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스 선교사의 대학 졸업 사진
▲피터스 선교사의 대학 졸업 사진

저자: 알렉산더 A. 피터스(Alexander Albert Pieters, 1871~1958, 彼得)

출처: 1. 1899년 피터스에 의해 기록된 제주 방문 일기 원본, UTS, Burke Library Archive
2. 『The Korean Repository』, A Visit To Quelpart, Vol. 1, No. 11, 12, April, 1899

제주 탐방 일기를 기록한 피터스 선교사의 자필 일기 원본
▲제주 탐방 일기를 기록한 피터스 선교사의 자필 일기 원본 ⓒUTS, Burke Library Archive

해제: 저자 피터스는 대영성서공회 한국 총무를 맡고 있던 켄뮤어와 함께 1899년 2월 18일 제물포를 떠나 켈파트(제주) 섬으로 출발했다. 그들은 목포에서 2월 22일 2시간 항해 후 풍랑 때문에 출발항으로 귀항해 그날 밤 12시에 증기선인 창룡선(蒼龍船)을 타고 다시 출발했다. 제주 해변에 2월 23일1) 정오에 도착했다. 그들의 제주도 방문 기간은 1899년 2월 23일부터 3월 하순까지였으며 서울 귀경 날짜는 3월 25일이었다.

기독일보에서는 2021년 6월부터 7월까지 4회에 걸쳐 ‘피터스의 제주도 탐방기’라는 제목으로 그의 탐방 일기를 연재해 소개한 바 있다. 여기에 소개하는 피터스의 글은 그가 제주 탐방 여행에서 돌아와 여행 소감을 쓴 것이다. 1899년 발행된 『the Korean Repository』 (이하 『리포지터리』) No. 10에 실린 제주 탐방 일기의 후기 성격의 글로써 같은 주간신문 『리포지터리』 No. 11(1899. 4. 20.)과 No. 12(1899. 4. 27.)에 전문이 실려 있다.

피터스의 제주 탐방 후기가 처음 실린 코리안 리포지터리(『The Korean Repository』, Vol. 1. No. 11., April 20, 1899)
▲피터스의 제주 탐방 후기가 처음 실린 코리안 리포지터리(『The Korean Repository』, Vol. 1. No. 11., April 20, 1899) ⓒ연세대 학술정보원
피터스의 제주 탐방 후기 원본은 현재 UTS, Burke Library Archive, Missionary Research Library Archives: Section 8에, Henry Gerhard Appenzeller Papers, 1883~1902 자료에 포함되어 있다.

피터스 연구자들을 위해 좀 더 정보를 소개하자면 금번 소개하는 피터스의 후기는 『The Korea Review』, A Visit To Quelpart, Vol. 5. No. 5~6 / May and June, 1905.에서도 같은 제목으로 영문으로 소개한 바 있다.

피터스 선교사와 함께 제주를 탐방한 대영성서공회 총무 켄뮤어는 힘든 여행에서 돌아와 채 일주일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짤막한 제주 탐방 보고 기사를 『The Bible Society Reporter』에 보냈는데, 이는 1899년 7월호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피터스의 제주 탐방 후기가 두 번째로 실린 코리아 리뷰(『The Korea Review』, Vol. 5. No. 5., May, 1905)
▲피터스의 제주 탐방 후기가 두 번째로 실린 코리아 리뷰(『The Korea Review』, Vol. 5. No. 5., May, 1905) ⓒ감신대 도서관
“피터스와 나는 대한국 남쪽에 있는 작은 섬 제주(Quelpaert)를 향해 이곳을 2월 18일 출발해 4주간 섬에 머물고 3월 25일 돌아왔습니다. 이번 여행은 힘들었고, 이전에 어느 외국 선교사도 가본 적이 없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대영성서공회는 한 지역을 더 개척한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제주 섬에는 항구 시설, 도로, 상점, 여관 등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돌아오며 그 섬에 많지는 않지만 60~70권의 복음서를 두고 왔기에, 이를 통해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치유되고 빛을 가져다줄 수 있을 만하겠다고 생각합니다.(서울에서, 1899년 3월 30일)”

알렉산더 켄뮤어(Alexander Kenmure)
▲알렉산더 켄뮤어(Alexander Kenmure) ⓒKorean Bible Society
피터스는 대한국에 1895년 미국성서공회의 매서인으로 처음 도착했고, 히브리어 원전을 잘 읽을 수 있던 그는 한국에 온 지 불과 2년 2개월이 지난 때 시편을 한국어로 번역하기 시작해 불과 8개월 만에 62편의 시편을 번역해 1898년 『시편촬요』를 출간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주도하는 번역위원회의 관심을 받게 되었고 1898년에는 대영성서공회 매서인 겸 부총무로 임명되어 선교 초기 성경반포 사업의 개척자가 되었다. 그는 1899년 9월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 시카고로 건너가 매코믹대학에서 신학 공부를 마치고 북장로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필리핀 세부에 파송을 받아 선교를 하던 피터스는 아내 캠벨의 건강 문제로 파송 1년 후 대한국으로 선교지를 바꿔 1904년 9월 13일 대한국에 다시 오게 되었다. 드디어 1906년 10월 3일 크램(Willard Gliden Cram) 선교사와 함께 공인번역위원회 번역위원으로 선임되어 1910년 공인번역위원회가 구약 한글 번역을 마치는 데 커다란 공헌을 하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피터스는 17편의 찬송가 가사를 작사해, 우리는 『새찬송가』 75장, 363장, 383장에서 그가 작사한 찬송가를 부르고 있다.

피터스 선교사의 선교사 지원서 ⓒ감신대 도서관 ⑥알렉산더 켄뮤어(Alexander Kenmure)
▲피터스 선교사의 선교사 지원서 ⓒ감신대 도서관 ⑥알렉산더 켄뮤어(Alexander Kenmure) ⓒKorean Bible Society
1941년 은퇴하여 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한국인들이 복음을 접할 수 있도록 성경 반포와 성경 번역의 핵심적인 선교사역을 담당했다. 이뿐만 아니라 피터스 선교사는 한국교회에 수많은 교회를 설립할 수 있도록 토대를 닦았던 고마운 선교사로 우리가 오랫동안 기억해야 할 것이다.

피터스 선교사의 제주도 탐방 후기

켈파트(Quelpart)2) 섬, 또는 그리피스 박사(Dr. Griffis)가 한국에 관한 그의 저서에서 그 섬을 한국의 시칠리아라고 부르거나, 한국인들이 부르는 제주 섬은 한반도에서 가장 큰 섬이며 한반도 남단에 있고 육지와는 약 50마일(80km) 정도 떨어져 있다. 섬은 타원형 모양이며, 중심에서 가장 먼 두 지점 간의 직선거리는 40마일(64km), 중심을 잇는 두 지점 간의 최단 거리는 17마일(27km)이다. 북쪽에서부터 그 섬으로 점차 접근하다 20마일(32km) 떨어진 지점에 이르면, 그것은 마치 이등변 삼각형처럼 보인다. 양변은 약 17도의 각도로 상승하다 정상 근처에서만 약간 가파르게 변한다. 이는 서울 북문3)에서 남산을 봤을 때와 같다. 섬은 오클랜드 산기슭 또는 한라산이 서 있는 중앙을 향해 해안가로부터 중심을 향해 완만하게 점차 솟아있다.

19세기 유럽인들이 불렀던 제주 섬의 지명
▲19세기 유럽인들이 불렀던 제주 섬의 지명 ⓒBelcher’s 1845 Survey

섬 전역에 흩어져 있는 작은 기생화산들은 6,558피트(1,998m)4) 높이로 솟아오른 구름 낀 한라산 정상 앞에서는 매우 미미해 보인다. 섬의 기원은 확실히 화산이며, 산은 아마도 사화산일 가능성이 높다. 용암은 북쪽과 남남 서쪽을 향해 흘렀고, 첫 번째 용암류는 섬의 해안가를 따라 약 20마일(32km) 퍼져있고, 두 번째 남남서쪽으로 흐른 용암류는 해안가를 따라 약 30마일(48km)이었다. 따라서 용암은 섬 전체 면적의 2/5를 덮었다. 이 부분은 돌이 매우 많아 경작하기가 어렵다. 그 수많은 돌을 밭에서 치우는데 엄청난 노동력이 투입되었을 것임이 틀림없다. 대개 1에이커(1,224평)의 들판에 8~10피트(2.4~3m)의 돌 더미가 4~5개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돌들을 처리할 또 다른 방도는 밭과 밭, 밭담을 쌓는 일이다. 그래서인지 올망졸망한 오름 중 한 곳에서 바라본 모든 땅은 거대하고 불규칙한 거미줄이 덮여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었다, 섬의 나머지 3/5은 거의 돌이 없고, 토양은 검고 비옥하다. 산은 동쪽과 서쪽을 향해서 완만한 경사를 이루다가 남쪽, 특히 북쪽으로는 갈수록 갑자기 깊은 계곡을 이루며 급격하게 내려온다.

산 정상에는 작고 둥근 호수가 있다. 그리고 계곡 중 하나의 계곡 바닥에 또 다른 큰 호수가 있다. 처음의 것은 아마도 눈이 녹은 물로 채워진 오래된 분화구일 것이다. 우리는 산 정상의 얼음은 6월까지 그대로 있다고 들었지만, 섬의 기온은 너무 따뜻해서 겨우 내내 노지에서 양배추가 자란다. 2월 말경 우리가 그곳에 갔을 때, 어떤 곳의 풀은 4인치(20cm)에 달했고 남쪽 해안에는 꽃이 피었다. 그런데도 산의 1/3은 여전히 눈으로 덮여있어, 정상에 오르려는 모든 시도가 소용없게 되었다. 모든 산과 동쪽에 있는 오름은 울창한 떡갈나무 숲으로 덮여있다. 이들 숲에는 사슴, 멧돼지, 산토끼 및 기타 동물이 많이 있지만, 호랑이와 곰은 없다. 나무가 없는 오름들에는 한국 특유의 짧은 잔디로 덮여있어 고운 잔디밭을 이룬다. 제주 섬의 잔디는 본토 그 어떤 곳의 것보다 제주에서 훨씬 더 예쁘고 종종 잡초가 없고 마치 듬직한 벨벳 카펫으로 모두 덮인 것처럼 덮여있는 400~500제곱 야드(101~127평) 천연잔디를 볼 수 있다. 제주도 해안은 이렇다 할 항구도 대피소도 없고 온통 바위투성이이며 한반도 남해안과 서해안을 따라 오밀조밀 흩어져 있는 수많은 작은 섬들이 없다.

제주성 서쪽문 1910년 앤더슨 촬영이라 소개했는데, 앤더슨이 제주를 방문한 시기는 1905년이다.
▲제주성 서쪽문 1910년 앤더슨 촬영이라 소개했는데, 앤더슨이 제주를 방문한 시기는 1905년이다. ⓒ제주도청

끊임없는 강풍과 함께 대피소가 없기 때문에 항해가 매우 어렵다. 사람들은 이 섬에 개울과 샘이 없다는 사실에 놀란다. 섬 주변을 여행하면서 우리는 일주일 내내 비가 온 후 오직 2개의 작은 개울을 발견했다. 제주 성내에는 왕성하게 솟는 샘터가 몇 군데 있지만, 다른 두 현 관할의 지방에는 샘이나 우물이 없어 사람들은 인공 연못에 모인 빗물을 이용해야 한다. 산에 쌓인 눈 녹은 물이 어디로 가는지 기이한 일이다.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이 섬은 3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뉜다. 북쪽 해안은 제주목으로, 섬의 수도이며 목사(牧使)가 관할한다. 섬의 남서쪽 해안에는 대정군, 동쪽에는 정의군이 각각 있으며 이 3곳 모두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제주목은 1,200여 채의 집이 있고, 대정군엔 4백 채, 정의군엔 3백 채의 집이 있다. 제주목에서 대정까지 거리는 90리, 거기에서 정의까지는 130리, 정의에서 제주목까지는 70리이다. 민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섬은 전라도에 속해 있었다. 전쟁 후 바로 섬은 독립되었고, 다시 조선이 13도5)로 나뉘자, 제주섬은 전라남도 관찰사의 관할에 놓였다. 섬을 통틀어 100여 개의 마을과 10여만 명의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이 수치는 조선인들이 내놓은 것으로, 물론 확실하지 않을 수도 있다. <계속>

[미주]
1) 부정기선인 창룡선이 제주에 1899년 2월 23일 도착했다는 사실은 당시 제주에 유배되어 귀양살이를 하던 김윤식(金允植)의 『속음청사(續陰晴史)』에도 나와 있다. 1899년 2월 23일 일기에서 김윤식은 배가 도착했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바람이 고요하고 비가 그쳤다. 창룡선(蒼龍船)이 서울에서 돌아와서 집 아이가 보낸 편지를 받았다....”
2) 켈파트(Quelpaert, Quelpart) 명칭의 유래에 관해서 ‘켈파트’라는 용어가 무엇을 의미하고 제주도가 어떻게 그 이름을 얻게 되었는지에 관한 긍정적으로 입증된 문헌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여러 학자들의 추정이 있을 뿐이다.
3) 한양 도성의 북대문 숙정문(肅靖門)이다. 그러나 역자의 생각은 당시 숙정문이 항상 닫혀 있다 보니 동소문인 혜화문(惠化門)이 북대문의 역할까지 맡아 피터스는 이를 북문으로 칭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4) 당시 피터스는 한라산 높이를 1,998미터라고 했는데 현재 공식 높이는 1,950미터이다.
5) 건양 원년(고종 33년, 1896) 8월에 전국 23부를 13도로 개정하였는데, 이때 제주에는 목사를 두었다. 이리하여 제주섬에는 다시 제주목과 대정군, 정의군이 설치되어 전라도에 소속되었다.

리진만 선교사
▲리진만 선교사
역자: 리진만(우간다·인도네시아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