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리고성을 도는 이스라엘 백성들 상상도
▲여리고성을 도는 이스라엘 백성들 상상도 ⓒworldhistory.org

Ⅰ.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간 증거

학자와 고고학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갔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고 말해왔다. 많은 작가가 아마르나 서신(Amarna Letters)1)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간 사건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는 믿음을 표명했지만, 론(Ron Wyatt)2)은 동의하지 않았다. 편지를 취합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아마르나 가문이 죽으면서 끝났다.

아이(Ay)3), 아크나톤(Akhenaton)4) 및 호렘헤브(Horemheb)5)의 통치 기간 날짜가 표시된 비문이 정확하게 반영되면 아이는 4년의 임기가 늘어난다. 아크나톤은 17년, 호렘헤브는 14년(어떤 학자들은 이를 28년으로 주장한다)으로, 더해보면 이들의 총계는 35년이다. 이것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5년 전으로 날짜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러나 약속의 땅을 정복한 날짜를 앞당길 수 있는, 또는 뒤로 볼 수 있는 반년과 침묵의 세월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아이의 도입 이전에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논의되었던 시간에 설명되지 않은 시간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아마르나에 축적된 편지는 그의 가족이 죽으면서 끝이 났다. 그 결과 대부분의 학자와 고고학자는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에 들어가 그 땅을 정복했다는 성경 기록의 증거가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적어도 하나의 주요 사건에 대한 강력한 증거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성경의 진리에 대한 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의 논쟁은 여리고에서 증거를 검토할 때보다 더 명확하게 볼 수 없다. 그 이야기는 여호수아 6장에 나와 있다. 간단히 요약하면, 그 도시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어깨에 메고 여호수아 군대의 무장한 사람들과 함께 여리고 성을 돌았을 때 파괴되었다.

여리고성의 상상도
▲여리고성의 상상도 ⓒMary Nell Lee

여리고는 동쪽에서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지키는 요새 도성이었다. 다른 가나안 도성과 마찬가지로 강력한 가나안 이중 성벽 모양으로 지어졌다. 사해 바로 북쪽에 위치한 이곳은 해수면보다 670피트(약 204m) 아래에 있는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도성이기도 했다.

고대 도시의 유적은 파괴되었다. 벽이 바깥쪽으로 무너져 내렸다. 도시는 완전히 파괴된 대화재로 인해 검게 변했다. 발굴의 증거들은 성경 기록과 완전히 일치하는 풍부한 사실을 제공하고 있다.

Ⅱ. 여리고성의 발굴

여리고의 멸망은 큰 무리가 가나안에 들어간 첫 번째 사건이었다. 세 팀에 의해 발굴된 후, 그 발굴을 통해 밝혀진 진실을 위한 큰 논쟁이 이어졌다. 최초의 발굴은 1907년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고고학자 에른스트 셀린(Ernst Sellin)과 칼 바칭거(Carl Watzinger)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들의 초기 결론은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갈 당시 그 성은 점령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존 가스탕(John Garstang)은 1930년부터 1936년까지 발굴을 이끌었고 찰스 마스톤(Charles Marston) 경은 그 발굴 결과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고 그 내용을 문서화했다. 놀랍게도 그가 제시한 첫 번째 증거 중 하나인 토기 조각은 출애굽 날짜의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초기에 대부분의 학자는 가나안 진입 날짜가 BC 1220년경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호수아서의 정확성에 대한 이 증거는 도기 파편이 기원전 1400년경이라는 연대를 제공했다는 사실에 의해 가려졌다.” (New Bible Evidence From the 1925~1933 Excavations by Sir Charles Marston, p. 129)

여리고성의 융기된 둔덕 주변의 방파제 또는 성벽. 이 울타리 위에 첫 번째 벽이 있었다. 그 앞 성 외곽에는 성곽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마른 해자가 있었다.
▲여리고성의 융기된 둔덕 주변의 방파제 또는 성벽. 이 울타리 위에 첫 번째 벽이 있었다. 그 앞 성 외곽에는 성곽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마른 해자가 있었다. ⓒworldhistory.org

이 증거에서 정확한 날짜가 처음 결정되었고, 그들은 그 기간을 그 뒤로 여긴 것이다. 정말 놀라운 일이다. 고고학자들은 여리고가 정확히 여호수아가 성경에 묘사한 방식으로 파괴되었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원래의 작업을 무시해 왔다.

파괴된 날짜를 확인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1930년에 가스탕 교수와 그의 아내는 불타버린 도시의 지층에서 나온 6만 개 이상의 파편을 닦고 조사했다.

“이듬해(1931년) 발굴에서 또 다른 40,000개의 조각도 비슷한 방식으로 처리되었다. 그들은 모두 미케네 도자기6)가 전파되기 전 청동기 시대 중기(기원전 1400년)와 같은 연대임을 증명했다.” (Marston, 135p.)

고대 여리고를 둘러싼 성벽의 기본 구성도
▲고대 여리고를 둘러싼 성벽의 기본 구성도. 전형적인 가나안 설계이며 공격자로부터 견고한 보호를 제공한다. 두 번째 성벽의 높이는 도성이 완전히 파괴되고 그 성벽이 무너졌기 때문에 알 수 없지만, 지상에서 46피트(약 14.02m), 두께 12피트(약 3.66m)로 추정한다. 성벽과 집 사이의 영역이 있고, 그다음 첫 번째 성벽인 흙벽돌 벽은 높이 20~26피트(약 6.09~7.92m), 두께 6피트(약 1.83m)로 추정한다. 옹벽은 높이 12~15피트(약 3.66~4.57m)이고, 그 앞 기반암에 파인 9피트(약 2.74m) 길이의 물이 없는 해자가 있었다. ⓒMary Nell Lee

가스탕(Gasstang)은 자신의 책 『The Story of Jericho』에서 발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후기 청동기 시대(Late Bronze Age)에 여리고의 주요 방어선은 도시 토루의 위쪽 가장자리를 따라 있었고, 두 개의 평행한 벽으로 구성되었으며, 바깥쪽은 6피트(1.83m) 안쪽은 12피트 (3.66m) 두께였다. 서쪽을 따라 조사한 결과 파괴의 흔적이 계속해서 나타났다. 외벽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고 나머지는 경사면 아래로 떨어졌다. 내벽은 18피트(5.49m) 높이로 성채 또는 탑과 접하는 곳에서만 보존되었다. 붉게 물든 수많은 벽돌 덩어리, 갈라진 돌, 까맣게 탄 목재 및 재를 포함하여 강렬한 화재의 흔적을 쉽게 볼 수 있다. 벽 옆에 있던 집들은 불에 타서 땅에 떨어진 채 발견되었고, 지붕은 그 안의 가정용 도자기 위에 떨어졌다.”

성경 기록에 따르면 성벽이 무너졌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도성을 완전히 불태웠다고 그가 기록한 정확한 증거가 있다. 남아있는 식량 공급의 잔해가 발견된 것이다.

옆에 있는 다른 방에서 같은 서쪽 벽이지만 남향 성벽 쪽 불의 흔적은 한 달 전에 발생한 것처럼 생생했다. 흙손을 긁을 때마다 지붕이 타거나 쌓인 재가 시냇물에 흘러내린 검은 숯 층이 드러났다. 이 방구석에 있는 벽돌 선반에서 우리는 대추야자, 보리, 귀리, 올리브, 양파, 통후추 등 모두 까맣게 그을렸지만 틀림없는 가족의 식량을 발견했다. 반면에 작은 빵 한 뭉치와 다음날 구울 때 누룩 역할을 하기 위해 따로 놓아두었던 굽지 않은 반죽의 양은 완전한 활동이 중단된 백성에 대한 동일한 이야기를 명백히 들려주었다.

고대 여리고 유적에 있는 곡물로 가득 찬 대형 저장 용기
▲고대 여리고 유적에 있는 곡물로 가득 찬 대형 저장 용기 ⓒworldhistory.org
여리고의 멸망은 예상하지 못한 빠르고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모든 것은 성벽이 무너지기 직전 그대로 남겨졌다. 그것은 성경의 묘사에 대한 완벽한 그림이었다.

성경의 기록은 그 도시에 들어간 정탐꾼들이 라합에 의해 숨겨지고 보호받았다고 말한다. 라합은 나중에 예수의 족보에서 발견되기 때문에 이것은 성경 기록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두 정탐꾼은 라합에게 그녀의 가족이 앞에 놓여 있는 끔찍한 멸망에서 구출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때가 되자 이스라엘 백성은 그 도시를 점령하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랐다. <계속>

[미주]
1) 아마르나 편지는 기원전 14세기 고대 근동과 이집트의 통치자 사이에 교환된 서신이다.
2) 론 와이어트(1933~1999). 30여 년간 출애굽 역사를 연구하며 미디안 땅의 사우디아라비아 북서쪽에 있는 ‘진짜 시나이 산’을 발견한 인물이다.
3) 아이(Ay)는 3년 동안 통치했고, 죽을 때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호렘헤브(Horemheb)가 왕좌를 차지했다.
4) 아크나톤(기원전 1353~1336)은 이집트 신왕국 제18왕조의 파라오였다.
5) 호렘헤브(기원전 1320~1292)는 이집트 제18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이다.
6) 미케네 문명은 후기 청동기 시대(기원전 1700~1100년경)에 번성하여 기원전 15세기에서 13세기에 절정에 달했다.

글=메리 넬 와이어트(Mary Nell Wyatt)
번역=리진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