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의 신화에서 이집트의 스핑크스는 테베로 들어가려는 여행자에게 이렇게 묻는다. “아침에는 네 발로, 점심에는 두 발로,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동물은?”이라고 묻고 대답을 못 하면 잡아먹고 “사람”이라고 답을 말하면 살려준다. 이 이야기는 사람은 어린아이일 때는 네발로 기고, 성장해서는 두 발로 걸으며, 나이가 들면 지팡이를 의지하여 세 발로 걷는다는 것으로, 사람의 인생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문장으로 많이 사용된다. 그러나 이 문장을 이렇게 바꾸어보고 싶다. 어린 시절에는 어머니, 아버지의 돌봄으로 생활하고, 한동안은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지만, 결국 건강에 문제가 생기는 노년기에는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말이다.
사람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도움을 주면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이것은 꼭 사람이 사회적 동물이어서는 아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모든 날을 자신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자신의 힘으로 먹이를 구할 수 없게 되면 도태되지만, 사람은 주변의 돌봄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최근 들어 코로나19로 인하여 가족이 집에 있는 경우가 많아 돌봄의 필요가 증가하고, 그 기능이 중요시되고 있다. 코로나19로 아동 돌봄을 전담했던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들이 정상적인 운영을 하지 못하여 맞벌이 부부의 아이들 돌봄이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이런 시기에 그리스도인들은 더욱더 주변을 돌아보아야 한다. 혹시 주변에 아픈 사람은 없는지, 일자리가 없어서 기본적인 삶을 누리지 못하는 이웃은 없는지 돌아보고, 그들에게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이 아닐까? 물론 비대면 상황이 길어지고 뜨거운 여름이다 보니 남의 집을 방문한다는 것이 어려울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이대로 외면할 수는 없다. 자신이 속한 소그룹 원들에게 일주일에 한 번씩 전화하는 것으로 시작해 보았으면 한다.
최근에 있었던 일이다. 가깝게 지내는 교회 집사님에게 전화가 왔다. 지난주에 심하게 앓으셨는데 한 주가 지나도록 전화도 하지 않느냐는 구박으로 시작하셨다. 생각해보니 예쁘게 핀 꽃 사진을 보내주셔서 예쁘다고 댓글 달았는데 알고 보니 그 앞글에 벌레 물린 것이 잘못돼서 고생을 많이 한다고 보내셨는데 못 본 것이었다. 죄송하다고 말했더니 사실 전화하신 이유는 남해에 문어가 올라와서 싱싱할 때 먹이고 싶어서 전화하신 거라셨다. 맛있는 음식을 앞두고 생각나서 전화해주시는 마음이 고마웠다.
집사님과 특별한 사이가 된 이유는 그분이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치셨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코로나19로 병문안을 오는 사람도 없고 친구도 만날 수도 없으리라는 것에 생각이 미쳐서 전화로 안부를 물은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반대로 돌봄을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노은영 작가(사회복지학 석사, 청소년 코칭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