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6장
20절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었다. 그 나팔 소리를 듣고서, 백성이 일제히 큰소리로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 백성이 일제히 성으로 진격하여 그 성을 점령하였다.
21절 성안에 있는 사람을, 남자나 여자나 어른이나 아이를 가리지 않고 모두 전멸시켜서 희생제물로 바치고, 소나 양이나 나귀까지도 모조리 칼로 전멸시켜서 희생제물로 바쳤다.
22절 여호수아는 그 땅을 정탐하러 갔던 두 사람에게 말하였다. “그 창녀의 집으로 들어가서, 너희가 맹세한 대로, 그 여인과 그에게 딸린 모든 사람을 그곳에서 데리고 나오너라.”
23절 정탐하러 갔던 젊은이들이 가서, 라합과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와 오라버니들과 그에게 딸린 모든 사람을 데리고 나왔다. 라합의 식구들을 모두 이끌어 내어, 이스라엘 진 밖으로 데려다 놓았다.
24절 그리고 그들은 그 성읍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불로 태웠다. 그러나 은이나 금이나 놋이나 철로 만든 그릇만은 주님의 집 금고에 들여놓았다.
25절 여호수아는 창녀 라합과 그의 아버지 집과 그에게 딸린 사람을 다 살려 주었다.

라합이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살고 있는데, 그것은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정탐하도록 보낸 사람들을 그가 숨겨 주었기 때문이다.

1907년 발굴에 참여한 독일 팀은 북쪽 벽에서 흥미로운 특징을 발견했는데, 8피트(2.44m) 높이의 부분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라합의 집은 외벽에 맞닿아 지어졌으므로 이곳이 라합의 집이 있었던 곳일 가능성이 크다. 이것은 성경 기록의 정확한 세부 사항에 대한 놀라운 확증인 것이다.

여리고성 중 세워져 있는 유일한 외벽 부분
▲여리고성 중 세워져 있는 유일한 외벽 부분. 그곳은 도성의 북쪽에 있으며 아마도 라합의 집이 있었던 곳으로 유추한다. ⓒRandall Lee

발견 이후 가스탕(Garstang)은 영국 고고학자 캐슬린 케년(Kenyon)에게 자신이 발견한 내용과 결론을 검토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로 인해 그녀는 1952년부터 1958년까지 또 다른 발굴 작업에 착수하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발견이 가스탕의 초기 작업을 확인했다는 데 동의했다. 그녀는 이중 성벽의 증거, 안쪽 성벽이 바깥쪽으로 무너진 형태, 그 도시가 완전히 불타고 막대한 양의 곡물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증거를 발견했다. 그러나 그녀는 여리고가 기원전 1570년경에 도망친 힉소스(Hyksos)7)에 의해 파괴되었거나 이집트인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결론지었다.

그런 다음 다른 고고학자가 여리고에 관한 브라이언트 우드(Bryant Wood) 연구자료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가스탕과 케년의 발굴 보고서를 주의 깊게 연구했다. 그는 마침내 그 증거가 여리고의 멸망 사건을 성경 기록에 묘사된 대로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성서고고학평론(Biblical Archaeology Review)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증거를 요약하고 기술했다.

“...고고학적 증거와 성경 텍스트 사이의 상관관계는 매우 관련이 깊다.
• 성읍은 견고하게 요새화 되어 있었다(여호수아 2:5,7,15, 6:5,20).
• 공격은 봄 추수 기간 직후에 일어났다(여호수아 2:6, 3:15, 5:10).
• 주민들은 식량을 가지고 도망칠 수 있는 정상적인 방법이 없었다(여호수아 6:1).
• 포위 기간이 짧았다(여호수아 6:15).
• 성벽이 무너졌는데 아마도 지진 때문이었을 것이다(여호수아 6:20).
• 그 성은 약탈당하지 않았다(여호수아 6:17~18).
• 성읍이 불탔다(여호수아 6:20).” (Biblical Archaeology Review, Vol. XVI, No. 2, 1990년 March/April, pp. 44-58 by Bryant Wood)

그는 계속해서 붕괴되고 불탄 유적의 잔해물에서 곡물이 존재하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 증거인지를 설명했다.

토기를 제외하고, 그 파멸 현장에서 발견된 가장 많은 물건은 곡물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가스탕과 케년 모두 여리고 성 집의 1층 방에 많은 양의 곡물이 저장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의 제한된 발굴 지역에서, 케년은 한 계절에 6부셸(약 163kg)의 곡물을 회수했다. 이것은 팔레스타인 고고학의 연대기에서 독특한 것이다. 아마도 한두 개의 항아리를 발견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많은 양의 곡물을 발견하는 것은 특별한 것이다. 이 특이한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곡물은 고대에 매우 귀중한 상품이었다. 수확 후 저장된 곡식은 다음 수확 때까지 식량을 제공했다. 사실 곡물은 매우 귀해서 교환의 매개체로 사용되었다. 멸망된 도시에 이러한 곡식 저장고가 있었던 것은 성경 기록과 전적으로 일치한다. 그 도시는 고대에 흔히 볼 수 있었던 포위 공격의 결과인 굶주림으로 함락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성경은 여리고가 단 7일 만에 무너졌다고 말하고 있다(여호수아 6:15,20). 승리한 공격자는 일반적으로 도성을 점령한 후 귀중한 곡물을 약탈했다. 이것은 물론 여기에서 발견된 곡물 상황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여리고의 경우, 이스라엘 백성은 “이 성과 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전멸시켜서, 그것을 주님께 제물로 바쳐라”(여호수아 6:17)는 말씀을 들었고 “너희는 전멸시켜서 바치는 희생제물에 손을 댔다가 스스로 파멸당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여라”(여호수아 6:18)고 명령받았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여리고에서 어떤 약탈물도 가져가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것은 “City IV 연구가 끝났을 때 왜 그렇게 많은 곡물이 타도록 남겨졌는지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Bryant Wood의 책을 참조)

Ⅲ. 또 다른 매우 강력한 증거

(왼쪽) 풍뎅이 모양의 부적 ‘스카랍’. 아멘호텝 3세의 이미지와 카르투슈가 들어 있다. (오른쪽) 아마르나 편지. 기원전 14세기 고대 근동과 이집트의 통치자 사이에 교환된 서신이다.
▲(왼쪽) 풍뎅이 모양의 부적 ‘스카랍’. 아멘호텝 3세의 이미지와 카르투슈가 들어 있다. (오른쪽) 아마르나 편지. 기원전 14세기 고대 근동과 이집트의 통치자 사이에 교환된 서신이다. ⓒworldhistory.org

똑같이 흥미로운 것은 이 도시에서의 공동묘지 발견이었다.

“적절한 시기에 기원전 1,500~1,400년에 속한 것으로 판명된 왕릉을 포함한 많은 무덤이 열렸다. 18왕조 파라오의 기둥머리가 새겨진 80개의 스카랍(풍뎅이 모양의 부적) 풍뎅이8)가 연속적으로 발견되었다. 하나는 하트셉수트(Hatshepsut)9) 공주와 투트모세 3세(Thutmose Ⅲ, 기원전 1501~1487년)10)의 공동 이름이 새겨진 스카랍이 발굴되었고, 또 다른 두 개의 아멘호테프 3세(Amenhotep III세)11)의 왕실 인장이 있다. 도기류와는 별개로 그 시기에 도성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있다”(Marston, pp. 136 및 137).

스카랍은 출애굽의 파라오인 아멘호테프 3세 이후 도시가 멸망했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이다. 출애굽 이후 여리고가 멸망되기 전까지 가나안에서 애굽의 증거가 줄어들고 있었다. 다른 공격자들의 희생양이 되고 있는 그 지역에는 가신들을 다스릴 강력한 파라오가 없었다. 이집트에는 파라오의 기둥머리를 만들어 널리 퍼뜨릴 장인이 없었다. 여리고가 멸망할 때까지 애굽이 할 수 있는 일은 살아남기 위한 투쟁뿐이었다.

(맨 왼쪽)고대 이집트 최초의 여성 통치자 하트셉수트 흉상 (가운데)이집트 역사상 가장 효과적이고 인상적인 군주 투트모세 3세 흉상 (맨 오른쪽)이집트 제18왕조의 아홉 번째 왕 아멘호텝 3세 흉상
▲(맨 왼쪽)고대 이집트 최초의 여성 통치자 하트셉수트 흉상 (가운데)이집트 역사상 가장 효과적이고 인상적인 군주 투트모세 3세 흉상 (맨 오른쪽)이집트 제18왕조의 아홉 번째 왕 아멘호텝 3세 흉상 ⓒworldhistory.org

만일 애굽이 가나안에서 속국을 유지하고 애굽 군대로 요새를 철저히 보호했다면 이스라엘 자손이 그곳을 소유하기 위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데 크게 방해가 되었을 것이다. 사건의 타이밍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의해 배열된 것으로만 설명될 수 있다.

여리고의 발굴에서 수집된 증거들은 완전히 설득력이 있다. 그 도시는 성경에 묘사된 정확한 방식 그대로 파괴되었다. 성벽의 유일한 부분이 보존되고 있다는 것은 라합의 이야기에 대한 또 다른 강력한 증거인 것이다. 이것은 여리고가 이집트 제18왕조 말에 파괴되었다는 결정적인 증거인데, 1978년에 이 자료의 발굴자 론이 보았던 전차 유적의 발견 때문에 론이 처음으로 출애굽기와 관련이 있다고 결정했던 바로 그 왕조이기 때문이다. <끝>

이집트 제18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호렘헤브 무덤 벽화
▲이집트 제18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호렘헤브 무덤 벽화 ⓒworldhistory.org

[미주]
7) 힉소스 왕조의 지배자들은 이집트 제15왕조를 세웠지만, 그들이 축출된 후 정복한 테베족에 의해 이집트에서 힉소스 왕조의 흔적은 모두 지워졌다.
8) 모양의 부적에는 Amenhotep III의 이미지와 카르투슈가 들어 있으며, 부적은 고대 이집트에서 의식이나 행정 목적으로 사용되었다(기원전 14세기).
9) 하트셉수트(기원전 1479~1458)는 파라오의 완전한 권위를 가진 남성으로 통치한 고대 이집트 최초의 여성 통치자였다.
10) 투트모세 3세(기원전 1458~1425라고도 함)는 이집트 제18왕조의 6대 왕으로, 고대의 가장 위대한 군사 지도자 중 한 명이자 이집트 역사상 가장 효과적이고 인상적인 군주 중 한 명이다.
11) Amenhotep III(기원전 1386~1353)는 이집트 제18왕조의 아홉 번째 왕이었다.

글=메리 넬 와이어트(Mary Nell Wyatt)
번역=리진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