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제: 저자 피터스는 대영성서공회 한국 총무를 맡고 있던 켄뮤어와 함께 1899년 2월 18일 제물포를 떠나 켈파트(제주) 섬으로 출발했다. 그들의 제주도 방문 기간은 1899년 2월 23일부터 3월 하순까지였으며 서울 귀경 날짜는 3월 25일이었다. 기독일보에서는 2021년 6월부터 7월까지 4회에 걸쳐 ‘피터스의 제주도 탐방기’라는 제목으로 그의 탐방 일기를 연재해 소개한 바 있다. 여기에 소개하는 피터스의 글은 그가 제주 탐방 여행에서 돌아와 여행 소감을 쓴 것이다.

개신교 최초 피터스 선교사 제주도 탐방 후기 Ⅰ

작은 뗏목(테우)과 돛배 추자도 산양리로 추정
▲작은 뗏목(테우)과 돛배 추자도 산양리로 추정 ⓒ제주도청

모든 마을은 해안가를 따라 살면서 곡식을 키우거나, 감자가 잘 자라는 산자락, 그리고 산기슭 측면을 따라 살고 있다. 해안과 산기슭 사이의 지대엔 사람들이 살지 않고, 비옥한 토양이 길게 펼쳐져 있지만, 경작은 되지 않은 상태로 있다. 성읍과 더 큰 마을 근처에 있는 숲과 들판에는 소유자가 있다. 섬의 나머지 땅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므로, 그 누구나 와서 나무를 베거나 땅을 경작할 수 있다. 한 사람이 10~15마일(16~24km)을 소에 싣고 가야 하는 장작짐은 성읍에서 12센트에 팔린다. 섬에서 기른 곡물 중 조(millet)가 1위를 차지하며, 이것이 식생활의 주요 품목이다. 쌀은 사치품이며 성읍의 부유한 사람들만 먹을 수 있다. 시골에 사는 사람들은 그것을 결코 먹을 수 없다. 해안을 따라 몇 군데만 논이 있을 뿐이라 논이 매우 부족하다. 따라서 섬에는 소량의 쌀만 유통되고, 그것들 대부분은 본토에서 유입된 것이다.

조, 쌀, 감자 이외에 사람들은 보리, 메밀, 콩, 고구마, 담배, 야채, 그리고 기타 자잘한 몇 가지 곡물들을 가꾼다. 그곳에서 자라는 과일은 복숭아, 감귤, 하귤이 있는데 이것들은 이 땅에 자라는 유일한 것들이다.

섬사람들은 본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동물성 음식이 드물어 거의 못 먹는다. 동물성 음식으로는 소고기, 말고기, 개고기, 돼지고기, 사냥 동물, 생선, 전복 등이 있다. 그리고 한반도 남해안과 서해안에 매우 풍부한 게, 굴, 여러 종류의 조개류는 제주 섬의 해역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바다 바닥이 온통 바위로 깔려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은 거의 없다. 그러니 그물 조업이 행해지고, 물고기들 역시 낚시를 통해서나 잡힌다.

물 위의 해녀들
▲물 위의 해녀들 ⓒ제주도청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갈 때 사람들은 일반적인 배를 이용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사람들은 작은 통나무 위에 노가 고정된 플랫폼이 있는 약 10개의 짧은 통나무로 만든 작은 뗏목(테우)을 타고 나간다. 줄을 고정하기 위해 육지 어부들은 8인치(20cm)도 안 되는 가늘고 작은 테두리의 나무를 사용하는 반면, 제주섬 어부들은 약 12피트(3.6m)에 달하는 대나무로 된 정식 대를 사용한다. 물고기, 조개류의 부족은 섬에서 이용하고 채취되는 풍부한 전복과 해초로 공급된다.

전복은 매우 큰데 어떤 것은 직경이 10인치(25cm)에 달할 정도로 매우 크고 살이 매우 통통하다. 다른 조개들과 달리 전복은 껍데기가 하나뿐이어서 이 껍데기는 종종 조선인들 사이에 재떨이로 사용되기도 하고, 자개의 원료가 된다. 마치 지붕과 같은 껍데기로 감싸인 전복들은 바위에 붙어서 살고 있다. 그 살점은 매우 귀한 고급 요리로 여겨지며, 섬에서 전복 한 개에 6센트나 한다. 그러나 전복에서 진주를 발견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수출하기 위해 전복들은 껍데기에서 떼어내어 창자 주머니를 잘라내고 살점만 깨끗이 씻고 말린 다음 가는 막대에 매달아 놓는다.

신선할 때는 하얀 색상을 띠지만, 말리는 사이 그것은 말린 살구의 속살과 같은 검붉은 색으로 변한다. 그것들은 서울의 토종 식료품점에 진열된 것을 볼 수 있는데, 직경 약 4~5인치(10cm) 되는 붉고 납작한 원반 모양의 살점을 가는 막대기에 수십 개 고정한 것이다.

물구덕을 지고 있는 제주 여인들
▲물구덕을 지고 있는 제주 여인들 ⓒ제주도청

해초류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어떤 종류는 풍부해서 비료로 사용되고, 일부는 식품으로, 또 다른 종류는 소다 탄산염을 만들기 위해 일본인들에게 팔린다. 첫 번째 종류는 얕은 해안가에서 채취하지만, 다른 두 종류는 바다 밑바닥에서 채취해 얻을 수 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전복 따기 뿐만 아니라 해초 조업은 전적으로 여성들의 몫이다. 일종의 수영복(물소중이)을 입고, 한 손에 낫을 들고 망사리에 딸린 박(테왁)을 앞세워 그들은 해안가를 헤엄쳐 빠져나가 반 마일(800m) 정도 더 깊은 바다까지 나간다. 배를 가질 형편이 못되어, 그들은 스스로 헤엄쳐 나가 수심 40~50피트(12~15m) 속으로 잠수하여 낫으로 해초를 베거나 전복을 발견하면 바위틈에서 그것들을 따서 망사리 안으로 집어넣는다. 망사리는 수면에 둥둥 뜬 박(테왁)과 연결되어 있어 안심하고 넣는다. 그들은 종종 30분 이상 걸리는 망사리가 다 채워지기 전에는 뭍으로 나오지 않는다. 아무리 그녀들이 훌륭한 수영 선수일지라도, 그들의 작업이 빠르면 2월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할 때, 그들의 지구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에 잠수 기구를 구비한 일본인들이 제주 섬에 와서 모든 전복을 다 따가지고 가버린 일이 발생하고 있어 가난한 여인들은 오직 해초를 따면서 위안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6) 이곳 관원들에 의하면, 일본인들은 전복을 따면서 그 어떤 허가권도 요청하지 않았고, 전복값도 지급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약한 조선인들에게 부담을 가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제주 섬 여성들은 해초와 전복을 위해 잠수할 뿐만 아니라 모든 노동의 가장 막대한 부분도 감당하고 있다. 심지어 그녀들은 곡물을 소 등에 얹어 읍내 시장으로 가서 팔기도 한다. 물을 나르는 일도 전적으로 여자들이 하는데, 여자들은 물을 길으러 먼 거리를 가야 하는 경우가 많다. 물을 나르기 위해 그들은 바구니에 놓인 넓고 낮은 물 항아리를 바구니(물 구덕) 안에 넣고 나른다. 이는 그 바구니(물 구덕)를 양어깨에다 끈을 둘러 등에 짊어진 후 나른다. 나는 조선 그 어디에서도 이렇게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 내륙에서 여성들이 등에 무언가를 지고 운반한다는 것은 매우 볼썽사나운 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우리와 같이 있었던 조선인들이 말하기를, 만일 육지에서 남자가 그의 부인에게 그렇게 시킨다면, 그는 마을에서 쫓겨날 것이라 말했다. 섬에서 광범위하게 제작되는 특유의 모자들, 머리띠, 그리고 두개모(頭蓋帽)들 또한 대부분 여성에 의해 만들어진다.

제주 초가집과 세콜방애를 찧고 있는 여인들
▲제주 초가집과 세콜방애를 찧고 있는 여인들 ⓒ제주도청

사실, 제주 섬의 여성들은 조선의 아마존 여인들이라 불릴만하다. 그들은 모든 일을 할 뿐만 아니라, 수적으로도 남자를 훨씬 능가하며, 거리에서 한 남자를 만날 때 여자는 3명 만난다. 그 이유는 많은 남자가 배를 타고 멀리 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곳 여성들은 더욱 강건하고 육지 여성들보다 더 튼튼해 보인다. 한편, 거의 모든 일을 여성들이 하므로 남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빈둥거리며, 여자들이 잘한다고 칭찬하는 것 외에는 아무 할 일이 없다. 간혹 예외적이지만 여기저기 상점 안에서 남자가 입에 파이프를 물고 상점을 보고 있는데, 이처럼 어떤 일을 하는 남자를 찾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 집안 형편이 좋다는 것은 아니다. 모든 섬사람 살림 형편이 현저하게 가난한 것처럼 거기서 거기다. 음식은 물론, 옷과 집들 모두 육지의 것들에 비하면 훨씬 열악하다.

개가죽은 의류를 만드는 데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찻잔 모양의 모자, 외투, 중국인들 사이에 착용하는 각반, 버선들은 모두 개가죽으로 만들어진다. 더 따뜻할 수 있도록 이때 개털 부분은 그대로 밖으로 보이게 한다. 이러한 일련의 옷들은 대대손손 물려내려 와서 그런지 그 냄새가 유쾌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남성용 바지와 셔츠뿐만 아니라 여성용 의류들은 천연 또는 인공 염색을 한 옷감으로 만들어졌다. 옷감을 더욱 질기게 하기 위해 그들은 일종의 땡감과 같은 것을 압착해서 얻은 진액에 옷감을 담근다. 이 공정에서 만들어진 옷 색깔은 진한 갈색으로 세탁의 수고로움을 덜어준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옷을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입는다. 개가죽 모자 외에도 남성들은 또한 서울에 있는 막노동꾼들이 착용하는 것과 똑같은 펠트 모자를 쓰기도 하는데, 이 펠트 모자는 직경이 2피트(60cm) 이상으로 챙이 훨씬 더 크다. 의복에 관한 한 가지 예외는 고관대작들(magistracies)의 것인데, 그들은 내륙에 있는 사람들과 같이 흰 두루마기와 검은 갓을 착용하고 있다.

1914년 제주성 내 관덕정 광장 오일장 풍경
▲1914년 제주성 내 관덕정 광장 오일장 풍경 ⓒ제주기록문화연구소 하간

집들은 사방 6피트(약 1평) 정도의 방 1개와 개방형 부엌으로 구성되어 있다. 방의 벽, 천장, 방바닥은 노출되어 있고 바닥에는 난방을 위한 굴뚝이 없다. 대신에 부엌 바닥으로 큰 구멍이 뚫려 있고, 추운 날씨에는 그 주변에 밤낮으로 불을 지피고 있다. 이 아궁이 불 주위에서 그들은 먹고, 일하고, 잠을 잔다. 이것은 집이 본토와 거의 같은 성 읍내의 집들과 다른 점이다. 성 읍내의 집들은 본토의 집들과 매우 유사하다. 약간의 예외가 있지만 모든 집은 초가집들이다. 강한 바람 때문에 초가집은 두께 2인치(5cm)로 꼰 새끼줄이 8인치(20cm) 간격을 이루며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자체적으로 만든 생산품 이외에 다른 것에 대한 요구는 너무 적어서 적은 수의 상점에서 모든 것을 공급하는 것 같다. 섬의 수도인 제주(Chai-Joo) 섬에는 8개의 작은 상점이 있다. 대정군에 하나, 정의군에도 아마 하나일 것이다. 이것은 섬 전체를 통틀어 거의 유일한 상점들이며, 사람들은 이를 통해서 옷감, 염료, 실, 바늘, 못 등과 같은 필요한 몇 가지 외국 상품을 손에 얻고 있다. 본토의 모든 도시와 많은 마을에서 5일마다 매번 열리는 장날 시장7)은 그 어디에도 없고, 모든 상거래 역시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제주 섬에서 수출되는 품목은 전복, 해초, 천연 약재, 화장용 오일, 말 및 생가죽, 말과 소이다. 화장용 오일은 Datura Strawmium8), 즉 조선 사람들이 ‘동백’이라 부르는 열매의 씨앗을 짜서 만들어진 것이다. 동백나무는 섬 남부 지역에서 많이 자란다. 이 나무는 상록수이며 2월에 아름다운 진홍색 꽃망울을 터트린다. 본토에는 이 나무가 매우 드물다. <계속>

[미주]
6) 당시 일본 어부들의 행패에 대해 1898년~1901년까지 제주섬에 유배되어 있던 김윤식은 그의 일기 『속음청사(續陰晴史)』 1899년 6월 30일 자에 이렇게 기술했다. “산저포(山底浦)에 닿았더니 일본 사람들의 삼판어선 12척이 닻줄을 내리고 서로 연결하여 정박하고 있었다. 배마다 잠수부 옷 2, 3벌씩 걸려있는데, 잠수부 옷은 온몸을 감싸도록 하고 유리로 두 눈을 만들었는데, 끝없이 깊은 곳에 들어가서는 평행으로 거침없이 걸어 다니며 마음대로 전복을 잡는다. 이 섬사람들은 이 때문에 일거리를 잃었지만, 역시 그 방법을 배울 수가 없으니, 앉아서 슬픈 탄식만 할 뿐인지라 참 한탄스럽다.”
7) 제주시 민속시장은 1906년 주성장(성안장)에서부터 시작하여 현재까지 그 명맥을 이어왔다.
8) 원본에는 동백을 ‘Datura Strawmium’이라 했는데 동백나무의 옛 이름 산다화(山茶花), 영문은 ‘Camellia Japonica’이다.

리진만 선교사
▲리진만 선교사
역자: 리진만(우간다·인도네시아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