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동섭, <선교 없이 교회 없습니다(No Church without Mission)>(생명의말씀사, 2010)
[선교사를 위한 책 한 권] ‘선교 없이 교회 없습니다’(上)
3. 선교와 교회: 사도행전과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 “신약성경은 선교문서”
21세기 현대교회는 계속 질문해야 한다. “선교가 무엇인가?” “선교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신약성경의 모든 기록은 예수님과 교회의 선교적인 움직임에 관한 ‘선교문서’(missionary document)라고 할 수 있다. 21세기 미지의 세계를 향해 출발하는 현대교회는 선교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확한 답을 얻기 위하여 신약성경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 느낀다.
구약의 역사가 끝나고 신약시대가 시작되기 전 ‘중간 시기’(intertestamental period, BC 586~AD 70) 약 400년간의 선교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B.C 1세기경 지금의 이스라엘에 약 200만 명 유대인이 살고 있었지만, 더 많은 유대인은 중동 지역을 비롯해 전 세계 넓은 지역에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 살고 있었다. 이들은 이미 선교적인 특징을 강하게 보여주었다. 유대인 공동체마다 수많은 회당이 존재하였다. 이 시기에 구약성경이 헬라어로 번역된 ‘70인역’ 성경은 신약시대 하나님 나라를 여는 하나님의 섭리적 사건들이었다.
신약시대를 개막하기 전, 선교의 하나님은 유대인들의 회당은 선교를 위한 중요한 공간으로 준비시키셨다. 예수님의 선교(복음) 사역의 거점 확보였다. ‘70인역(LXX)’ 구약성경은 초대교회의 선교적 성경(the missionary Bible)이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효과적인 의사소통의 장이 확보되게 하였다. 마침내, “때가 차매”(갈4:4) 예수님이 오셨고 신약시대가 시작되었다.
3.1. 사도행전 교회는 성령공동체/선교공동체
사도행전의 교회는 한 마디로 펄펄 살아 있는 교회였다. 오늘날 전 세계교회는 한 마디로 ‘하향 평준화’(下向平準化)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가 잃어버린 본래의 교회 모습을 사도행전 교회는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사도행전은 ‘교회다운 교회’의 전형(典型)을 보여준다.
사도행전 교회는 성령의 공동체였다. 제1장부터 주님은 “기다리라”(1:4)고 먼저 명하셨다.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했다. 우리는 선교, 선교하면서 무턱대고 현장으로 달려가서 열심히 교회당 건물 짓는 것만이 선교의 전부인 줄 알고 있지는 않은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1:8)는 선교 명령은 두 번째 명령이다. “기다리라”는 명령이 먼저이다.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1:4)
사도행전의 첫 번째 명령은 “내 증인이 되리라”가 절대로 아니다. 이것은 두 번째 명령이다. ‘성령 부어 주심’을 위해 예수님이 친히 5번이나 ‘기다리라’고 직접 언급하셨다.(요14:16, 26, 15:26, 16:7, 13). “사도행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교회가 성령의 지배를 받고 영향을 받으며 전진해 나간 것을 보여 준다. 이처럼 사도행전은 성령의 활동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담고 있기에 “성령의 복음”, 혹은 “성령행전”이라고 불린다”. (p. 291, 천 번, 만 번 지당한 말씀이 아닌가?)
3.2. 선교적 공동체(church as mission) = 보내심을 받은 공동체
이런 선언은 이미, 72년 전 1952년 휠링겐 세계선교대회(Willingen IMC)에서 공식적으로 천명되었다. 곧 주님이 친히 하신 말씀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70년간 한국교회와 세계교회는 ‘대표선수’ 몇 명을 선발하여 선교지에 파송하는 방식의 선교를 감당하였다.
“이제 교회는 ‘선교사를 보내는 기관(a sending agency)의 개념으로부터 교회 자체가 ‘보내심을 받은 선교사(being sent)라는 개념으로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 즉 주님의 공동체인 교회 그 자체가 선교사라는 것이다”. (p. 294, 교회 자체가 선교사(기관)이다)
한동안 한국교회에서 크게 유행하였던, 크리스천 슈바르츠(Christian A. schwarz)의 NCD (Natural Church Development) 교회성장 이론은 많은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교회 안에 10%의 전도 은사를 받은 사람에게 전도를 맡겨야 한다’(?). 그렇다면 사도행전 1장 8절의 주님의 약속의 말씀은 교회 안에 10%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명령이 된다. 난센스다.
“그러므로 성령의 임하심이 무엇인지 모르는 공동체는 자선이나 사회사업은 할 수 있어도 선교는 불가능하다. 선교는 언제나 성령께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인격적으로 지배하심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성령께서 지배하시는 공간에는 선교가 진행된다. 선교는 교회가 성령의 포로가 되어 온전히 순종할 때 가능하다.” (p. 297, 아멘, 아멘.)
교회가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로 세워지기 위해서는 성육신 공동체, 케리그마적 공동체, 디아코니아적 공동체, 나아가서 디다케적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교회 구성원은 모두가 ‘선교적 제자’(a missional discipleship)로서의 삶을 살도록 해야 한다.
교회 선교는 교회 성장의 마지막 단계의 사역이 아니라, 교회의 출발부터 실천해야 하는 사역이다. 선교적 몸짓을 잃어버린 교회는 제도화된 화석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선교적인 교회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해야 한다. ‘삼투압의 원리’에서 보듯, 농도가 높은 액체(교회)는 농도가 낮은 곳(사회)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것이다.
나가는 말(결론): “Ad Fontes(원전, 말씀)로 돌아가자!”
선교론적 교회론(missional church)이 회복돼야 한다. “교회는 언제나 개혁되어야 한다” 21세기 현대교회는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위기적 상황을 직면했다.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가고 있다. 코로나 이후 아직도 상당수의 신자는 돌아오지 않고 있다. 주일학교와 청년대학부가 없는 교회가 이미 태반이나 되었다. 서구 사회에서는 이미 교회의 사회적 영향력이 급격히 상실되었다. 한국교회도 똑같은 길을 가고 있다. 인터넷, SNS, 유튜브 시대, “거대한 지적인 혁명”(a massive intellectual revolution)을 우리는 날마다 경험하고 있다.
2025년 10월 26일은 종교개혁 508주년 기념주일이었다. “한번 개혁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언제나 개혁되어야 한다.” 교회는 솔직히 자기 개혁에 충실하지 못했다. 세상에 안주하고 세상을 닮아가는 모습이었다. 한국교회는 그간 제자훈련을 열심히 해 왔지만, 교회라는 제도를 넘어 세상으로 들어가는 제자, 곧 ‘선교적인 제자’(missionary disciple)를 세우는 일에 실패하였다. 제자훈련은 예수님의 총체적인 삶을 닮은 제자 세우기다.
1. 말씀을 따라 개혁되는 교회: 교회는 말씀 공동체이며, 교회의 위기는 곧 정체성의 위기이다. 교회 정체성은 성경적 교회론에서 비롯된다. 오랜 세월을 복음주의자들은 교회를 ‘정적인 교회’(static church), 또는 ‘제도적인 교회’(church as institution)로 이해하였다. 교회의 역동적 특성을 간과하였다. 이런 ‘축소주의 교관’을 사도행전의 교회 모습에서 상상할 수 있을까?
2. ‘사도적인 교회’는 곧 ‘사도적인 공동체’: ‘사도’라는 직분은 이미 끝났지만, 사도적인 선교가 끝난 것은 아니다. 사도들이 전해준 동일한 신앙과 고백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 ‘사도적 공동체’다. 현대교회는 더 이상 임시 처방의 프로그램 중심 공동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선교는 하나의 과업(a task)이 아니라, 교회를 구성하는 본질적 요소(the essential nature)이다. “다시 말하면 선교 없이는 교회일 수 없다는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선교하는 교회가 아니라면 전혀 교회가 아니다’라고 할 수 있다.” (p. 336, 모든 교회는 당연히 선교적 교회여야 한다.)
3. 세상으로 들어가는 교회: “교회 자체가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았다.”(요20:21) 교회론의 위기는 선교적 특성을 잃어버린 교회론을 강조해 온 데 있다. “교회는 세상 안에 있고, 세상을 위해 존재한다. 교회는 세상에 참여하는 공동체다. 그리고 교회가 세상에 참여하는 거룩한 움직임을 우리는 선교라고 할 수 있다.” (p. 338)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노예로 끌려가면서도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파송된 대사임을 잊지 않았다.
4. 보내는 선교사는 없다: “교회 구성원 모두가 가는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한국교회가 사용해 온 ‘가는 선교사’와 ‘보내는 선교사’의 이분법적 선교 개념은 옳지 않다. 엄밀하게 말하면 교회 구성원은 모두가 가는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평소의 서평자가 주장하던 사실이라 참으로 반갑다. 한 마디로 놀라운 패러다임의 변화가 요구된다. 한국교회가 즐겨 사용하는 ‘선교한국’은 한국교회가 더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으로 완성될 수 없다. 한국교회의 모든 그리스도인이 어디에 머물든지 선교사가 되어 세상의 각 분야에서 빛과 소금으로 빛나는 선교적 삶을 살아갈 때 선교한국은 말 그대로 실현될 것이다. 서평자는 15년 직장 생활부터 이미 선교적인 삶을 살아왔다.
5. 한국교회 선교학의 사명: “한국교회의 신학계를 향해 도전해야”
방동섭 교수는 이 마지막 시대에 한국교회의 선교학이 사명이 있음을 일깨운다. “한국교회의 선교학의 사명은 무엇보다 이 일이 가능하도록 한국교회의 신학을 향해 도전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선교학이 이 분야에 지대한 노력을 경주하고 헌신한다면 한국교회의 선교의 미래는 밝아질 것이다” (p. 340) 예수님의 성육신은 선교적인 면에서 본다면 영원하신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천상의 문화’에서 ‘인간의 문화’로 이동하신 교차문화적 사건(cross-cultural event)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는 예수님처럼 세상으로 내려가는 성육신적 선교사이며 동시에 이웃을 향한 섬김과 긍휼의 거룩한 공동체다.
“선교론적 교회론을 정립하는 것은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21세기의 매우 중요한 신학 작업이다. 현대교회 지도자들이 이 분야에 대한 진지한 연구를 게을리하고 교회론을 재정립하는 작업을 시도하지 않는다면 21세기 교회의 위기 상황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p. 342)
서평 후기
서평자는 방동섭 교수님의 <선교 없이 교회 없습니다>란 책이 출판될 때(2010)부터 주목하였다. 한국교회 동료 선교학 교수들이 이구동성으로 찬사를 아끼지 않은 책이 본서이다. 그러나 현실은 선교 현장의 80~90% 선교사들은 이런 책(이름)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일찍이 눈치챈 서평자는 너무나 안타까웠다. 주옥같은 선교 관련 양서들이 출판되고 있지만, 교단과 교파의 높은 장벽과 세대 간의 단절(?)로 공유(共有)되지 못하고 사장(死藏)되는 책들이 얼마나 많은 것인가? 이는 하나님 나라 차원에서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선교의 성삼위 하나님은 얼마나 더 안타까워하실 것인가. <끝>
배안호 영국 선교사(Peterahba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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