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순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다시 대구로
1910년대부터 무순에 조선족 마을이 형성된 후, 20년대 이미 많은 조선족이 모여 살던 이곳에 신의주 사람들까지 모여들면서 집거촌을 이뤘다. 이 중 예수를 믿던 두 가정은 이천년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으며, 신의주 제2교회 이름을 본떠 무순 제2교회로 이름을 붙였다는 설도 있다. 조선에서 온 이민자들이 늘고, 신자들도 늘자 8층짜리 단층 청기와집과 주택을 지었고, 이후 교회를 더 발전시키기 위해 1930년대 초 2층 예배당을 건축했다는 것이다.
“당시 우리 집 부엌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대형 무쇠솥 3개가 걸려있었어요. 열어보면 항상 따뜻한 음식이 있었습니다. 목회자, 성도들을 비롯해 독립운동을 하는 분들이 찾아오면 언제든 대접하려고 어머니가 준비해 둔 것이었지요. 그 당시 우리 집에는 부엌에 지하창고가 있었는데 그곳에도 먹을 것들이 가득했죠.”
그러나 1943년 2월 이천년 영수는 이질로 별세하고, 은행에 다니던 전도유망한 허용신 집사의 둘째 딸은 원하던 일본 유학을 가지 못하자 신경병으로 병사했다. 아들들은 모두 어려서 죽고, 1943년 마지막 11번째 태어난 자녀가 이봉옥 사모다. 어머니 허용신 집사는 남편과 자녀들을 잃고 방황의 시기를 보냈다. 그리고 1945년 조선 광복 이후 어수선한 시절, 재산을 노리던 소련군과 팔로군, 한족들의 괴롭힘을 견디지 못하고 1947년 네 딸과 함께 잠시 한국에 여행을 하다 올 심산으로 나왔다. 중요한 재산은 모두 부엌 지하창고에 넣고 당시 집안을 관리하던 한족 집사 왕 서방과 시멘트로 입구를 봉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교회 건축뿐만 아니라 무순 지역 조선족 교육에 많은 후원을 하셨다는 우리 어머니께서는 남편과 자녀들을 잃은 후 크게 한탄하셨습니다. ‘내 하나님께서 어찌 우리에게 이리하시냐’며 건너편 성전을 향해 그리도 무릎 꿇고 기도하던 생활을 멈추고, 주님께 드리던 삶을 버리시니 무순 기독교 역사에 기록이 남겨지지 못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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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무순교회 성탄 기념 사진. 형광펜으로 표시된 이들이 이봉옥 사모의 부모다. 1938년과 1940년
사진에 있는 부모에 대한 기록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사진=무순조선족기독교백년개관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봉옥 사모의 말대로 무순교회 역사에서 이천년 영수와 허용신 집사의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1938년, 1940년 무순교회 성탄절 사진에는 그들이 나와 있다. 또 공산정권 아래서 예배당이 지방청사로 쓰일 때, 항의시위에 주축이 된 허기신 씨는 그의 어머니 허용신 집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봉옥 사모는 여러 번 시도 끝에 무순에 살고 있는 허기신 씨를 찾았으나, 고령이라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한다고 하여 직접 만나진 못했다. 또 신의주에서 어머니 허용신 집사와 함께 일하던 ‘변 씨’ 성을 가진 집안의 아들은 변승렬 전 포항의료원 원장으로, 교회에 다니진 않았지만 어린 시절 이봉옥 사모 등과 무순에서 보낸 시절을 기억한다. 변승렬 전 원장은 이봉옥 사모의 대구사범 2년 선배이기도 하다.
이후 서울 영락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허용신 집사 가족은 해방촌(지금의 힐튼호텔 인근)에 자리 잡았다. 집에서는 자주 구역예배가 드려졌으며, 중국 무순과 이북 출신 신도들이 수시로 찾아와 예배드리고 교재를 나누었다. 이봉옥 사모는 당시 어머니가 성도들과 나누던 대화를 엿들으며 무순교회 설립 과정 등을 상세히 알게 되었다.<사진=카페가 된 무순교회 예배당 앞에서 박계춘 목사 부부(양 옆)와 함께한 이봉옥 사모(가운데). 이봉옥 사모 제공>
귀국한 지 3년만인 1950년 6.25 한국전쟁이 터지자 가족은 다시 지붕이 없는 무개화차를 타고 남쪽으로 피난을 떠나 새벽에 대구에 내렸다. 짐을 들어주겠다던 짐꾼도 사람이 많은 틈을 타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지금의 대구교육대를 조금 못 가 우물에서 물을 얻어먹으려 할 때 “얼마나 고생이 많으냐. 우리 사랑채에 기거하라”고 권한 권익현 전 국회의원의 어머니를 만나 그곳에서 대구 생활이 시작됐다.
서울 영락교회 성도들은 전쟁 중에도 대구를 비롯하여 부산, 제주도 등에서 모여 예배를 드렸고, 지역마다 ‘영락교회’ 간판을 걸고 신앙생활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허용신 집사와 딸들은 대구 영락교회에 출석했다. 생활은 몹시 곤궁했다. 한국에 온 지 12년만인 1959년 12월 21일, 대구 영락교회 주일예배 후 허용신 집사는 급성심근경색으로 일어나지 못하고 12시간 후에 별세했다.
“잃어버린 성전 되찾아 무순 조선족 기독교 역사 기념하길”
이후 이봉옥 사모의 셋째 언니인 이봉실 씨(1933년 무순 출생)는 아래 세 명의 여동생을 어머니를 대신해 보살피며 학교를 보내고 결혼까지 시켰다. 이봉옥 사모는 대구에서 보낸 학창시절, 노태우 전 대통령의 부인 김옥숙 여사의 친정집에 세 들어 살다,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음악교사가 되었다. 어릴 때부터 노래, 무용, 그림 등 다방면에 재능을 보였던 그는 박정희 대통령이 은사 김영기 대구사범학교 교장을 위해 마련한 생신잔치에서 학교 대표로 독창하기도 했다. 노래가 끝난 뒤 피아노 옆에 서 있는 그에게 박정희 대통령이 다가와 “너도 작고 나도 작은데, 너는 어디서 이렇게 아름다운 목소리가 나오느냐”고 물었을 때, “제가 잘하는 게 아니에요. 제 속에 있는 하나님이 잘하게 해줘요”라고 당차게 대답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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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옥 사모는 2011년 심양, 무순, 신빈현 3개 도시의 조선족 소학교, 중학교, 사범학교 10곳을 방문해
전래음악연구에 대해 강의했다. 사진=이봉옥 사모 제공
이봉옥 사모는 교회 성가대를 지휘하고 교육과정 음악 ‘교사용 지도서’ 교열 및 집필, 지휘자예술원본회 신학 강의, 전국교육연수원 및 학교단위 전통음악 강의, 대구교대 동문회 초대사무국장 등 다양한 활동을 해왔다. 농어촌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해 점심시간에 주먹밥을 먹인 교사로 동아일보(경북보, 1965년 6월 11일 자)에 기사가 실렸고, 동아일보 전국 논문 발표대회에 ‘민속음악 실천 연구’로 당선(1967년 10월)되어 실리기도 했다. 3년 노력 끝에 2004년 중국 초등학생 음악교과서에 우리 민요 ‘아리랑’, ‘도라지’, 경상도 타작노래 ‘옹헤야’ 등 3곡을 싣는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013년에는 제20회 양천구민상(교육부분)을 수상, 2015년에는 대한민국을 빛낸 인물문화대상 사회봉사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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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제20회 양천구민상(교육부분) 시상식 모습. 맨 오른쪽이 이봉옥 사모다. 사진=이봉옥 사모 제공
평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올바르게 사는 것이고, 국가가 형통하는 것이다”, “불의에 타협하면 안 되고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는 것이 이봉옥 사모의 교육 신조였다. 47~48년 전 가르친 제자들은 지금도 이봉옥 사모를 기억하고 화분과 음식을 보내온다. 제자 중에는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도 있다.
이번 취재는 이봉옥 사모의 제보로 이뤄졌다. 지난 5월 그는 “그리도 주님께 헌신했던 부모님의 삶이 하나도 기록으로 남지 못한 것이 너무 안타깝다”며 “형제들은 다 돌아가시고 저만 남았는데, 막내인 저를 통해 부모님의 삶이 알려져 믿음의 본보기가 되면 좋겠다”며 연락해 왔다.
80여 년 된 예배당은 2003년 카페에 넘어갔고, 매매대금은 지금 하동교회가 있는 신시가지의 부지 매입에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예배당 재매입 방법을 알아보니, 시가로 한화 20억 원 정도였으나 카페 측에서는 “50억을 주어도 안 팔겠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한다.
“남은 소망은 부모님의 정성이 담긴 신앙 유물인 무순교회 예배당이 재매입되어, 선조의 귀한 신앙의 모범을 후세에까지 전하는 기독교 역사관으로 다시 세워지는 것입니다. 하동교회 박계춘 목사님께도 이를 말씀드리고, 헌금을 모은다면 저도 동참하겠다고 했습니다.”
이봉옥 사모는 2013년 무순 조선족 기독교 100주년 행사와 ‘무순조선족기독교백년개관’ 책 출판을 뒤늦게 알고, 무순문화원에 근무하던 이윤선 선생을 통해 책 10권을 구했다. 기독교 방송국과 변승렬 전 원장, 대구 영락교회에서 이봉옥 사모에 세례를 주었던 림인식 노량진교회 원로목사, 이봉실 언니 등에게 책을 전해주고, 현재 가지고 있는 두 권 중 한 권은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에 기증할 계획이다. 또 다른 한 권은 가문에서 유일하게 성결대를 다니는 목회자 후보생, 손자 김정만 군에게 부모님의 기독교 역사의 산 증거물로 물려줄 생각이다.
이봉옥 사모는 인터뷰 이후에도 수시로 기자와 통화, 문자를 주고받으며 “부모님의 삶을 다시 제대로 정리하게 되었다. 주님께 드린 부모님의 정성이 하나도 남겨지지 않은 이유도 이제 확실히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남편과 딸을 잃은 후 귀국하기 전까지 수년간 기도를 멈추고 술에 의지하는 등 타락의 길을 걷던 어머니. 그래서 귀국 전까지 성전을 끝까지 지키지 못했고, 무순 조선족 기독교 역사에 버림받은 분이 됐을 것으로 사려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하지만 사재를 바쳐 건축한 사실만은 분명하니, 지금이라도 부끄럽지만 부모님의 헌신과 정성은 세상에 알려지길 원합니다. 그리고 하루속히 이 예배당이 후대에 믿음의 본보기를 보여주는 산실이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소망은 개인적인 바람뿐 아니라 이 민족의 바람이겠지요.”(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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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우리 집 부엌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대형 무쇠솥 3개가 걸려있었어요. 열어보면 항상 따뜻한 음식이 있었습니다. 목회자, 성도들을 비롯해 독립운동을 하는 분들이 찾아오면 언제든 대접하려고 어머니가 준비해 둔 것이었지요. 그 당시 우리 집에는 부엌에 지하창고가 있었는데 그곳에도 먹을 것들이 가득했죠.”
그러나 1943년 2월 이천년 영수는 이질로 별세하고, 은행에 다니던 전도유망한 허용신 집사의 둘째 딸은 원하던 일본 유학을 가지 못하자 신경병으로 병사했다. 아들들은 모두 어려서 죽고, 1943년 마지막 11번째 태어난 자녀가 이봉옥 사모다. 어머니 허용신 집사는 남편과 자녀들을 잃고 방황의 시기를 보냈다. 그리고 1945년 조선 광복 이후 어수선한 시절, 재산을 노리던 소련군과 팔로군, 한족들의 괴롭힘을 견디지 못하고 1947년 네 딸과 함께 잠시 한국에 여행을 하다 올 심산으로 나왔다. 중요한 재산은 모두 부엌 지하창고에 넣고 당시 집안을 관리하던 한족 집사 왕 서방과 시멘트로 입구를 봉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교회 건축뿐만 아니라 무순 지역 조선족 교육에 많은 후원을 하셨다는 우리 어머니께서는 남편과 자녀들을 잃은 후 크게 한탄하셨습니다. ‘내 하나님께서 어찌 우리에게 이리하시냐’며 건너편 성전을 향해 그리도 무릎 꿇고 기도하던 생활을 멈추고, 주님께 드리던 삶을 버리시니 무순 기독교 역사에 기록이 남겨지지 못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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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무순교회 성탄 기념 사진. 형광펜으로 표시된 이들이 이봉옥 사모의 부모다. 1938년과 1940년
사진에 있는 부모에 대한 기록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사진=무순조선족기독교백년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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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영락교회 성도들은 전쟁 중에도 대구를 비롯하여 부산, 제주도 등에서 모여 예배를 드렸고, 지역마다 ‘영락교회’ 간판을 걸고 신앙생활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허용신 집사와 딸들은 대구 영락교회에 출석했다. 생활은 몹시 곤궁했다. 한국에 온 지 12년만인 1959년 12월 21일, 대구 영락교회 주일예배 후 허용신 집사는 급성심근경색으로 일어나지 못하고 12시간 후에 별세했다.
“잃어버린 성전 되찾아 무순 조선족 기독교 역사 기념하길”
이후 이봉옥 사모의 셋째 언니인 이봉실 씨(1933년 무순 출생)는 아래 세 명의 여동생을 어머니를 대신해 보살피며 학교를 보내고 결혼까지 시켰다. 이봉옥 사모는 대구에서 보낸 학창시절, 노태우 전 대통령의 부인 김옥숙 여사의 친정집에 세 들어 살다,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음악교사가 되었다. 어릴 때부터 노래, 무용, 그림 등 다방면에 재능을 보였던 그는 박정희 대통령이 은사 김영기 대구사범학교 교장을 위해 마련한 생신잔치에서 학교 대표로 독창하기도 했다. 노래가 끝난 뒤 피아노 옆에 서 있는 그에게 박정희 대통령이 다가와 “너도 작고 나도 작은데, 너는 어디서 이렇게 아름다운 목소리가 나오느냐”고 물었을 때, “제가 잘하는 게 아니에요. 제 속에 있는 하나님이 잘하게 해줘요”라고 당차게 대답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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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옥 사모는 2011년 심양, 무순, 신빈현 3개 도시의 조선족 소학교, 중학교, 사범학교 10곳을 방문해
전래음악연구에 대해 강의했다. 사진=이봉옥 사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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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제20회 양천구민상(교육부분) 시상식 모습. 맨 오른쪽이 이봉옥 사모다. 사진=이봉옥 사모 제공
이번 취재는 이봉옥 사모의 제보로 이뤄졌다. 지난 5월 그는 “그리도 주님께 헌신했던 부모님의 삶이 하나도 기록으로 남지 못한 것이 너무 안타깝다”며 “형제들은 다 돌아가시고 저만 남았는데, 막내인 저를 통해 부모님의 삶이 알려져 믿음의 본보기가 되면 좋겠다”며 연락해 왔다.
80여 년 된 예배당은 2003년 카페에 넘어갔고, 매매대금은 지금 하동교회가 있는 신시가지의 부지 매입에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예배당 재매입 방법을 알아보니, 시가로 한화 20억 원 정도였으나 카페 측에서는 “50억을 주어도 안 팔겠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한다.
“남은 소망은 부모님의 정성이 담긴 신앙 유물인 무순교회 예배당이 재매입되어, 선조의 귀한 신앙의 모범을 후세에까지 전하는 기독교 역사관으로 다시 세워지는 것입니다. 하동교회 박계춘 목사님께도 이를 말씀드리고, 헌금을 모은다면 저도 동참하겠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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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재를 바쳐 건축한 사실만은 분명하니, 지금이라도 부끄럽지만 부모님의 헌신과 정성은 세상에 알려지길 원합니다. 그리고 하루속히 이 예배당이 후대에 믿음의 본보기를 보여주는 산실이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소망은 개인적인 바람뿐 아니라 이 민족의 바람이겠지요.”(끝)
이지희 기자 jsowue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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