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9년 8월 17일 토요일, 8월 18일 일요일

존스 선교사
▲존스 선교사

우리는 75리(25마일)를 이동했는데 점심을 먹기 위해 양근군(楊根郡)을 지나며 쉬었고 저녁에 지평현(砥平縣)에 도달했다. 양근은 한강 뒤로 뻗어있는 꽤 커다란 마을이었고 동네가 아름다웠고 보기 좋았다. 앞으로 10년 후에는 우리는 이 지역이 감리교도들이 잘 양육되기를 고대한다. 지평은 커다란 재판소가 있는 곳이고, 산을 거점으로 하는 평원의 끝자락에 위치해 있다(역주: 1889년 당시 양근군 소재지는 현 양평읍이고 지평현은 현 지평면 지역이었다). 현감은 지평현에 없었지만 그곳 관리들은 우리에게 관아의 객사를 오늘 밤과 주일을 위해 내주었다. 이곳은 주위의 3,000가구가 있는 중심에 위치해 있으며 인구로는 20,000여 명이 사는 곳이다. 객사는 그렇게 알뜰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지평현에 주재하고 있는 젊은 관리로부터 지휘를 받고 있고 이 현에 적은 수입을 가져다준다. 현감의 숙소는 황폐해 비어 있었고, 주일 아침 나는 우리의 말들이 그곳으로 가는 커다란 문에 매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주일은 참 평화로웠다. 몇몇 촌로들이 우리를 방문해 그들과 잠시 환담을 했다. 마을로 잠시 걸어가 보니 우리는 이 마을의 범위와 성격을 알 수 있었다. 이곳 사람들이 진리를 알고 자유롭게 되기 위해 주님께서 그날을 재촉하시기를 기도한다.

원주목 지도
▲존스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순행했던 당시 원주목 지도. ⓒ규장각한국학연구원

1889년 8월 19일 월요일

말안장에 앉은 시간이 오전 5시 15분이고 이제 원주까지는 90리를 더 가야 한다. 중간 쉼터까지는 60리를 가서 도착했는데 말이나 사람 모두에게 길고 힘든 길이었다. 무더위? 왜 태양은 계속해 끓는지, 나의 팔과 목은 물집이 생겨 허물이 벗겨졌다. 정오에는 길가에 있는 개울에서 미역을 감으며 휴식을 취했다. 이 지역에서는 오후 3시에 출발했는데 내가 세어보니 이 마을 사람 75명 중 63명이 개울가로 나와 우리의 출발을 보러 나왔다.

오후에 우리는 그 이전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물체와 맞닥뜨렸는데 가까이 가서 살펴보지는 못했다. 그것들은 여러 개가 높이 세워졌는데 멀리서 보아 거대한 T자처럼 보였다. 그 기둥들은 30피트 높이였는데 마치 이발소의 안내판처럼 붉고 검은색의 줄로 채색되어 있었다. 십자 부분은 커다란 나무 삼지창을 조각해 놓았으며 쌍꼬리뱀을 묘사한 것 같았다. 그 모습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추측하기로는 분명 고대의 물신숭배일 것이 틀림없다.

우리가 가는 길은 계속해 험한 길의 연속이었지만 산하는 아름다웠다. 이제 산 정상을 통과해 600피트 아래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이길 역시 험한 길이었다. 우리가 듣기로는 이 길은 ‘관찰사의 길’이였다 한다. 우리의 결론은 관찰사도 꼭 필요한 여행에만 이 길을 일렬로 여행했을 것이라 느꼈다(역주: 18세기부터 강원감영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은 강원감영 > 만종 > 질마재(가곡리) > 마라우(동화리) > 안창 > 솔치(안창리) > 안창진 > 북창(30리) > 대·소송치(솔치) > 서화치 > 지평(70리)까지 약 100리길이었다. 한편 남쪽으로 향하는 길은 안창진 > 등안현(등안고개) > 대천(궁촌천) > 소현(백암현, 모산고개) > 흥원창(60리) > 여주(서10리) 길이었다. 김은철 편저, 원주지명총람(하), 원주시 2019, 76쪽).

오후 5시 30분경 우리는 언덕 위 표지판을 보며 원주 땅에 들어선 것을 알았다. 우리가 상상하기로는 원주목이 감영이 소재한 곳이라 성곽으로 싸여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성곽이 나타나기를 바랐으나 아무것도 볼 수 없었고 쓸데없는 기대였다. 원주는 성곽이 없을 뿐만 아니라 담장조차도 없었다. 그 뒤로는 마치 말편자 모양의 산이 둘러서 있었고 보라색 석양이 원주 상공 1,600피트 위로 들어 올려져 있었다. 그러나 원주 도읍의 모습은 초라하게 보였으며 살아가기에 팍팍하게 보였다. 그곳에 서 있는 구조물이라고는 아무런 쓸모없는 단지 인간을 위해 쫓겨난 적이 있는 불쌍한 개구리와 말라리아가 자랄 수 있는 그런 것 정도였다.

강원감영 객사(영빈관)
▲1910년대 강원감영 객사(영빈관)가 있던 마을 모습. 현재는 흔적이 없다. ⓒ원주역사박물관

드디어 우리는 비록 성벽과 연결은 안 되었지만 중앙도로를 통과할 수 있는 넓은 길 위에 우뚝 선 대문 앞에 도착했다. 대문을 통과해 나가자 우리는 놀라고 충격을 받은 원주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우리가 도읍 중앙 길을 따라 목사 관아로 가는 길에서 놀랄만한 광경이 벌어졌다. 사람들이 집의 문을 열고 쏟아져 나왔고 우리를 보기 위해 창문을 열고 입을 벌리고 놀란 눈으로 우리 일행을 내다보았다. 이후에 우리는 우리가 원주에서 그들에게 나타난 첫 번째 서양인이라고 들었다.

우리는 영광스럽게도 목사관아 객사를 배정받았고 우리를 신기하게 생각하며 따라온 사람들로부터 격리되기를 원했다(역주: 객사는 고려·조선시대에 각 고을에 둔 관사(館舍)인데 원주목에 있던 객사는 학성관(鶴城館)이라 불렸다. 감영(監營) 동쪽에 있는데, 숭정(崇禎) 갑술년(1634년)에 목사(牧使) 이배원(李培元)이 처음 세웠다. 동영중기(하), 원주시 2013, 269쪽). 그렇지만 그렇지 못했다. 관중들은 객사 문을 닫을 때까지 우리의 숙소 안까지 밀치고 들어왔다. 그들은 우리가 있는 곳까지 들어와 우리와 얘기를 나눴다. 비록 우리는 지치고 배가 고팠지만 이러한 관중들 앞에서 식사를 한다는 건 생각할 수 없었고 우리는 이들의 환영(?)이 끝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고 관중은 더 늘어났다. 원주의 순검들이 질서를 잡으려 했지만 그들은 그들의 임무를 수행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우리는 우리가 견딜 수 있는 데까지 서서 있었고, 그리고 뭔가 조치하지 않으면 그날 저녁 식사도 휴식도 취할 수 없음을 알았다.

첫 번째로 우리는 순검들에게 객사를 정리해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들은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드디어 기수(우리 순행을 돕기 위해 서울에서 함께 온 군인)가 우리를 구했다.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사령~ 사령~(使令, 조선시대 관청에 딸린 하졸) 어디들 있느냐?” 하고 부르니 순검들이 “예이,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순간 기수는 순검의 상투를 잡아 관중 속으로 끌고 가서는 2분여 동안 순검의 할 일을 지시했다. 기어이 관중들을 다 내보냈다. 그들은 서울에서 내려온 호위병이 그들의 위험을 잘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이러한 사태가 일어났음을 미안하게 생각했다. 우리가 거기에서 설교를 할 수 있었다면 더 영광스러운 기회였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 공사관이나 우상숭배가 우리의 선교를 막고 있다.

강원감영 포정루
▲강원감영의 대문으로 포정루라고도 불린다. 일제강점기 일본 헌병들이 부대를 진주시키고 대문 현판도 일본식으로 바꿔 단 모습(왼쪽 사진)과 현재 모습(오른쪽 사진). ⓒ원주역사박물관

1889년 8월 20일 화요일

다음날, 8월 20일 화요일 우리는 원주를 떠나기 전 원주 목사와 강원관찰사를 예방했다(역주: 1889년 당시 원주목사는 이철우(1889.3.9.~1890.10.14. 재직)였고 강원관찰사는 정태호(鄭泰好)였으며 정태호는 황해도 관찰사를 마치고 강원도 관찰사로 1886년 부임해와 고종27년(1890)까지 역대 관찰사 중 가장 오랜 기간인 3년 8개월을 재임 후 지춘추관사로 입조했으며, 이후 이조판서와 공조판서를 두 차례씩 역임하였다. 박문성, 강원감영5백년, 원주문화원, 2017, 493쪽). 우리는 목사의 손님이기 때문에 먼저 그를 예방했다. 우리는 그가 한옥의 조그마한 사무실 영접실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을 보았다. 나이가 좀 드신 양반으로 그는 매력적이고 쾌활한 얼굴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리고 마음속에서부터 우러나는 전염성 있는 웃음을 선사했다. 그는 적색과 노랑 실크로 된 관복을 입고 있었고, 허리띠에는 충성스러운 은총을 상징하는 관대를 하고 있었다.

우리가 들어가자 그는 목사의 의자 쪽으로 가더니 그냥 매트 위에 앉아서는 그의 오른쪽에 있는 광채가 나는 적색말가죽 방석 위에 우리를 앉으라고 권했다. 많은 사람들이 진정 민주적으로 우리 주위에 서서는 우리의 그렇게 고상하지도, 또 교화적이지도 않은 대화를 경청했다. 갑자기 우리는 그가 대접(환영)! 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우리는 그곳을 떠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한국 사람들은 음식을 대접하기 전까지는 사람들을 보내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기대했던 것보다 더 잘 해냈다. ‘환영주’는 두 개의 대접에 뭔지 모르는 액체에 위에는 푸른 발효된 층을 얹은 것이었다. 그것은 꿀처럼 달콤했으며 밤을 갈아 넣은 물이 있었다. 나는 내 앞에 놓인 나의 대접을 가져와 마실 엄두를 내지 못해 쭈삣쭈삣하고 있으니, 목사 나리는 나에게 그것은 해가 되는 것이 아니니 마시라고 계속 권했다. 이러한 강권에 밀려 사양할 수 없어 마셔보니 그 음료는 정말 맛이 있었다. 다 마시지 못한 것은 밖에 있는 순검들에게 내주었다. 대접은 다 비워져서 돌아왔다.

“A Journey Through Southern Korea in 1889”, By George Heber Jones
The Korea Mission Field 1929년 1월호, 번역 리진만(우간다, 인도네시아 선교사)

다음으로 예방할 곳은 관찰사가 업무를 보는 감영이었다. 우리는 말머리 고삐를 잡고 감영을 향해 갔고 군중들은 말 뒤꿈치를 따라왔다. 군중들은 감영정문 앞까지 우리를 둘러싸고 왔지만 관찰사 내부로는 들어갈 수 없었다(역주: 감영정문: 포정루·布政樓, 강원감영의 정문인 문루, 명칭은 관공포정아문(關東布政衙門)이다. 동영중기(하), 원주시 2013, 272쪽). 몇 개의 문과 몇 개의 안뜰을 지나 우리는 드디어 많은 순검들이 지키고 있는 커다란 대접견실에 관찰사와 관리들이 모여 있는 곳에 도착했다. 감영접견실은 매우 넓고 높은 건물이었고, 3개의 벽체가 있고 한 면은 커다란 석조 법정을 향해 열려있었다(역주: 감영접견실, 선화당·宣化堂을 말하는데 이는 조선시대 각 감영(監營)에서 관찰사(觀察使)가 정무(政務)를 처리하던 정청(政廳) 건물이다. 동영중기(하), 원주시 2013, 271쪽). 이 접견실에서 관찰사는 앉아있었고 그의 참모들은 관찰사를 중심으로 V자 모양으로 서 있었다. 서 있던 관리들 중 몇몇 관리들은 어젯밤 우리를 방문해 구면인 것을 알았다.

강원감영 선화당
▲1910년대 일본헌병대가 진주해 있던 강원감영의 선화당(왼쪽 사진)과 현재 모습(오른쪽 사진). 관찰사를 예방했던 사무실. ⓒ원주역사박물관

관찰사는 우리의 인사에 고개를 약간 끄덕여 답하며 관찰사의 옆에 있는 방석에 앉으라고 했다. 내가 관찰사를 살펴보고 또 그의 법정에 눈을 돌리는 동안 아펜젤러 형제는 관찰사와 대화를 나눴다. 재판정은 그리 화려하지 않았고 관찰사 역시 멋지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실 관찰사는 아펜젤러와 나에게 그렇게 호감을 주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키도 작았고, 목소리도 작았으며, 얼룩진 얼굴과 침침한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일반적인 한국 양반들의 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의 모자에 있는 작은 금속 수탉이 그의 관직을 나타냈다. 그는 우리에게 국적과 나이, 그리고 첫 번째 대통령에 대해 물었다.

나와 나눈 관찰사의 대화는 다음과 같았다.

“이름이 무엇인가?”
“조원시라고 합니다.”
“직업은 무엇인가?”
“선생입니다”
“나이는 어떻게 되는가?”
“22세입니다”
“뭐라? 선생을 하려고 일만 마일을 건너왔다는 말인가? 그리고 이제 22살이란 말이지? 결혼은 했는가?”
“아직 미혼입니다.”

관찰사의 눈은 놀라움에 커졌고, 그리고 다음 대답을 할 때까지 잠시 멈췄다.

“그것참 이상한 일이군… 이 젊은이가 나에게 말하기를 22살이라 했고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나는 그 말을 믿을 수 없단 말이야….”

관찰사의 솔직한 대답이 나에게 웃음을 머금게 했고 나는 대화 주제를 놓쳤다. 진실을 말하자면 한국인들은 우리가 늦게 결혼하는 풍습을 이해하지 못한다. 한국인들에게는 결혼은 진정 남자가 되는 길이고 보통 15세에서 18세에 혼인한다. 그러니까 관찰사의 눈으로 봐서 나는 선생인 척하는 아이일 뿐이었다. 점점 더 구체적으로 관찰사는 다시 질문했지만 이번에는 내가 신발을 벗어 관찰사에게 보여줌으로써 그의 감탄을 받을 수 있었다.

우리는 이 접견실에서 또 다른 과일과 견과 대접, 그리고 인삼차를 우리 앞에 두고 반 시간 동안이나 보냈다. 드디어 예방은 끝이 났고 우리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관찰사는 이번에는 우리를 향해 다시 머리를 갸우뚱하니 그의 모자에 붙어있던 금속 수탉이 나는 것 같았다. 그것은 낡았고 풍파를 헤쳐나가는 새 같았고, 나에게는 25년간의 참패를 잊고 클리블랜드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급히 떠나는 민주당의 모습을 다시 생각나게 하였다.

예방의식은 끝이 났다. 우리는 조선에서 가장 적고 가장 가난한 도에서 가장 높은 관리를 만난 후 우리의 결론은 관찰사는 그의 지방(강원도)과 불협화음은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목사 아전의 객사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고 서둘러 객사를 출발해 금일 70리를 나아갔다.

이것이 원주를 방문한 감리교도들의 첫 번째 경험 이야기다. 우리가 방문하는 단계에서 믿음은 어떤 도움이 되는 단계를 주는 단 하나이다. 그것을 통해 그로부터 우리는 10년이 걸렸고 보게 되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하나님 아버지는 전지전능하신 분이다. 성도들을 우러러보아라!

우리는 원주에서 8월 20일 화요일 다음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계속>

👉기독교 종합일간지 '기독일보 구독신청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