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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민 전 대표는 1962년 자강도 희천시에서 북한의 유명 시인 김순석의 아들로 출생, 김형직사범대 어문학부를 졸업하고 북한군 예술선전대에서 작가로 활동했다. 1995년 탈북 후, 중국 공안에 붙잡혀 북한에 넘겨졌으나 평양행 열차에서 뛰어내려 재탈북하는 우여곡절 끝에 1999년 한국에 입국했다.
2004년 국내 첫 민간 대북방송인 자유북한방송을 인터넷방송으로 세웠고, 1년 후 단파방송으로 북한에 송출을 시작했다. 2005~2006년에는 탈북자동지회장으로도 활동했다. 2005년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2007년 자유문학에서 등단한 시인으로, 작년 6월에 자전적 시집 ‘병사의 자서전’을 펴내기도 했다.
2008년 프랑스 국경 없는 기자회의 ‘올해의 매체상’, 2009년 대만 민주주의기금 ‘아시아 민주인권상’을 받았고, 2024년 국민훈장 동백상을 수상해 탈북민으로서는 최초로 탈북민 정착 지원 공로로 훈장을 받았다.
2017년 뇌종양 판정 이후 호전되었으나, 암이 재발해 7년간의 투병 끝에 별세했다. 고인의 유해는 14일 북한이 보이는 인천 광화문 월곶리 공설 묘지에 안장됐다.
북한동포직접돕기운동 이민복 대표는 “가슴 아프다. 나는 박성렬 30살 탈북청년의 암 사망 (이후), 김성민 불사조처럼 인생의 하루하루를 살자고 했는데, 그 정신을 이어받아 앞으로도 매진할 것”이라며 “그가 나에게 살아서 있도록 할 것”이라고 안타까움을 전했다. 이어 “2004년 김성민은 최초로 대북방송, 저는 최초로 대북풍선으로 전단을 날린 탈북자로서 개척한 진정한 동지였다”고 추모했다.
앞서 이민복 대표는 올해 2월 박성렬 군이 간암 4기로 투병하다 별세한 이후 “30살 탈북청년은 모든 걸 감사하다 못해 죽음까지도 감사함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탈북자를 이번에 두 번째로 본다”며 “첫째가 김성민 대표이고, 다음 이 청년”이라고 말한 바 있다.
북한 주민들의 인권을 위해 김 전 대표와 오랜 기간 동역해 온 수잰 숄티 디펜스포럼 재단 대표도 타 매체를 통해 “김 대표는 (암 판정 이후) 지난 7년 동안 쇠약해지면서도 북한 자유, 투쟁을 위한 열정을 잃지 않았다”며 “내가 아는 가장 용감하고 헌신적인 자유 투사였다”고 말했다.
전 북한 외교관으로 탈북민 최초 지역구 국회의원을 지낸 태영호 전 민주평통 사무처장은 “통일을 향한 길에 큰 별이 하나 떨어졌다”, 역시 탈북민 출신 지성호 전 의원은 “고인의 삶은 북한 인권에 대한 헌신 그 자체였다”고 추모했다. 박상학 자유북한운동연합 대표는 “20년 넘게 이어온 인연 속에서 가장 존경하는 형”이라고 말했고, 탈북민들은 결혼식 주례를 수십 차례 선 김성민 전 대표를 ‘아버지’라고 말했다. 허광일 북한민주화위원회 위원장은 “김 전 대표가 꿈꾸고 지켜온 민주와 자유의 길을 남은 사람이 끝까지 이어갈 것”이라고 타 매체를 통해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