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성찬 선교사
▲권성찬 선교사
새해에 주 안에서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2024년은 뭔가 매듭이 안 맺어진 채로, 게다가 연말에 있었던 큰 사고로 인해  새해 인사가 참 어렵습니다. 모든 곳에 주님의 위로가 간절히 필요한 상황에서 새해를 맞았습니다.

새해부터 어려운 질문을 해봅니다. ‘왜 선교일까요?’ 누가복음 끝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오신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눅 24:46)인데 이를 예수님의 구속적 사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두 번째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눅24:47), 즉 예수님의 선교적 사명입니다.

구속적 사명은 우리가 알다시피 사람이 보탤 것도, 보탤 수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루실 수 있는 사명이고 주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사명인 선교적 사명에 대해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 24:48)고 말씀하시며 우리가 참여하도록 초대하십니다.

그럼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구속적 사명은 우리의 도움 없이 이루셨는데 선교적 사명은 우리의 도움이 없이는 이루실 수 없는 사명인가? 그리하여 증인된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것인가? 보혜사 성령께서 가끔 중동 지역에서 역사하시듯이 각 사람의 꿈에 나타나셔서, 혹은 환상을 통해 복음을 전하시면 지금 당장 세상 곳곳에 동시에 복음을 전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도대체 왜 증인이 필요한가? 왜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가? 왜 선교사가 필요한가? 라는 연속적인 질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적 사명이 사람의 도움이 없다고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아니라면, 오히려 우리 없이 성삼위 하나님께서 신적 능력을 사용하여 이루시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고 훨씬 덜 성가신 것임을 동의한다면, 선교로 우리를 초대하신 것은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해져야 한다는 대명제 속에 좀 더 깊게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 의미를 두고두고 성찰해야겠지만 결국 하나님의 마음을, 하나님의 진리를,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알아가는 여정에 우리를 초대하신 것이고, 그 여정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닮은 인격으로 변해가는 것이 목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창조하실 때 계획하셨던 그 목적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교의 도구가 아니라 선교를 통해 그 선교에 참여하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빚어가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이 도구로는, 과업으로는, 효율로는 도무지 설명되지 않는 많은 의문에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큰 민족을 이루기 위해 이삭을 주시고는 갑자기 죽이라 하시는 말씀 앞에 서 있는 아브라함의 의문, 선교지에서 오랜 헌신을 통해 여러 아이를 교육했지만 결국 모두 떠나 버리고 가장 어리고 가장 약했던 아이 하나가 남아, 어리지만 유일했던 성경번역자가 된 기쁨도 잠시, 결국 그 어린 동역자를 갑자기 잃은 선교사의 의문, 심장병을 가지고 갓 태어난 국내 이주민의 아이, 그 아이를 살리고자 수많은 눈물과 10억이 넘는 모금을 통해 겨우 살려내고 감사의 마음과 함께 본국으로 돌려보냈는데, 얼마 안 되어 아이가 소천했다는 소식을 들은 국내 이주민 선교사의 의문, 오늘도 묻게 되는 이 수많은 의문에 실마리를 제공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올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우리의 사역에 일어날 것이 분명합니다. 더 멀리 보기 위해 한 층을 더 오르겠다는 옛시조를 인용하며 새해 인사를 마칩니다. 평생을 천주가사 연구를 위해 헌신해 오신 규운 하성래 선생님의 방에 이 한시가 걸려 있었습니다. 중국 당나라 시인 왕지환(王之渙)의 시 등관작루(登鸛雀樓)입니다. 지난주 뵈었던 노학자의 방에 걸려 있던 한시입니다.

白日依山盡(백일의산진) 해는 산 너머 지고
黃河入海流(황하입해류) 강은 바다로 흐른다
欲窮千里目(욕궁천리목) 더 멀리 보고자
更上一層樓(갱상일층루) 한 층 더 오른다

GMF 대표 권성찬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