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듣는 귀가 곧 복이다
본문
마태복음 13장 10–17절
서론
같은 예배, 다른 결과— 차이는 ‘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매주 같은 예배를 드립니다. 같은 자리에 앉아 같은 찬송을 부르고, 같은 성경을 펼치며, 같은 설교를 듣습니다. 그런데 예배가 끝난 뒤의 모습은 놀라울 정도로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눈물을 흘리며 은혜를 고백하고, 어떤 사람은 마음 깊은 결단을 안고 돌아가지만, 또 어떤 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상으로 되돌아갑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길까요? 말씀이 달라서가 아닙니다. 설교자가 달라서도 아닙니다. 듣는 ‘귀’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신 뒤에 단호하게 선언하십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마 13:9) 이 말씀은 단순한 권면이 아니라 영적 경고입니다. “다 듣고 있지만, 사실은 아무도 제대로 듣지 않는다. 들을 준비가 된 사람만 듣는다.” 오늘 이 질문 앞에 우리 자신을 세워 보아야 합니다. 나는 듣고 있는가, 아니면 소리만 스쳐 지나가게 하고 있는가?
본론
Ⅰ. 신앙은 ‘봄’이 아니라 ‘들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사실 ‘듣는 귀’라는 표현은 예수님이 갑자기 꺼내신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신약에서 처음 등장한 개념이 아니라, 성경 전체를 꿰뚫는 하나님 백성의 오래된 신앙 언어입니다. 구약을 펼쳐 보면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단 한 번도 “이스라엘아 보라”로 먼저 말씀하지 않으셨고, 늘 이렇게 시작하셨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신 6:4)
왜 하나님은 ‘보라’보다 ‘들으라’로 시작하셨을까요? 히브리어로 ‘듣다(쉐마)’는 단지 소리를 인지하는 뜻이 아닙니다. ‘듣고, 받아들이고, 순종한다’가 하나로 묶여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듣는다’는 말은 사실상 ‘순종한다’는 말과 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출애굽한 백성에게 언약을 세우실 때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출 19:5) 듣지 않으면 언약이 흐려지고, 언약이 흐려지면 축복이 무너집니다. 그래서 신앙의 출발점은 언제나 ‘귀’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자꾸 귀를 닫아 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탄식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며” (렘 7:24)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사 6:10)
문제는 귀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귀가 닫힌 것이었습니다. 완악함 때문이었고, 고집 때문이었으며, 변하기 싫은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순종’을 결심으로만 요구하지 않으시고, 은혜로 귀를 여시는 역사로 이루어 주십니다. “주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 아니하였나이다” (사 50:5)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사 50:4)
여기서 중요한 결론이 나옵니다. 순종은 결심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귀를 여시는 은혜로 가능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깨닫는 사람은 머리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 귀가 열린 사람입니다. 이 배경을 알고 나면, 예수님이 왜 마태복음 13장에서 계속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하시는지 이해가 됩니다. 이 말은 구약 역사를 압축한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Ⅱ. 깨닫는 사람은 가까이 나아오는 사람입니다 (마 13:10–11)
이제 본문 10절을 보겠습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마 13:10) 여기서 갈림이 시작됩니다. 무리도 같은 자리에 있었습니다. 제자들도 같은 자리에 있었습니다. 모두가 같은 비유를 듣고, 같은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무리는 그냥 돌아갔고, 제자들은 예수께 ‘나아왔습니다.’ 이 한 단어가 모든 것을 가릅니다.
겉으로는 똑같이 들은 것처럼 보이지만, 한쪽은 군중으로 남았고 한쪽은 제자가 되었습니다. 차이는 지식이 아니라 거리였습니다. 무리는 멀리 서 있었고, 제자들은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깨닫는 사람의 첫 특징은 똑똑함이 아니라 태도입니다. 깨닫는 사람은 그냥 듣지 않습니다. 흘려보내지 않습니다. 묻고, 붙들고, 더 알고 싶어 합니다. 그 갈망이 있는 사람에게 주님이 응답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마 13:11) 이 문장은 마태복음 13장의 심장입니다. “너희에게는 허락되었고,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다.” 얼핏 들으면 하나님이 사람을 편 가르시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누구이고 ‘그들’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은 학벌이나 직분이나 신앙 연수로 나누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하나, 태도로 나누셨습니다. ‘너희’는 가까이 나아온 사람들입니다. 묻는 사람들입니다. 붙드는 사람들입니다. 순종할 준비가 된 사람들입니다. 반대로 ‘그들’은 곁에는 있었지만 다가오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듣기는 들었지만 묻지 않았고, 보기는 보았지만 마음을 열지 않았고, 변화 앞에서는 뒷걸음질 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원래 차별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허락’은 하나님의 편애가 아니라, 열려 있는 마음이 은혜를 받아들이는 방식을 말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마 5:45) 햇빛이 누구는 사랑하고 누구는 미워해서 비추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비추고 있습니다. 차이는 창문을 열었느냐 닫았느냐에 있습니다. 주님은 강제로 들어오지 않으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문을 열면… 들어가리라” (계 3:20)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군중처럼 ‘곁’에만 머물고 있는가, 아니면 제자처럼 ‘가까이’ 나아가고 있는가. 예배의 자리에 앉는 것으로 끝나는가, 아니면 말씀 앞에서 묻고 붙들며 삶으로 걸어 들어가는가.
Ⅲ. 영적 세계에는 ‘증가 법칙’이 있습니다 (마 13:12)
이어서 예수님은 영적 세계의 질서를 말씀하십니다.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마 13:12) 처음 이 구절을 읽으면 불편합니다. 있는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빼앗긴다니 불공평하게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벌의 감정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적 세계의 원리를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자연에도 법칙이 있듯 영적 세계에도 질서가 있습니다. 붙들면 자라고, 놓으면 사라집니다. 이것이 ‘증가 법칙’입니다.
그렇다면 ‘있는 자’는 누구입니까? 재산이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직분이 높은 사람이 아닙니다. ‘있는 자’는 마음 안에 영적 태도가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믿음이 있고, 사모함이 있고, 겸손이 있고, 순종해 보려는 작은 결단이 있는 사람입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많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조금이라도 붙드는 마음이 있으면 됩니다.
말씀을 듣고 “아멘”으로 받는 사람, 예배 후에 “주님, 오늘 이 말씀대로 살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사람, 한 구절이라도 삶에 옮겨 보려는 사람, 이런 사람이 ‘있는 자’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은혜가 은혜를 부르고, 깨달음이 깨달음을 부르며, 성경이 점점 살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맡기실 수 있는 그릇이 자라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없는 자’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아니라, 태도가 없는 사람입니다. 관심이 없고, 사모함이 없고, 마음이 냉소에 젖어 있고, “그냥 그렇지 뭐” 하는 무덤덤함에 익숙해진 사람입니다. 듣기는 듣지만 흘립니다. 감동은 있지만 붙들지 않습니다. 그러면 처음에 있었던 작은 은혜도 점점 사라지고, 마음은 둔해지며, 예배는 반복으로만 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있는 것도 빼앗긴다”고 하십니다. 영적으로는 정지 상태가 없습니다. 전진 아니면 후퇴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히 3:15) 오늘 들으면 오늘 더 부드러워지고, 오늘 거절하면 오늘 더 굳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지금 더 사모해지고 있는가, 아니면 더 무덤덤해지고 있는가. 더 가까워지고 있는가, 아니면 익숙함 속에 멀어지고 있는가.
Ⅳ. 듣지 못하는 근본 원인은 ‘마음의 완악함’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짚으십니다.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는 것이라” (마 13:13) 눈이 있는데 못 보고, 귀가 있는데 못 듣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능이 부족해서입니까? 설명이 어려워서입니까? 아닙니다. 주님은 원인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졌으며” (마 13:15) 문제는 지성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완악함은 단순한 성격이 아니라 영적 경직입니다. 말씀 앞에서도 움직이지 않는 굳어짐입니다. 고집과 자존심, 자기 의와 자기 방식이 마음을 꽉 채우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갈 자리가 사라집니다. 그래서 사람은 이상하게도 “몰라서”가 아니라 “변하기 싫어서” 귀를 닫습니다. 말씀대로 살면 습관을 고쳐야 하고, 죄를 내려놓아야 하고, 손해를 감수해야 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깊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일부러 묻지 않습니다. 일부러 건드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충격적인 이유까지 드러내십니다. “돌이켜 내가 고쳐 줄까 두려워함이라” (마 13:15) 고침을 두려워한다는 말은 역설적입니다. 그러나 고침은 곧 변화입니다. 하나님께 고침을 받으면 예전처럼 살 수 없습니다. 죄를 붙잡고 살 수 없고, 자기 방식을 고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스스로 눈을 감고 귀를 닫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무지가 아니라 완악함입니다.
이때 우리는 반드시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제 마음을 부드럽게 하소서. 굳어진 심령을 깨뜨려 주소서.”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겔 36:26)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7)
Ⅴ. 그러므로 듣고 깨닫는 자가 가장 복된 사람입니다 (마 13:16–17)
이제 예수님은 분위기를 바꾸어 제자들에게 축복을 선포하십니다.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마 13:16) 여기서 말하는 ‘봄’과 ‘들음’은 육체 기능이 아니라 영적 인식입니다. 무리도 예수님을 눈으로 보았고 귀로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말하는 ‘보는 눈’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보는 눈이며, ‘듣는 귀’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는 귀입니다.
눈이 무엇을 봅니까? 예수님의 얼굴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고백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16:16) 귀가 무엇을 듣습니까? 설교 소리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듣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신앙의 발생점을 분명히 말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
믿음은 보는 데서 나지 않습니다. 감정의 고조에서만 나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내게 주시는 음성’으로 들리는 순간 믿음이 태어납니다. 그래서 이 눈과 이 귀가 열리는 것이 복입니다. 길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를 놓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복은 지식의 결과가 아니라 은혜의 역사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일을 보십시오.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눅 24:45) 주님은 먼저 설명하지 않으시고 먼저 마음을 여셨습니다. 마음이 닫혀 있으면 아무리 설명해도 들리지 않고, 마음이 열리면 한마디만 들어도 깨달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은 머리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이며, 공부의 결과가 아니라 은혜의 선물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제자들의 시대적 복을 선포하십니다.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마 13:17) 선지자들이 멀리서 바라보던 메시아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언으로만 기다리던 복음을 우리는 예배 때마다 듣습니다. 성경을 손에 들고, 예수의 이름을 알고, 복음을 들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특권입니다. 그러므로 이 복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말씀이 들리는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그래서 우리는 시편 기자처럼 날마다 기도해야 합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시 119:18)
결론
주님, 제 귀를 여소서—듣는 귀가 곧 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은 분명히 말합니다. 듣는 자가 사는 자입니다. 듣는 자가 순종하는 자입니다. 듣는 자가 천국을 소유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는 어디에 서 있느냐”를 묻고 계십니다. 군중처럼 멀리 서 있는가, 제자처럼 가까이 나아오는가. 흘려듣는가, 붙드는가. 익숙함에 굳어지는가, 은혜로 부드러워지는가.
오늘 예배가 끝날 때, 우리는 이렇게 기도하며 일어서야 합니다. 찬송가 366장의 가사처럼 “주님, 제 마음을 여소서. 제 귀를 여소서. 오늘 제게 하시는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게 하소서.” 그때 비로소 같은 예배가 다른 결과를 낳을 것이고, 같은 말씀이 우리 삶을 새롭게 할 것입니다.
마무리 기도
주님, 오늘도 말씀 앞에 서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익숙함으로 귀가 닫히지 않게 하시고, 완악함으로 마음이 굳어지지 않게 하소서. 주께서 우리의 귀를 여셔서 거역하지 않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소서. 들은 말씀을 흘려보내지 않고 붙들게 하시며, 작은 순종을 시작할 때 더 큰 은혜를 맡기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소서. 무엇보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보는 눈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귀를 우리에게 허락하셔서, 군중이 아니라 제자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최원호 목사 (서울 상봉동 은혜제일교회)













![[이미지 묵상]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https://missionews.co.kr/data/images/full/14265/5-17.jpg?w=196&h=128&l=50&t=40)
![[이미지 묵상]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 9:27)](https://missionews.co.kr/data/images/full/14264/9-27.jpg?w=196&h=128&l=50&t=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