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 베이올루
▲이스탄불 베이올루
기어코 마지막 달이 왔습니다. 2023년 한 해를 잘 마무리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가끔 해외 출장이 생기면 지루한 비행시간을 견디느라 좋아하는 책을 잡는데, 요즘은 튀르키예 작가인 오르한 파묵의 책을 주로 봅니다. 얼마 전 출장길에 읽었던 ‘검은 책’이라는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 중 하나가 마음속에 남아 나누어 봅니다.

옛날 튀르키예에 마네킹을 잘 만드는 ‘베디’라는 이름의 장인이 있었습니다. 박물관에 외세를 물리친 튀르키예 장수들을 만들었는데, 그것을 본 사람들은 너무나 실제 사람과 똑같아서 놀랐습니다. 재료도 재료지만, 베디의 비법은 사람들의 제스처를 관찰하는 것이었습니다. 각 문화에는 고유한 표정과 제스처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외국에 나가 중국인, 일본인과 한국인을 구별하는 것도 그 얼굴에 나타난 표정, 그리고 제스처 등을 통해 알게 되니까요. 베디가 만든 마네킹의 표정과 제스처는 튀르키예인들의 일상에서만 볼 수 있는 고유한 것이고, 그것을 잘 표현했기에 사람들이 아주 놀란 것입니다. 

하지만 종교 지도자들은 이렇게 사람과 똑같은 마네킹은 신과 경쟁하는 것과 다름없다며 마네킹을 치우고 대신 허수아비를 세우도록 했습니다. 그럼에도 베디의 열정은 식지 않았고 지하에 작업실을 만들어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그 정교한 작업들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오스만 제국이 무너지고 공화국이 세워지면서 튀르키예에는 서구화의 물결이 밀려들어왔습니다. 우리의 명동쯤에 해당하는 이스탄불 베이올루에는 쇼핑 거리가 생겼고, 유명한 옷 가게에는 베디의 눈에 보기에 아주 허접한 서구 마네킹들이 옷을 걸치고 서 있었습니다.

베디는 드디어 ‘승리의 날’이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만든 마네킹에 비하면 그 외국 사람의 모습을 한 마네킹들은 비교가 안 되었으니까요. 샘플을 가지고 가서 가게 주인들에게 보여 주면 기가 막히다고 좋아할 줄로 기대했는데, 예상과 달리 가게 주인들 모두가 거절했습니다. 이유는 어이없게도 서양 모델이 아니라 튀르키예 사람을 아주 꼭 닮은 마네킹이었기 때문입니다. 옷을 사러 오는 사람들은 자기와 같은 사람들이 입고 있는 외투가 아니라, 새롭고 하얗고 소위 ‘아름다운’ 사람들이 입고 있는 외투를 원하기 때문이었죠. 장사가 잘되기 위해서는 ‘진짜 튀르키예인’과 같은 마네킹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잡화상을 하는 사람이 헐값에 베디의 마네킹 두 개를 사 갔다고 합니다. 잡화상이니까요. 그래도 몇 사람은 그것을 찾을 사람이 있을 줄 알았던 거죠. 그런데 얼마 지나서 그 잡화상 주인 역시 베디의 마네킹들이 너무나 ‘우리 중 한 사람’ 같아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결국 그 주인은 장갑, 신발 등을 진열하기 위해 베디가 만든 마네킹의 손을 자르고 발을 잘라 사용했다고 합니다. 베디의 마네킹이 가진 고유한 특성, 즉 그 표정과 제스처는 다 사라지고 실용성만 남은 셈입니다. 이것을 읽으면서 자동차 왕 헨리 포드가 했다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자동차를 조립하는 산업화 시대에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효용성으로 보는 관점을 대변하는 섬뜩한 말이죠. “내가 필요한 것은 사람의 두 손뿐인데 왜 머리까지 달려오는지 모르겠다.”

베디는 아들의 입을 통해 이런 말을 우리에게 남깁니다. “아버지는 우리를 우리이게 만드는 제스처에 무엇보다도 먼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언젠가는 진열장에 자신의 마네킹이 놓일 거라고 확신했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언젠가는 다른 사람을 모방하지 않을 만큼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는 희망 역시 한 번도 버린 적이 없어요!” 베디의 이 희망이 우리의 희망, 그리고 여러분들이 섬기는 공동체의 희망이 되기를, 그리고 꼭 이루어지기를 소망해 봅니다. 한 해 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샬롬.

권성찬 한국해외선교회(GMF)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