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 때 한국에 파송된 존스 선교사
존스 선교사(George Heber Jones, 조원시趙元時, 1867.8~1919.5)는 초기 한국 감리교를 대표하는 선교사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1887년 미 북감리교회에서 아펜젤러, 스크랜턴 가족 다음으로 세 번째로 한국에 파송을 받은 선교사로, 한국어와 한국사, 한국 문화 및 전통 종교에 정통한 학자였다. 1867년 미국 뉴욕에서 출생한 그는 16세 때 선교사로 부름을 받았으며, 만 20세 때인 1888년 5월 17일 한국에 도착해 배재학당에서 수학을 가르치며 아펜젤러 선교사를 도왔다.
이후 존스 선교사는 배재학당장(1892~1893), 제물포지방 구역장·감리사(1892~1903), 내리교회 2대 담임목사(1892~1903)를 역임하고, 한국(황성)기독교청년회 창설(1903)에 공헌했으며 성경연구회와 감리교 협성신학교의 조직으로 한국인 교역자 양성에 힘썼다. 또한 한국어 사전을 편찬하고, 루이스 로스와일러(Louis Rothweiler)와 공동으로 1892년 한국 최초의 찬미가 제1판, 1902년 제6판에 205장을 수록하여 한국교회 찬미가 보급에 앞장섰다. 1892년에는 프랭클린 올링거(Franklin Ohlinger)가 창간한 한국 최초의 영문 잡지 ‘더 코리안 리포지터리’(The Korean Repository)의 발간과 편집에도 기여했다. 1900년 12월에는 순한글판 ‘신학월보’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문서전도의 장을 열었다.
1902년에는 한국 최초 하와의 이민을 장려하여 1903년 미주 최초 한인교회인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 태동을 도왔고, 협성신학교장(1907~1909)을 역임한 후 1909년 귀국했다. 이후 미 북감리교회 선교본부 편집국 총무, 강의 활동 등을 하다 1919년 5월 플로리다에서 52세의 나이로 소천 하였다.
한편, 1890년 9월 제물포에 혼자 입국한 미 북감리교회 파송 마가렛 벵겔 선교사(Margaret Bengel)를 존스 선교사가 마중하고 서울로 안내한 후 인연이 되어 가까워졌으며, 둘은 1892년 제물포 주재 선교사로 함께 파송되어 사역하다 1893년 5월 결혼했다. 벵겔 선교사 역시 1897년 인천 영화여학교를 설립한 후 근대 여성교육에 힘썼다.
아펜젤러와 존스의 남부순행에서 잘못 알려진 부분
필자는 이처럼 한국선교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존스 선교사가 기록한 전도 순행기록을 노블 선교사(William Arthur Noble)가 편집해 기고한 지 90년 후 ‘코리아 미션 필드’(The Korea Mission Field) 영인본으로 읽으며, 지금까지 알려진 아펜젤러와 존스의 남부순행 이야기와 좀 다른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아펜젤러 사후 10년이 되는 1912년, 한국에는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는 윌리엄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가 발간한 ‘아펜젤러의 전기’에서 한국의 지명과 년도, 날짜를 잘못 인용 편집함으로 인한 혼동이 생긴 것이다. 또 순행 당사자인 존스가 1891년에 쓴 저널을 노블 선교사가 1928년 코리아 미션 필드 11월호에 발췌해 소개한 내용과도 다르게 소개된 것이다.
특히 1889년 8월 아펜젤러와 존스의 남부순행 코스에 공주를 경유해 원주에 도착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아펜젤러의 공주 여행은 남부순행과 관계없는 1889년 2월의 일이었다. 또 두 선교사는 강원감영(江原監營) 객사에서 주일예배를 드렸다고 알려졌으나, 그들이 감영이 소재한 원주(原州)에 도착한 날짜는 1889년 8월 19일 월요일 오후였다. 존스가 기록한 남부순행기를 번역해 보면, 순행 첫 주일을 맞은 곳은 원주가 아닌 경기도 지평(砥平)이었고, 지평에서 원주를 향해 출발하고 도착한 날짜가 19일 월요일이었다. 따라서 남부순행 당시 강원도 땅에서 처음 드려진 원주선교의 기반을 놓는 강원감영 객사에서 두 선교사의 예배는 없었다.
필자가 존스의 남부순행기를 번역해 소개하는 이유는 아펜젤러와 존스 선교사의 원주 방문 기술에 관한 여러 가지 잘못된 자료가 빈번히 사용되면서 강원도 기독교사와 관련해 더 이상 잘못된 자료가 고착되고 확대 재생산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이는 기존에 발표된 원주 순행기록들이 한국 기독교 역사학계의 저명한 학자들과 목회자들에 의해 쓰였기 때문에 그들이 인용한 자료를 재인용해 글을 쓰고 2차 자료를 생산했기 때문에 벌어진 해프닝이라 생각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자료가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고, 또 이를 바로잡지 않으면 그릇된 역사 인식의 고정화가 계속될 것이라 우려된다.
따라서 우리는 특별히 선교사(宣敎史) 자료를 대할 때 발견되는 오류에 대해 실망스러운 부분이 있다면 이를 바로잡고자 하는 자세를 가져야겠다. 그러한 조그마한 노력을 통해 우리는 올바른 초기 선교역사를 정립할 수 있고 이와 함께 바른 교회역사도 구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라기는, 우리가 보아왔듯이 선교사들이 남겨놓은 많은 역사적 사료가 빠른 시일 내에 번역되고 연구되어 사학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크리스천들까지도 그들의 선교역사를 볼 수 있기를 원한다.
1889년 당시 만 21세였던 청년 존스 선교사는 비교적 상세히 매일 매일의 남부순행기록을 남겼다. 여정에서 만난 사람들, 방문한 곳, 지역의 특별한 모습 등을 청년의 눈으로 표현했다. 원래 존스 선교사는 처음 계획한 남부여행을 올링거 목사와 함께하려 했지만 실현하지 못했다. 그다음에는 아펜젤러 선교사와 압록강 지역까지 함께 여행하기로 했지만, 이 역시 조선 후기 통리기무아문에서 외국인에게 발급하던 일종의 여행허가증인 ‘호조’(護照) 발급 문제로 지연되어 갈 수 없었다. 호조가 늦게 나오는 바람에 계획했던 압록강 지역을 포기하고 1889년 8월 서울→양평→지평→원주→충주→문경→상주→안동→대구→청도→부산까지 이어지는 감리교 선교사의 첫 번째 남부순행을 아펜젤러와 함께하게 된 것이다.
자, 지금부터 131년 전 서울에서 출발한 존스와 아펜젤러의 남부순행 여행길을 날짜별로 따라 가보자.
“A Journey Through Southern Korea in 1889”, By George Heber Jones
The Korea Mission Field 1928년 11월호, 번역 리진만(우간다, 인도네시아 선교사)
그리하여 우리의 준비는 진척되었다. 1889년 8월 13일 화요일 아펜젤러는 제물포로 출장을 떠나며 여행에 필요한 물자를 구비하라며 마지막 준비를 나에게 맡겼다. 약품이 필요할 것 같아 스크랜턴 의사에게 요청했고, 그는 다음 약품들을 상세한 용법과 함께 보내줬다.
Rhubarb and Soda-Indigestion / 대황과 소다-인디제스티온(소화제)
Diarrhoea Mixture / 혼합 설사약
Tincture of Ginger / 생강 팅크(감기약)
Epsom Salts / 사리염(의약품·하제의 재료)
Quinine / 키니네(말라리아, 해열제)
Brandy / 브랜디(저체온증 보조제)
위의 후반부 약품들은 나에게 죄의식을 느끼게 했기에 여행에서 돌아와서는 (내가 약국에서 구입한) 그 약품들을 기꺼이 환불했다.
순행 기간 동안 우리가 기분 전환을 위해 가져간 것은 성경과 필기도구, 그리고 찬송가 이외에는 칵커의 ‘그리스도론(Cocker’s Christianity)과 그리스 철학’, 프리센(De Pressene’s)의 ‘초기 기독교 시대의 순교자와 옹호자’뿐이었다. 그 책들을 읽는 것은 정말 재미있었다.
드디어 1889년 8월 16일 출발하는 날이 다가왔다. 나는 새벽 4시에 깨어나 출발준비를 했다. 그러나 마지막 짐을 꾸리고 여행 인사를 하느라 7시가 되어야 출발했고 우리가 동대문을 지날 때 시각은 정각 오전 8시였다. 아펜젤러 형제는 아주 힘 좋은 졸린 듯한 흰색 몽골말에 나는 조선 사람들이 말하는 회색 야생마에 올랐다. 산뜻한 아침 공기는 나에게는 모든 것이 장밋빛 이었고, 무한한 자유로움에 충만했으며, 내가 인식한 것은 나의 일상의 경험이었고, 내가 나의 시선을 어디에 두어도 이 나라가 나에게 맡겨진 것처럼 느꼈다.
그날 아침 우리는 아름다운 푸르른 산들과 어디에나 잘 자라고 있는 논밭을 지나 40리(12마일)를 지났다. 한 곳을 지나며 우리는 연못에서 기르는 셀러리(celery)로 먹을 수 있는 연(蓮)을 기르는 것을 보았다. 조선 사람들은 절인 음식을 좋아한다. 나 역시 좋아하는데 많은 한국 음식 중 내가 즐기는 음식이 바로 절인 음식이다.
다른 곳을 지나며 조그만 정자 하나를 보았는데 이는 서울 동편에 위치해 있는 수많은 왕실의 무덤(역주: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조선 역대의 왕릉군)에 성묘를 하러 국왕이 행차를 할 때 쉬는 곳이라 들었다. 그러한 소소한 광경들을 다 언급할 필요는 없지만 그러한 모습은 나에게 감명을 주었다.
우리는 11시 45분 점심식사를 위해 한강 둑 위에 있는 조그만 마을에서 쉬었다. 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칵커의 ‘그리스도론’을 읽었고, 전진하면서 이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그리고 정말 8월의 뜨거운 햇볕 아래 강물에서 목욕을 즐겼다.
오후 2시 40분 우리는 짐을 싣고 다시 40리를 전진했다. 우리는 시골의 풍경을 음미하며 한강 제방을 따라 원주 방향으로 걸었다. 나는 한국 풍광의 한 부분이 되었고 어쨌든 계속되는 경치를 즐겼다. 우리는 미술가들이 화폭에 담아놓을 만큼 아름다운 여러 형태의 강과 여러 형태의 산을 넘어 앞으로 갔다.
가끔 우리가 말 위에 오래 앉아 피로할 때는 말에서 내려 묘한 매력이 있는 길에서 대화를 나누며 걸었다. 그러한 여행은 두 영혼을 아주 가깝게 해주었으며, 어떤 힘에 의해 동일한 나라로 묶어주는 어떠한 힘을 느꼈으며 그 목표를 가졌다. 오후 6시 30분에 강을 건너 기다란 섬을 지나 나뉘는 부근에서 우리는 마을을 만나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 관대한 마을의 대표자들이 우리가 먹는 모습을 보고, 또 우리가 자는 모습까지 보려고 남았다. 너무나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그들에게 집에 가서 주무시고 다음 날 우리가 먹는 모습을 보라고 했더니 다 돌아가 조용해졌다.
문을 닫고 한국 집 방 안에서 잠을 자기는 너무나 더워서 우리는 현관 앞마당에 간이침대를 펴놓고 바깥 공기를 맡으며 잠을 잤다. 믿을만한 시골 사람들의 심성 때문에 우리는 자주 이렇게 마당에서 잠을 잤다. 20년 전 이 땅은 수많은 기독교인의 피로 흠뻑 젖어 있었으며 외국 사람들은 잡히는 족족 무참히 참수되었다(역주: 1866년 초에 대원군은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을 내려 프랑스 신부와 조선인 천주교 신자 수천 명을 학살했는데 양평, 지평 지역에서도 많은 천주교인이 순교를 했다.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군이 강화도에 침입한 사건 즉, 병인양요가 발발했다).
오늘날 우리가 기뻐하지 못하는 한 가지 문제점은 우리가 전도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역주: 이는 1888년에 발생한 외국인들이 유아를 납치해 죽여 약을 만든다는 일명 ‘영아소동사건’과 조선정부에서 미국공사관에 ‘전도 금지를 요청한 포교금지령을 말한다). 오! 버려진 그들의 영혼에 다가가 구원의 사랑을 전할 수 있기를... 우리는 이 나라의 향후 정책을 고려해야 한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