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교수가 26일 별세했다. 지난 2017년 이어령 교수가 '여해 강원용 목사 탄신 100주년에 부쳐'에서 발언하는 모습
▲이어령 교수가 26일 별세했다. 지난 2017년 이어령 교수가 '여해 강원용 목사 탄신 100주년에 부쳐'에서 발언하는 모습 ⓒ(재)여해와함께 제공
이어령 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89)가 암 투병 끝에 26일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1990년부터 1991년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낸 이어령 교수는 문학평론가이자 언론인, 교육인, 작가 등 다채로운 이력을 지닌 한국을 대표하는 석학이자 이 시대 최고 지성으로 불렸다.

무신론자였으나 2007년 7월, 74세의 나이에 일본 도쿄에서 고(故) 하용조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2017년 암이 발견돼 두 차례 수술을 받은 그는 항암 치료 대신 저서 집필에 몰두했으며, 작년 10월에는 한국 문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금관 문화훈장을 받았다.

이어령 교수는 노태우 정부 당시 신설된 문화부에서 초대 장관을 지내면서 국립국어원을 설립했다. ‘노견(路肩)’이라는 행정 용어를 ‘갓길’로 바꾸는 등 언어 순화의 기준을 제시했고,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세워 문화 영재 양성의 기반을 다졌다.

이 외에도 경기고교 교사, 이화여대 국문과 교수, 월간 문학사상 발행인, 일간지 논설위원, 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 조직위원장, 동아시아 문화도시 조직위원장 명예위원장 등으로도 활약했다.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낸 故 이어령 교수는 문학평론가이자 언론인, 교육인, 작가 등 다채로운 이력을 지닌 한국을 대표하는 석학이자 이 시대 최고 지성으로 불렸다.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낸 故 이어령 교수는 문학평론가이자 언론인, 교육인, 작가 등 다채로운 이력을 지닌 한국을 대표하는 석학이자 이 시대 최고 지성으로 불렸다. ⓒCTS 제공
이어령 교수는 1933년(호적상 1934년) 충남 아산에서 출생했으며, 부여고,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서울대 대학 중인 1956년 한국일보에 평론 ‘우상의 파괴’를 발표해 문단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문학이 저항적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고 역설하여 ‘저항의 문학’을 기치로 전후 세대 이론적 기수가 되었다.

20대 때 한국일보 논설위원이 됐으며, 1972년부터 월간 문학사상의 주간을 맡을 때까지 조선일보, 한국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 등 여러 신문의 논설위원을 역임했다. 1966년 이화여자대학교 강단에 선 후에는 30여 년간 교수로 재직했다.

그가 1963년 경향신문에 연재한 에세이를 모은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는 한국의 건축, 의상, 식습관, 생활양식 등 한국 문화를 최초로 분석해 낸 기념비 같은 책으로, 이로 인해 ‘젊은이의 기수’ ‘언어의 마술사’ ‘단군 이래의 재인’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의 예리한 통찰력과 방대한 지성, 문학적 재능은 국경을 넘어 대만과 일본, 미국에서도 인정받았다. 이 책이 대만에서 출간되었을 때 임어당으로부터 ‘아시아의 빛나는 거성’으로 칭송받았으며, 일본의 문화 인류학자 다다 교수는 자신이 읽은 책 가운데 가장 감동을 준 세 권의 책 중 하나로 꼽았다. 영문 번역본은 미국 컬럼비아대학 교재로 사용됐다.

2013년 故 하용조 목사 2주기 추모예배에서 이어령 교수가 추모사를 전하고 있다.
▲2013년 故 하용조 목사 2주기 추모예배에서 추모사를 전하고 있는 이어령 교수 ⓒ기독일보DB
88서울올림픽 때는 개회식을 총괄 기획하고, 성공적으로 이끌어 문화 기획자로서의 면모를 과시하기도 했다.

1980년 객원연구원으로 초빙된 그는 일본 동경대학에서 연구하고, 1989년 일본 국제일본문화연구소의 객원교수를 지냈다. 1982년 펴낸 『축소지향의 일본인』은 일본과 일본인을 바라보는 시대를 초월한 근본적인 통찰을 제공했다.

1990년대 초에는 정보화 시대를 예견하며 아날로그 사회에서 디지털로 이행하는 과도기, 혹은 디지털 기반과 아날로그 정서가 융합하는 시대의 흐름을 나타내는 ‘디지로그’(Digilog)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이 교수는 디지털 기술은 그 부작용과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다시 아날로그 감성을 불러들인다고 지적하며 21세기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디지로그 시대의 개막을 선포한 바 있다.

2010년 출간한 이어령 교수의 저서 『지성에서 영성으로』는 지식인 이어령이 아닌, 예수를 영접한 그리스도교인 이어령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책이다. 딸의 암 투병과 실명 위기, 손자의 질병 등을 겪으며 세례를 받은 그는 이 책에서 ‘영성’에 관한 참회론적 메시지와 함께 지성을 넘어선 영성을 추구했다. 시집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도 펴냈다.

저서로는 『디지로그』,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지성의 오솔길』, 『오늘을 사는 세대』, 『차 한 잔의 사상』 등과 평론집 『저항의 문학』, 『전후문학의 새물결』, 『통금시대의 문학』, 『젊음의 탄생』, 『이어령의 80초 생각 나누기』, 어린이 도서로는 「이어령의 춤추는 생각학교」 시리즈 등 60여 권을 펴냈다.

유족은 아내 강인숙 영인문학관 관장, 장남 이승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차남 이강무 천안대학교 애니메이션과 교수가 있다. 장녀 이민아 목사는 미국에서 검사로 일하다 2012년 위암 투병 중 별세했다. 빈소는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이며, 5일간 가족장으로 치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