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년을 호주에서 보낼 때 글을 통해 만난 한 선교사님의 이야기입니다. 1889년 10월 2일, 호주 출신 목사 한 명이 선교의 사명을 가지고 호주를 출발한 지 40여 일 만에 부산항에 도착합니다. 조셉 헨리 데이비스(Joseph Henry Davies, 1856~1890) 목사입니다. 호주 명문인 멜버른대학교와 영국 에딘버러대학교의 뉴칼리지(New College)에서 공부한 수재였던 그는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의 초대 파송 선교사로 한국에 도착합니다. 그의 나이 33살이었습니다.

그리고 곧 선교의 필수과정인 언어공부를 위해 한국어를 배우려는 목적으로, 언더우드 선교사 등 서양 선교사들이 미리 와있던 서울로 가기 위해 다시 출항해 1899년 10월 4일 제물포항에 도착합니다. 그 후 데이비스 목사는 서울에서 한국어 공부에 최선을 다해 몇 개월 후에는 간단한 일상의 대화는 물론 간단한 설교까지 하게 됩니다.

한국에 도착한 지 5개월이 지난 1990년 3월 14일, 그는 자신을 도와줄 한국인 동역자 몇 명과 함께 서울을 떠나 자신이 선교하기를 원했던 부산으로 서둘러 출발합니다. 그의 가슴이 선교의 열정으로 뜨거웠기 때문입니다. 그가 부산으로 가는 동안 마차나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하지 않고 걸어서 간 것은 목적지까지 가는 길에 만나는 한국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호주인으로 한국에 최초로 파송된 데이비스 선교사
▲호주인으로 한국에 최초로 파송된 데이비스 선교사
데이비스는 서울을 떠나 경기도의 수원, 충청도의 공주를 지나며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나 그가 경상도에 도착할 때쯤 그의 몸은 천연두와 폐렴 등으로 많이 약해지게 됩니다. 그가 부산에 도착한 날이 1890년 4월 4일이었습니다. 서울을 떠난 지 20일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부산에 와있던 선교사들과 의사들이 그를 돌보았지만, 그의 몸은 회복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부산 도착 다음 날인 1890년 4월 5일, 호주를 떠나 한국에 도착한지 6개월 만에 그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습니다. 그의 나이 34살이었습니다. 선교의 꽃도 피워보기 전에 죽은 것입니다. 모두가 그의 죽음에 당황했으며 또 비통해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죽음으로 호주의 한국선교는 끝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데이비스 목사가 죽은 지 한 달이 지난 1890년 5월 6일, 그의 고향인 호주 멜버른 시내 스콧 교회(Scots church)에서 거행된 데이비스의 선교사 추모 기념 예배를 드리는 그곳에 성령님이 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그 예배에 참석한 호주인들의 가슴에 한국선교에 대한 소명과 헌신을 불같이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그 불길은 스콧처치를 넘어 호주 전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Who is next?”(다음에는 누가 갈 것인가?)가 호주 그리스도인의 가슴을 울리는 물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뒤이어 수많은 호주 목사, 의사 등 다양한 선교사가 한국선교에 자원하기 시작합니다. 호주의 여성 그리스도인들은 데이비스의 죽음이 자신들에게 ‘선교사는 여성이 돼라’는 신호로 받아들여 호주 장로교 여전도회 선교연합회(PWMU, Presbyterian Women’s Missionary Union)를 조직합니다. 실제로 이 단체는 40여 명의 여선교사를 한국으로 파송합니다. 그 외 존 멕카이 목사(Rev. J. H. Mackay) 부부, 앤드류 아담슨 목사(Rev. Andrew Adamson) 부부, 커렐 의사(Dr. H. Currell) 등 120여 명이 넘는 호주 선교사가 데이비스의 빈자리를 메우겠다는 마음으로 한국으로 밀려 들어옵니다. 한 알의 밀알이 100배의 열매를 거둔 것입니다.

무엇보다 유능했던 청년 선교사 데이비스의 죽음이 호주교회로 하여금 선교의 필요성, 특히 한국선교의 필요성을 일깨우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데이비스의 선교는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특이한 점은 데이비스의 죽음 이후에 한국에 도착한 호주 선교사들은 선교사역의 인프라가 그래도 편리하게 구축돼 있던 서울이 아니라 부산, 경남 지역에서 선교하기를 원한 것입니다. 이유는 한 가지, 자신들이 데이비스의 정신을 잇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데이비스의 후예들은 부산, 경남지역에 그들의 정성을 쏟아 선교하며 많은 교회와 학교와 병원을 세웁니다. 지금도 부산, 경남에는 호주선교회가 세운 병원, 학교, 교회들이 주의 복된 사역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선교에는 실패가 없습니다. 오픈도어선교회의 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슬람권과 공산권 선교에 힘을 쏟는 오픈도어선교회의 사역은 때로 열매도 없어 보이고 성과도 느려 보입니다. 그러나 선교사역에 헛된 일이란 없습니다. 당시에는 누가 한국 도착 6개월 만에 죽은 헨리 데이비스의 선교사역을 성공이라고 생각했겠습니까? 그러나 그의 사역은 위대한 사역이었습니다.

김영우 목사(혜림교회 담임, 한국오픈도어 이사)
▲김영우 목사
마찬가지로 오늘도 오픈도어의 사역을 위해 수고하는 현장 사역자들의 헌신과 그 사역의 가치를 알고 후원하는 후원 사역자들의 헌신은 분명 귀하고 가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기에 빛도 이름도 없이 현장과 후원의 자리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님들은 분명 이 시대의 아름다운 헨리 데이비스입니다. 때로 사역의 열매가 금방 보이지 않고, 사람과 환경의 장벽이 거칠고 높아 보여도, 주님을 사랑하기에 나아가는 여러분의 주님을 향한 선교사역은 실패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선교사역을 축복하고 응원합니다.

김영우 목사(혜림교회 담임, 한국오픈도어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