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
제목
은사가 넘쳤으나 무너진 교회

본문
고린도전서 12장 12-27절

서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린도 교회는 냉랭한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성령의 은사가 활발하게 나타났고, 예배는 뜨거웠으며, 영적 체험도 풍성했습니다. 방언이 있었고, 예언이 있었고, 지식과 능력도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그 교회는 매우 역동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편지를 읽어보면 전혀 다른 풍경이 드러납니다. 분열이 있었고, 파벌이 있었으며, 서로를 판단하는 말들이 오갔습니다. 성찬은 공동체의 식탁이 아니라 차별의 자리가 되었고, 은사는 섬김이 아니라 우열을 가르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은사는 있었지만 하나 됨은 없었습니다. 열정은 있었지만 배려는 없었습니다. 능력은 있었지만 관계는 상처투성이였습니다. 이것이 고린도 교회의 모순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몸’이라는 비유를 사용합니다. 그는 교회를 조직이나 집단으로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선언합니다. 몸은 연결되어 있어야 함께 살고 서로를 통해 존재합니다. 손이 혼자 살 수 없고, 눈이 따로 존재할 수 없듯이, 교회는 개인의 영적 능력이 모여 있는 장소가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각 지체를 통해 흐르는 유기적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단순히 은사에 대한 가르침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라는 부르심입니다. “교회란 무엇인가?” “나는 이 몸 안에서 어떤 존재인가?” 바울은 이 질문 앞에 우리를 세웁니다.

본론

Ⅰ. 한 몸, 많은 지체 (고린도전서 12:12-13)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12절) 바울은 교회의 가장 근본적인 토대에서 출발합니다. 교회는 여러 사람이 모인 집합체가 아니라 한 몸입니다. 이것은 비유 이상의 선언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실재적 정체성을 지닌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참석’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속한’ 지체입니다. 출석은 행위이지만, 속함은 존재입니다.

12절에서 바울은 두 가지를 동시에 말합니다. 하나는 ‘하나’라는 통일성이고, 다른 하나는 ‘많은’이라는 다양성입니다. 교회는 이 두 긴장을 함께 품고 존재합니다. 하나 됨을 잃으면 분열이 되고, 다양성을 잃으면 획일주의가 됩니다.

13절은 그 연합의 근거를 분명히 합니다. “우리가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이 말씀은 교회의 통일성이 인간적 합의에서 온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우리는 같은 취향을 공유해서 한 몸이 된 것이 아닙니다. 같은 고향, 같은 학벌, 같은 경제적 수준 때문에 묶인 것도 아닙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으로 인도하셨기에 한 몸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초월성입니다. 교회는 혈연 공동체도 아니고, 이해관계 공동체도 아닙니다. 성령 안에서 창조된 새 인류 공동체입니다.

바울은 덧붙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당시 사회를 가르는 가장 강력한 구분이 여기 모두 등장합니다. 민족, 신분, 계층. 그러나 성령은 그 벽을 허무셨습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은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장벽이 무너진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조직 이전에 유기체입니다. 제도 이전에 생명입니다. 구조 이전에 연결입니다.

몸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몸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지체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합니다. 손이 몸에서 떨어지면 더 이상 기능하지 못합니다. 귀가 분리되면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눈이 혼자 존재하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지체의 의미는 연결 안에서 완성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의 위기를 직면합니다. 현대 신앙의 특징 중 하나는 ‘개인화’입니다. “나는 하나님과만 관계하면 된다.” “교회는 불완전하니 거리를 두겠다.”

물론 교회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고린도 교회도 완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게 “떠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몸으로 살아라”고 권면했습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15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을 때만 열매를 맺습니다. 떨어진 가지는 스스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신앙은 개인적이지만, 결코 개인주의적이지 않습니다. 구원은 인격적으로 받지만, 삶은 공동체적으로 살아갑니다.

히브리서 10장 25절은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라고 권면합니다. 신앙은 모임을 통해 보호되고, 격려를 통해 자라며, 연결을 통해 성숙합니다. 교회는 선택 가능한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에게 교회는 존재 방식입니다. 우리는 몸의 일부로 부름받았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소비의 대상이 아니라 참여의 자리입니다. 평가의 공간이 아니라 연결의 공간입니다. 이 진리를 잊는 순간, 우리는 몸을 떠난 지체처럼 스스로 약해집니다. 그러나 이 진리를 붙들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서로를 통해 살아갑니다. 교회는 한 몸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 몸의 한 부분입니다.

Ⅱ. 비교가 사명을 무너뜨립니다 (고린도전서 12:14-20)

바울은 이제 공동체를 안에서부터 좀먹는 심리적 문제를 짚어냅니다. 그것은 비교입니다.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15절) 이 장면은 언뜻 보면 우스꽝스럽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발이 손을 부러워하고, 귀가 눈을 시기합니다. 이는 기능의 차이를 존재의 차이로 오해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열등감은 이렇게 속삭입니다. “나는 저 사람처럼 말하지 못한다.” “나는 앞에 서는 은사가 없다.” “나는 영향력이 없다.” 비교는 나를 타인의 기준으로 재단하게 만듭니다. 그 결과 사명은 흐려지고, 존재는 축소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몸에 속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기능의 차이는 소속의 차이가 아닙니다.

1) 하나님은 각 지체를 두셨습니다 (18절)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느니라.” 이 구절은 단순한 위로가 아닙니다. 교회의 질서를 설명하는 신학적 선언입니다. 지체의 위치는 인간의 선택 이전에 하나님의 배치 안에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두셨느니라”입니다. 이는 의도적 배치를 뜻합니다. 우연이 아니라 계획입니다. 무작위가 아니라 목적입니다. 당신의 자리, 당신의 역할, 당신이 가진 은사는 하나님의 뜻 안에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은 이 진리를 확증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당신은 복제품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동일한 은사를 반복 생산하지 않으십니다. 각각 다르게, 그러나 정확하게 배치하십니다.

비교는 하나님의 설계를 의심하게 만듭니다. “왜 나는 저 사람이 아니지?”라는 질문은 결국 “왜 하나님은 이렇게 만드셨지?”라는 불평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배치는 정확합니다. 사명을 붙들지 못하면 비교가 시작되고, 비교가 깊어지면 존재를 부정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명을 기억하면 비교는 멈춥니다. 하나님이 나를 두신 이유를 붙들 때, 타인의 자리를 탐하지 않게 됩니다.

2) 획일성은 건강이 아닙니다 (17절)

“만일 온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바울은 극단적 상상을 통해 진리를 선명히 합니다. 온몸이 눈이라면 보는 기능은 뛰어날지 몰라도 생존은 불가능합니다. 몸은 다양한 기능의 협력으로 유지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설교자라면 돌봄은 누가 합니까? 모두가 리더라면 섬김은 누가 합니까? 다름은 결함이 아니라 필요입니다. 기능의 차이는 경쟁의 근거가 아니라 상호 의존의 이유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특정 은사를 ‘더 영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은사의 위계를 세우지 않습니다. 오히려 4절에서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라고 말합니다. 근원은 하나입니다. 은사의 가치는 크기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목적에서 나옵니다. 은사는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몸을 세우기 위한 수단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 은사의 방향은 언제나 공동체입니다. 나를 향할 때 왜곡되고, 몸을 향할 때 온전해집니다. 비교는 사명을 약화시키고, 획일성은 공동체를 경직시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두신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감당할 때, 교회는 균형을 회복합니다. 몸은 다름을 통해 완성됩니다. 그리고 그 다름은 하나님의 지혜 안에서 배치되었습니다.

Ⅲ. 약한 지체의 영광 (고린도전서 12:21-25)

이제 바울은 또 하나의 위험을 드러냅니다. 앞에서는 열등감의 문제였다면, 여기서는 우월감의 문제입니다.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지 못하리라.”(21절) 여기서 바울은 단순히 예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존재론적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몸 안에서는 어떤 지체도 다른 지체를 ‘불필요하다’고 규정할 권리가 없습니다. 교회 안에는 항상 두 가지 극단이 존재합니다. 하나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자기 부정이고, 다른 하나는 “나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라는 자기 과대평가입니다. 열등감은 스스로를 지우고, 교만은 타인을 지웁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는 누구도 삭제될 수 없습니다.

1) 약해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합니다 (22절)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바울은 여기서 세상의 기준을 뒤집습니다. 세상은 드러나는 것, 힘 있는 것, 영향력 있는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게 보십니다. 우리 몸을 생각해 보십시오. 가장 단단한 부분은 뼈입니다.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근육입니다. 그러나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장기들입니다. 심장이 멈추면 모든 활동은 중단됩니다. 폐가 기능을 멈추면 강한 팔도 무용지물이 됩니다. 중요성은 노출의 정도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교회도 동일합니다. 강단에서 설교하는 사람보다, 뒤에서 기도로 떠받치는 사람이 더 깊은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행정으로 질서를 유지하는 손길,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묵묵히 준비하는 헌신,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자리를 지키는 충성이 교회를 붙듭니다. 하나님은 드러남보다 역할을 보십니다.

2) 하나님은 약함을 통해 교만을 무너뜨리십니다

고린도전서 1장 28-29절은 분명히 말합니다.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약한 자를 통해 강한 자의 자랑을 무너뜨리십니다. 이는 단순한 위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통치 방식입니다. 구약을 보십시오. 막대기 하나를 든 모세, 소년 다윗, 포로지에서 기도하던 다니엘. 하나님은 늘 약해 보이는 사람을 통해 역사를 움직이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래야 영광이 사람에게 돌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나는 필요 없어”라는 말도 교만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요긴하게 사용하시는 자리를 스스로 거절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나는 없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위험합니다. 그 순간 우리는 몸의 원리를 거스르게 됩니다.

3) 부족한 지체에게 더 큰 귀함을 입히시는 하나님 (23-24절)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하나님은 연약한 지체를 방치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더 큰 배려로 감싸십니다. 몸에서 민감한 부위를 우리는 더 조심스럽게 보호합니다. 노출시키지 않고 감싸며 지킵니다. 교회도 그래야 합니다. 상처 입은 사람을 향해 차갑게 판단하지 말고, 실수한 이를 쉽게 정죄하지 말며, 연약한 신앙을 가진 이를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25절은 그 목적을 밝힙니다. “몸 가운데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설계는 경쟁이 아니라 돌봄입니다. 구조는 우열이 아니라 상호 보호입니다.

4) 건강한 교회의 표지

건강한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은사가 화려한 교회입니까? 사람이 많은 교회입니까? 아닙니다. 약한 지체가 안전하게 숨 쉴 수 있는 교회, 실수한 사람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교회, 연약한 자가 보호받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강한 자만 살아남는 곳은 교회가 아닙니다. 약한 자가 존중받는 곳이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약함을 통해 공동체를 정결하게 하십니다. 자랑을 꺾고, 겸손을 세우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나는 약한 지체를 귀히 여기고 있는가? 아니면 무의식 중에 평가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약함은 결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통로입니다. 약한 지체를 보호하고 존중하는 공동체, 그 공동체가 바로 건강한 교회입니다.

Ⅳ. 공감하는 몸 (고린도전서 12:26-27)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26절) 바울은 여기서 교회의 가장 실제적인 모습을 보여 줍니다. 교회는 교리가 맞는 공동체를 넘어, 감각이 살아 있는 공동체입니다. 몸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신경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발가락 끝에 작은 가시 하나가 박혀도, 온몸이 반응합니다. 잠을 설칠 만큼 민감하게 느낍니다. 그런데 만약 아픔이 전달되지 않는다면 어떻습니까? 그것은 건강이 아니라 마비입니다. 신경이 끊어진 몸은 위험합니다. 교회도 같습니다. 누군가 상처를 입어도 아무 일 없는 듯 지나가고, 누군가 시험에 들어도 방관하며, 누군가 눈물 흘려도 “저 집 문제”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성숙이 아니라 무감각입니다.

1) 함께 아파하는 공동체

바울은 “함께 고통을 받고”라고 말합니다. 공감은 감정 이입을 넘어, 존재적 연대입니다. 초대교회는 이것을 실제로 살았습니다. 사도행전 4장 32절은 말합니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누군가 궁핍하면 공동체가 책임졌습니다. 누군가 박해를 받으면 함께 기도했습니다. 누군가 감옥에 갇히면 모두가 염려했습니다. 그들은 한 몸이라는 사실을 실제로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교회는 커졌지만, 마음은 멀어지지 않았습니까? 예배는 함께 드리지만, 삶은 각자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공감은 감정적 동요가 아닙니다. 책임 있는 참여입니다.

2) 함께 기뻐하는 공동체

바울은 고통뿐 아니라 영광도 함께 나눈다고 말합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고…” 이것이 더 어렵습니다. 타인의 성공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일은 열등감과 경쟁심을 내려놓아야 가능한 일입니다. 교회는 비교가 아니라 축복의 공간이어야 합니다. 누군가 은혜를 받으면 함께 감사하고, 누군가 쓰임 받으면 함께 기뻐해야 합니다. 시기심이 작동하면 몸은 갈라집니다. 그러나 진심 어린 기쁨은 몸을 단단하게 묶습니다. 로마서 12장 15절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이 말씀은 선택적 옵션이 아닙니다. 몸 된 공동체의 기본 태도입니다.

3) 우리는 몸의 일부입니다 (27절)

27절은 선언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여기서 “부분”이라는 표현은 개별성을 인정하면서도 분리 가능성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각기 다른 존재이지만, 떨어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신앙은 개인적으로 시작되지만, 결코 개인주의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나는 혼자 구원받았지만, 혼자 성숙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공동체 안에서 다루십니다. 때로는 형제를 통해, 때로는 갈등을 통해, 때로는 용서를 통해 우리를 빚으십니다. 공감은 선택이 아니라 정체성입니다. 우리는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당신이 있어야 몸이 완성됩니다

오늘 바울이 우리에게 보여 준 교회의 모습은 분명합니다. 교회는 능력의 전시장도 아니고, 영적 경쟁의 무대도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지체를 통해 흐르는 한 몸입니다. 그 몸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우리를 통해 구체적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다른 누구에게 적용하기 전에 먼저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이 몸 안에서 어떤 지체로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연결되어 있는가, 아니면 관찰자로 머물러 있는가?

당신은 이 교회에 우연히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원하시는 뜻대로 두신 지체입니다. 당신이 빠지면 몸은 불편해지며, 멈추면 어느 한 부분은 기능을 잃습니다. 당신이 침묵하면 누군가는 위로를 잃습니다. 그러므로 열등감으로 뒤로 물러서지 마십시오. “나는 별로 할 일이 없다”는 생각은 겸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배치를 축소하는 태도일 수 있습니다. 동시에 교만으로 밀어내지 마십시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은 몸의 원리를 거스르는 것입니다. 모든 지체는 필요하지만, 어느 지체도 전부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두신 자리에서 주신 은사를 붙들고, 사랑이라는 방향 위에서 사용하십시오. 큰 사역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보이지 않는 섬김이어도 괜찮습니다. 작은 순종 하나가 몸을 살립니다. 에베소서 4장 16절은 말합니다. “온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몸은 연결을 통해 자랍니다. 성장은 사랑 안에서 일어납니다. 교회는 능력이 아닌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당신의 말 한마디, 당신의 기도 한 번, 당신의 자리 지킴을 통해 흘러갑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계십니다. 그 일에 당신을 사용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기억하십시오. 당신이 있어야 몸이 온전해집니다.

최원호 목사
▲최원호 목사(서울 상봉동 은혜제일교회)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불러 주심을 감사합니다. 비교로 스스로를 낮추지 않게 하시고, 교만으로 형제를 밀어내지 않게 하옵소서. 주께서 두신 자리에서 주신 은사를 사랑으로 사용하게 하시고, 약한 지체를 더욱 귀히 여기는 마음을 우리에게 부어 주옵소서. 우리 교회가 능력이 아니라 사랑으로 세워지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흐르는 한 몸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최원호 목사 (서울 상봉동 은혜제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