 왕을 죽일 분노와 배신의 불길을 화덕처럼 달구고 있었습니다. 밤새도록 기회를 엿보며 숨을 죽이고 있다가, 아침이 되자 기어코 칼을 빼 들어 왕을 암살하는 불꽃으로 폭발한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북이스라엘 말기에 연속적으로 일어난 피비린내 나는 쿠데타의 실체가 바로 이 구절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화덕의 가장 무서운 특징은 ‘위장된 평화’에 있습니다. 반죽이 발효되는 동안에는 연기도 나지 않고 조용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주일에 깔끔한 옷을 입고 교회에 앉아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우리의 중심이라는 화덕 속에는 세상 성공에 대한 집착, 누군가를 향한 타오르는 분노, 걷잡을 수 없는 시기심이 밤새도록 활활 타오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결국 문제는 환경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간의 마음은 필연적으로 욕망을 태우는 화덕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잠언 4장 23절은 엄중히 경고합니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성령의 불은 영혼을 살리고 공동체를 회복시키지만, 정욕의 불은 결국 자신과 이웃을 모두 태워버립니다. 회개하지 않고 마음속에 품고 있는 탐욕의 불길은 반드시 사망의 결말을 가져옵니다.

우리는 날마다 말씀의 거울 앞에 서서 내면의 온도를 점검해야 합니다. 세상 욕망으로 달궈진 화덕의 불은 십자가 보혈의 은혜로만 끌 수 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던지는 날카로운 질문 앞에 정직하게 서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마음은 지금 무엇으로 달궈져 있습니까?” 이 외침에 응답하여, 정욕의 불을 끄고 성령의 거룩한 불을 지피는 신실한 주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Ⅲ. 파멸 앞에서도 사라진 기도의 자리 (호세아 7:7)

앞서 살펴본 제어되지 않는 정욕의 불길은 결국 개인의 일탈을 넘어 공동체 전체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습니다. 본문 7절은 그 비극적인 종말을 고발합니다. “그들이 다 화덕 같이 뜨거워져서 그 재판장들을 삼키며 그들의 왕들을 다 엎드러지게 하며 그들 중에는 내게 부르짖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첫째로, 이 불길은 “그 재판장들을 삼키며” 사회의 공의를 무너뜨렸습니다. 통제력을 상실한 탐욕과 분노가 가득 차자, 마땅히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해야 할 법정과 재판장들마저 뇌물과 권력 투쟁, 암살의 뜨거운 불길에 밀려 완전히 삼켜지고 말았습니다.

둘째로, 이 불길은 “그들의 왕들을 다 엎드러지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북이스라엘 말기의 처참한 잔혹사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스가랴, 살룸, 브가히야, 베가 등 권력의 최정점에 있던 왕들이 불타는 야망의 덫에 걸려 추풍낙엽처럼 쓰러졌습니다. 국가의 최고 지도권이 쿠데타의 피비린내 속에 공중분해된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 전체, 아니 호세아 7장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비극적이고 치명적인 고발은 바로 이 마지막 선언에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내게 부르짖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나라의 근간이 흔들리고, 왕들이 칼에 맞아 죽어가고, 백성들의 삶이 무너져 내리는 아비규환의 현장 속에서도, 하나님을 기억하고 제단을 찾아와 통회하며 "여호와여,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부르짖는 자가 단 한 명도 없다는 탄식입니다.

우리는 흔히 인생에 큰 위기가 찾아오면 당연히 기도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극심한 고난을 당하면 사람이 겸손해져서 하나님을 찾을 것이라 기대합니다. 그러나 호세아 선지자의 진단은 정반대입니다. 영적 불감증이 극에 달하면, 인간은 망해가는 순간에도 절대 기도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눈이 완전히 닫히기 때문에, 지금 겪는 고통이 하나님의 징계이자 돌아오라는 신호임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위기 속에서 취한 행동은 호세아 7장 후반부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11절을 보면 그들은 “어리석은 비둘기 같이 지혜가 없어서 애굽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앗수르로 가도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은 ‘부르짖음’의 대상을 완전히 잘못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무릎 꿇어야 할 입술을 가지고 세상 권력인 애굽의 파라오를 향해 울부짖었고, 군사 대국인 앗수르를 향해 손을 벌렸습니다.

기도가 사라진 인생의 비극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위기가 올 때 오직 인간적인 인맥을 동원하고, 돈을 풀고, 세상적인 잔머리를 굴리며 "어떻게든 이 상황만 모면해 보자"며 발바닥이 닳도록 뛰어다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빠진 모든 인간적인 발버둥은 결국 불타는 화덕에 기름을 붓는 꼴이 될 뿐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가슴 아파하시는 것은 우리가 연약하여 죄를 지었다는 사실 그 자체보다, 그 죄로 인해 삶이 무너져 내리고 있으면서도 기어코 기도의 자리를 외면한다는 사실입니다. 기도의 불이 꺼진 공동체는 이미 영적으로 사망 선고를 받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이러한 영적 마비 증세는 호세아 시대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동시대 남유다에서 활동했던 이사야 선지자 역시 이 깊은 영적 질병을 동일하게 고발했습니다. 이사야 9장 13절에 “그리할지라도 그 백성이 자기들을 치시는 이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도다”라고 탄식합니다. 하나님의 매를 맞으면서도 징계하시는 손길을 깨닫지 못하는 완악함, 삶이 깨어지면서도 기도의 자리를 회복하지 않는 둔감함이 이스라엘 전체를 덮은 어둠이었습니다.

시편 14편 4절에서 다윗은 이들을 가리켜 준엄하게 선언합니다.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악인들의 공통된 특징은 ‘여호와를 부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과 지략, 세상의 힘을 신뢰하기에 기도를 미련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향해 ‘철저한 무지함’이라고 단언합니다.

진짜 무서운 심판은 세상적인 실패가 아니라, 내 입술에서 하나님을 향한 부르짖음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 안타까운 역사의 끝에서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들려오는 슬픈 마음을 쏟아내셨습니다. 에스겔 22장 30절 말씀입니다.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하여금 멸망시키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결론

호세아 7장 7절의 “부르짖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라는 탄식은, 결국 무너진 성벽을 막아서서 눈물로 기도할 ‘그 한 사람’을 찾지 못했다는 하나님의 아픈 눈물로 이어집니다. 한 나라와 공동체, 그리고 한 가정의 운명은 세상의 무기나 재물의 유무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 무너진 틈새에 무릎을 꿇고 부르짖는 기도의 사람, ‘그 한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의 사방이 막히고 삶의 터전이 흔들릴 때, 세상의 애굽과 앗수르를 향해 뛰어다니던 발걸음을 멈추십시오. 침상에서 신세 한탄하며 원망하는 변질된 소리를 그치고, 성심으로 여호와를 부르는 진짜 기도의 자리로 돌아오십시오. 우리가 인간적인 계산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부르짖기 시작할 때, 불타오르던 정욕의 화덕은 꺼지고 우리를 고치시는 여호와 라파의 치료가 시작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애타게 찾으시는 ‘부르짖는 그 한 사람’이 바로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최원호 목사
▲최원호 목사(서울 상봉동 은혜제일교회)
마무리 기도

사랑과 치료의 하나님, 우리를 심판하기보다 고치고 싸매어 회복시키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말씀 앞에 내 안의 은밀한 죄와 탐욕의 화덕을 숨기지 않게 하시고, 양심이 굳어지기 전에 ‘오늘’ 즉시 회개하며 순종하는 살아있는 영을 허락하소서. 세상이 흔들리고 인생의 위기가 찾아올 때, 헛된 세상의 힘을 의지하느라 분주했던 발걸음을 멈추게 하소서. 주님이 애타게 찾으시는 '부르짖는 그 한 사람'이 되어 기도의 자리를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라파의 치료와 회복을 경험하는 신실한 삶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를 고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최원호 목사 (서울 상봉동 은혜제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