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유럽 선교사들의 부류는 남인도에서 사역을 했던 독일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들은 힌두이즘에 대한 비판보다는 연구에 무게중심을 두었고, 카스트 제도를 하나의 사회제도로 인정했다. 그래서 개종을 한 인도인들이 있을 때 자신의 카스트 그룹을 떠나지 않고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계속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이것은 종족운동(people movement)이라는 접근방법으로 발전하였다. 이들의 견해를 문화적 억압이나 문화적 민감성이라는 대립적인 단어로 나타낼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유럽 선교사들과 인도교회의 지도자들 가운데 촉발되었던 카스트를 중심으로 한 인도 문화에 대한 논쟁을 살펴보도록 하자. 이러한 논쟁을 살펴보기 전에 인도 기독교의 시발점을 찾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기원후 52년에 케랄라 지역에 첫발을 내디뎠던 사도 도마는 왕족들과 브라만들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였으며 해안가에 일곱 개의 교회를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케랄라에서의 힌두교 전통에서도 기독교를 포함한 다른 종교를 포용하는 문화적 전통이 발달해 있었다. 그래서 최초의 인도 기독교인들은 ‘마토마(성도마) 교회’라는 이름으로 교단을 형성하여 아직도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이러한 기독교의 역사와 전통을 인식하는 것이 현재의 인도 기독교를 논하는 첫걸음이 된다. 사도 도마의 전통을 따르는 이들을 시리안 크리스천이라고 불렀다. 이들 교회의 지도자들이 시리아에서 건너왔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카스트 제도를 인정하고 카스트 제도에 기초한 인도의 문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이들에게 있어서 카스트는 하나의 문화적 전통이었다. 이러한 전통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기 때문에 아직도 크리스천 브라만과 힌두 브라만의 결혼을 케랄라에서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것이다.
인도 기독교 안에서의 카스트 논쟁은 근대에 들어서 유럽의 선교사들이 인도로 유입되면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대략 네 번에 걸치 큰 논쟁이 있었다. 그 첫번째 논쟁은 16세기 전반기에 인도 크리스천들의 문화적 전통성을 가지고 논쟁을 벌였다. 고아에 식민기지를 세웠던 포르투갈은 유럽에서 발전해 온 카톨릭의 전통을 따르도록 시리안 기독교인들을 설득하였다. 케랄라에서 시리안 크리스천 남자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열었던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는 이 학교를 신학교로 전환하면서, 학교의 목적을 다음과 정하였다. 즉 “유럽의 정신으로 학생들의 영혼을 형성케 하고 동양적인 영향력을 몰아내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이러한 원칙은 사도 도마의 전통을 잇는 시리안 교회의 주교의 직접적인 반발에 부닥쳤다. 이 주교는 해당 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을 신부로 안수하는 것도 거부하였다. 그 이유는 유럽의 문화에 지나치게 동화되었으며 시라안어도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
유럽의 선교사들에게 대항하여 나타난 문화적 논쟁은 19세기까지 이어졌는데 그 때까지 대부분의 개신교 선교단체는 인도의 문화에 대체적으로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와 같은 문화적 배경 속에서 19세기 유럽의 선교사들과 인도의 교회 지도자 간에 카스트에 대한 논쟁이 촉발이 되었다.(yoonsik.lee2013@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