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3년 4월 25일, 화요일 아침 – 동명지(Tong Myungi).

윌리엄 베어드 선교사
▲윌리엄 베어드 선교사
여기 있는 동안 대구 근처의 한 지역에 잠시 들렀는데, 그곳은 서 씨 가문 선조들의 고향이라 했다. 8명의 형제가 한꺼번에 과거(guagga)에 급제했다고 한다. 왕이 크게 놀라고 두려워한 나머지 이들 가문의 재산을 빼앗았는데 그곳이 공원이 되었다고 한다19). 이곳에 우리가 들렀을 때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그들은 우리를 놀이 대상으로 삼았다. 약간 높은 지대에서는 멋진 경치를 볼 수 있도록 산책길 정상에서 둘레를 높이는 일종의 토목 공사를 하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외국인이 보통 당하는 장난질은 어떤 사내아이로 하여금 돌을 던지게 하거나 관리의 하인이 외국인의 길을 막고 주위를 돌다가 길 밖으로 밀쳐 내는 것인데 이보다 더 모욕적인 일은 없다.

대구에 있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사람들에게 기독교에 대해 이야기하며 보냈다. 많은 책을 배포했다. 전신소와 관련 있는 한 남자가 여러 번 우리를 찾아와서 책값을 내지 않고 책 몇 권을 가져갔다. 그는 부산에 들르겠다고 말했다. 그 사람은 김성규이다.

우리는 어제 아침 일찍 대구를 출발했어야 했지만 그건 우리와 동행한 마부들에게 달려 있었다. 그들은 끌고 온 말 한 마리를 흥정했고, 정오에 약간 더 좋은 다른 말로 바꿔 타고 출발했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해가 진 후에도 계속 말을 타고 대구에서 40리 되는 이곳20)에 왔다. 강한 바람이 불어 오후 내내 주위는 먼지로 가득했다. 대구 한쪽에 있는 이 지역은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 이곳 또한 언덕 지대이다.

칠곡이라는 한 읍내21)를 지났는데, 성벽(城壁)도 없는 아주 보잘 것 없이 작은 마을이었다. 길 한 가운데서 한 나이 든 노파가 매우 화가 나 있었다. 왜냐하면 우리 일행이 다른 길로 돌아가지 않고 그 여인이 독차지 하고 있는 길로 지나려 했기 때문이다. 한 일꾼이 조용히 그녀가 앉아 있는 의자를 길 한쪽으로 들어 옮겼다. 그리고 그 여인의 무기력한 분노를 의식하며 그 길을 지나갔다.

길 한 가운데에, 무섭게 보이는 붉은 악마 모습의 걸개그림으로 길을 막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 일행이 지날 수 있도록 그것을 치워주려 하지 않았고, 우리가 지나가려고 하자 우리가 탄 말을 놀라게 하려고 아래에서 북을 쳐댔다.

한 일본 장군이 이곳에서 죽었는데, 그의 혼백을 이런 방식으로 달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많은 질병이 돌게 될 것을 두려워해서다.

밤이 오기 전까지 계속 비가 와서 우리는 이곳에 붙잡혔다. 폭풍을 동반한 비가 내렸고, 오늘 아침에는 바람이 불다가 화창하게 개었다. 마치 산악 기후 같았다. 마부들은 오늘 아침에 산 위쪽에 눈이 내렸다고 말해 주었다.

서경조가 회고한 베어드와의 2차 전도여행
▲서경조가 회고한 베어드와의 2차 전도여행 ⓒ셔경조(1925). 서경조의 신도와 전도와 송천교회 설립 역사. 신학지남, 7(4), 109쪽.
4월 25일, 저녁 - 해평(海平).

우리가 잠을 잤던 데서 60리 떨어진 곳에 도착했다. 오늘 있었던 유일한 일이라고는 늦은 점심을 먹으러 장내(Changnai, 長川)22)에 들린 일뿐이다. 그곳에는 장이 열렸고 열악한 화전민들에게 호감을 주는 곳이다. 이 지역은 그리 크지 않다. 우리가 지나온 지역은 산들이 많았고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오늘 오후에는 대체로 날씨가 좋아졌다. 낙동강이 보이고, 주위 계곡은 비옥해 보이며 잘 경작되어 있었다.

대구를 나선 후 우리는 성주(Syung Joo)를 경유했고, 왼편에 있는 인동(Entong) 읍내를 보며 지나갔다. 성주는 작지 않은 고을로 아마 동래와 비슷한 규모인 것 같다23).

밥값은 한 상(床)에 35전에서 60전으로 올랐다. 날씨는 화창했고 바람도 많이 불었다.

기온은 서늘했다 - 부산의 기후보다 약 20여 일 늦는 것 같다. 이 지역의 해발 고도가 그리 높지 않음에도 산지의 쾌적함을 느낄 수 있었다. 주막 마당은 마구간처럼 온갖 쓰레기로 가득했다.

4월 26일, 수요일 저녁 – 낙동24).

이곳에 일찍 도착했다. 마부 한 사람이 아파서 오늘은 50리 밖에 못 왔다.

길을 따라 지나며 만난 사람들은 우리가 전하는 말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그들의 의견은 이 세상 너머에는 관심이 없다는 걸 분명히 보여준다. 안타까운 서(徐) 전도인!! 며칠 전에 그는 조선 사람들이 일본 사람들과 중국 사람들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슬퍼하고 있었다. 오늘날 이 백성들의 무능함과 어리석음 때문에 외국 사람들이 조선 사람들을 그렇게 다룬 그 정당성을 입증하게 했다.

“그들은 눈이 있어도 볼 수 없고 귀가 있어도 들을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 무엇이든 그들을 가르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을 억압하는 것이다.” 불쌍한 사람과 불쌍한 백성들! 그들은 다른 언어를 모른다. 하나님, 속히 이들을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는 오늘 선산 읍내(Syunsan Umnai)를 왼쪽에 두고 지났고, 강을 건넜다25). 서울로 가는 길은 이곳에서 낙동의 서쪽 지역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김산(Kim San, 金山)26)은 이곳에서 80리나 떨어진 아래쪽에 있다고 들었는데, 그곳은 성주 쪽으로 흐르는 강27)의 서쪽 지역이다.

4월 28일, 금요일 아침 – 상주.

우리는 어제 아침에 낙동을 떠났다. 상주에 절반쯤 와서 우리는 김 서방28)이 길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마을에 살고 있다는 걸 알았다. 우리는 그리로 가서 그를 만났는데, 그의 집은 매우 협소했고, 너무도 가난하게 사는 모습이었다.

그는 부산을 떠나 7일 만에 몸이 아픈 상태로 그의 집에 도착했고, 며칠 전까지 아파서 누워있었다. 그는 집으로 오는 도중 상처 세척기를 망가뜨렸기 때문에 자신의 상처를 씻을 수 없었다. 그는 우리가 앉을 수 있는 방이 있는, 한 이웃집으로 안내했다. 얼마 동안 얘기를 나누고 약 12가구의 작은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그의 친척들에게 우리를 소개하고 나서, 우리 일행에게 자기와 함께 식사하고 가라고 끝까지 고집했다.

그는 가난했지만 우리는 그의 끈질김 때문에 거절할 수 없어 응했다. 그와 함께 성경을 읽고 말씀을 나눈 후에 우리는 길을 재촉했다. 그는 우리를 고개 넘어까지 배웅했다.

불쌍한 형제29)! 그는 오래 살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성경을 가지고 있기에, 유교에 만족하고 성경과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는 그의 이웃들보다는 나을 것이다.

우리는 지난밤에 낙동에서 40리 거리의 상주에 도착했다. 병에 걸린 마부 한 명을 낙동에 남겨두었다. 지금은 심부름 하는 아이의 몸 상태가 오히려 더 좋지 않다. 부산에서 이 먼 거리까지 와서 일행 중 한 명이라도 아프다는 건 곤란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잘 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어제(4월 27일, 목요일)는 이곳 장날30)이었다.

우리는 도착해서 간신히 묵을 방을 구할 수 있었다. 오늘 아침 책 몇 권을 팔았다.

5월 l일, 월요일 저녁 - 용궁 읍내.

일행 중 두 일꾼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상주에서 오늘 아침까지 지체했다. 몰려드는 사람들을 돌려보낼 수 있도록 이 지방 관리에게 청원을 했다. 그들은 분명 외국인을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상주는 부산에서 480리이고, 서울까지도 같은 거리지만 도로의 상태는 서울로 가는 길이 더 좋다.

서(徐) 전도인은 이곳 인구를 약 20,000명으로 추산했다. 이곳은 넓은 평원 위에 있으며, 그 주변은 많은 마을이 둘러싸고 있다.

이방(Ipang)31)은 매우 점잖고 세심했으며, 여러 번 찾아와 우리가 요청한 사항들을 해결해 주었다. 할 수 있는 한 많은 책을 배포했다. 상주는 아마도 부산보다는 서울에서 오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우리는 이방에게 마부를 보살펴 달라고 부탁하고 상주를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마부는 열병을 앓고 있다. 다른 방안이 없었다. 마부는 거동을 할 수 없었다. 우리는 경비를 다른 곳에서 조달할 수도 없었고, 게다가 가져갔던 약품도 거의 다 떨어져 거기에 계속 있을 수 없었다. 심부름하는 아이는 오한이 있지만 좀 나아졌다.

우리는 이방에게 한 권에 7달러짜리를 각각 670전에 팔았다. 오늘 상주에서 동북 방향으로 70리 떨어진 이곳 용궁읍내32)에 도착했는데, 성벽이 없는 작은 도읍이다. 몇 마을을 지났는데 비교적 많은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이었다.

상주에서 식사를 포함하여 10리에 10전을 주기로 하고 다른 마부를 고용했다.

5월 2일, 화요일 아침

밤새도록 비가 왔고 낮에도 계속 비가 오리라 한다. 심부름하는 소년이 밤중에 아프게 되자, 그는 귀신을 쫓아낸다며 촛불을 밝히고는 동료 마부를 불렀다. 그래서 우리는 그 소년이 마부에게 하는 유언을 들으며 늦은 밤을 보냈지만, 아침이 되자 심부름하는 아이의 상태는 나아졌다. 심부름하는 소년은 그가 마부와 동등하다고 생각하며 마부가 불을 지피지 않았다고 마부를 불렀다.

5월 4일, 목요일 정오 – 풍산역(Poongsan Yuk)33).

원우(院宇, House)34)에서 공부와 번역을 하며 화요일과 수요일 정오까지 보냈다. 비가 그치자마자 바로 출발했다.

지난 밤에는 상주에서 100리 되는 강나루 한 작은 마을35)에서 묵었다. 오늘 오전에는 강을 2번 건넜다36). 땅이 꽤 비옥하고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고장을 지나왔다. 어제는 예천(Raychyun) 읍내 왼편을 지났다.

5월 5일, 금요일 아침 – 안동.

상주에서 260리 - 부산에서 480리이다. 지난밤에 여기에 왔다. 많은 책을 팔았다. 많은 군중들을 돌려보내느라 힘들었다. 이 관내에는 도내 어떤 다른 지역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관할구역 안에 있다고 한다. 읍내는 그렇게 크지 않아 보이며 주거인 수는 약 13,000명 정도일 것이다. 오늘 아침 우리는 강의 본류(本流)를 건너 경주를 향해 나아갈 예정이다.

5월 8일, 월요일 정오 – 영천(Yung Chyun, 永川, 榮川)37).

출발하기 전 인사. 안동을 출발하기 전에 한 천주교인이 내 앞에 엎드렸다. 그는 내가 가톨릭 신부가 아닌 걸 알아차리고는 태도를 바꾸었다. 나는 여행 중에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나룻배를 타고 낙동강을 건너 남쪽으로 향했다. 우리는 그날 개울을 7번 건너야 했다. 낙동강 물결은 거셌다. 풍산역에서 늦은 점심을 하고 의성(Eundyung, 義城)에 가서 숙박했다38). 토요일에는 소실(Socil)39)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대구에서 70리, 안동에서 160리, 경주에서 120리 거리에 있는 신녕(Sillyung, 新寜)40)에 도착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안식일을 보냈다. 아파서 상주에 떨어졌던 마부가 여기서 우리를 따라잡았다. 특별한 일은 없었다. 이 지역은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것 같고, 서부 지역보다 훨씬 더 참신하고 흥미로웠다. 소년과 마부는 둘 다 걸을 수 있다 – 거의 완쾌된 것이다. 기도에 대한 응답이다.

불국사 일주문
▲불국사 일주문 ⓒ지미 리
5월 13일, 토요일 – 경주.

영천(Yung Chyun, 永川)을 떠나 우리는 월요일 밤 아울(Aool)41)에서 숙박했고, 화요일(5월 9일) 비바람의 폭풍우 속에서 50리를 말을 타고 경주에 도착했다. 그 이후로 계속해 여기에 있었다. 이곳 사람들을 만나고 이들에게 말씀을 전했으나 소득은 거의 없었다. 아직 책 한 권도 못 팔고 이들에게 나눠 주지도 못했다. 모두가 거절했다. 오늘 아침 두 사람이 달걀 선물을 가져왔으나 말씀 듣기는 거절했다. 경주에는 아직도 옛날의 중요한 유적들이 남아 있다. 왕릉(王陵)들, 아마 1,000년은 되었을 법한 석탑, 그리고 다양한 고대 건축물 더미들. 경주는 대구보다 더 쾌적한 도읍이다.

한두 명의 승려가 있는 오래된 사찰이 남아있다. 이 도읍에는 100,000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이 지역은 상주보다 넓다.

문이 없는 오래된 경내 기둥을 “게센트(Gescent, 역주: 一柱門)42)”라고 한다. 얼음 저장고(역주: 석빙고)가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좋은 석조 건축물이다. 도읍 근처에는 서울에 있는 것보다 더 크고 오래된 언덕43)이 있는데, 정말 오래된 것이다44).

※미주 44) 원문 “The old pole of grounds without the gate is called ‘Gescent’. An ice room is see that remains. It is a fine piece of masonry. Near city is an old hill larger than the one in Seoul + very old.”

경주 반월성
▲경주 반월성 ⓒ한국관광공사
5월 18일, 목요일 – 울산.

경주를 떠나기 직전에 여러 권의 책을 팔았다. 어제 아침에 그곳을 떠나 80리를 온 것이다. 이곳은 부산에서 140리 떨어져 있다. 대구에서는 약 170리 거리이다. 지나오는 길 좌측에 좌병영(左兵營)45)이 있었다. 어제 지나온 지역은 다 좋은 곳들이었다. 많은 개울을 건넜다 – 여기 해군 기지가 있는 좌병영(Ch’wa Pyung Yung) 해군기지에는 사람들이 많다. 기지는 언덕 위에 잘 위치해 있었으며, 군관(軍官)도 많았다. <끝>

경주 석빙고
▲경주 석빙고 ⓒ지미 리
[미주]
19) 여기 베어드 일기에 나오는 서경조 조사 전도인의 본관은 달성이 맞는다는 것을 새문안교회 역사자료실에서 확인했다. 그러나 일기에 소개된 선조들의 이야기는 와전된 것 같다. 조선시대 달성서 씨 가문에서 영의정 7명, 좌의정과 우의정 각 1명을 배출한 이야기가 형제 8명이 과거에 급제한 것으로, 또한 이곳은 달성서 씨(達城徐氏)의 세거지(世居地)였고, 고려 때부터 소유하고 있던 이 공원 땅을 서 씨 문중이 세종대왕에게 헌납한 것을 왕실에 빼앗겼다는 것으로 와전된 것이다. 이곳은 1905년부터 공원이 되었다. 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 현 칠곡군 동명면을 말한다.
21) 옛 칠곡군 칠곡읍으로, 현 대구시 북구 읍내동을 말한다.
22) 장내는 현 구미시 장천면 상장2리의 옛 지명인데 5, 10일 장이 열렸다. 상장동에서 제일 크고 행정기관이 모여 있는 곳을 장내·장터 또는 장천이라 한다. 자료: 구미시 홈페이지
23) 노선에서 갑자기 성주가 나오는 것이 의아하다. 대구에서 성주는 북쪽 노선이 아니라 진행 방향과 전혀 다른 서쪽 노선으로, 대구에서의 거리가 80리에 해당한다. 80리면 하루에 왕복할 수 있는 거리는 아니다. 따라서 대구에서 성주를 경유해서 칠곡, 동명으로 온 것이 아니라 성주는 일기에 없는 1893년 4월 23일, 4월 24일에 갔다가 온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자료: 상지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김은철 박사
24) 낙동(洛東)이라는 이름의 뜻은 낙양(상주를 낙양이라 하였음) 동쪽에 흐르는 강이란 의미이다. 조선시대 교통망으로는 경상우도(慶尙右道), 유곡도(幽谷道, 현 문경 聞慶), 낙동(洛東, 현 상주 尙州)역이 있었다. 현 상주시 낙동면.
25) 선산읍내는 이 여행 행로의 서쪽, 낙동강 건너에 있다. 해평에서 현재의 국도를 따라 ‘낙산>도개>낙정’까지 와서 낙정에서 낙동강을 건넜다. 해평에서 낙동까지의 거리가 50리이다. 자료: 상지대학교 김은철 교수
26) 김산(金山)은 신라 때부터 쓰여 온 김천(金泉)의 옛 지명이다. 1914년에 김천으로 바뀌었다. 자료: 상지대학교 김은철 교수
27) 낙동강을 말한다.
28) 서경조는 2개월가량 부산에 가서 베어드 선교사를 도왔는데 훗날 『서경조의 신자와 전도와 송천교회 설립역사』에서 경상도 북부여행(서경조가 회고한 베어드와의 2차 전도여행, 윤문 참조)을 기록해 베어드가 말하는 김 서방은 김기원이며, 상주에서는 4~5일 체류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9) 베어드 선교사가 보기에 오래 살 수 없을 것처럼 병약했던 김 서방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김재수는 경북 상주 출신으로 기독교로 개종한 후에 김기원(金基元)으로 개명하였으며, 경북 최초의 장로로 시무하다가 1913년 6월 평양신학교를 제6회로 졸업하고 경남 웅천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그는 경남과 경북지역의 초기 목사로 활약하였고, 대구 월배교회 초창기 조사로도 활동하였다.” 자료: 성주군 기독교 110년사, 98쪽.
30) 현재에도 상주시 남성동에 자리한 중앙시장은 매월 2, 7일에 5일장이 열린다.
31) 조선시대 지방관서에서 인사 관계의 실무를 맡아보던 부서 또는 그 일에 종사하던 책임 향리. 또 이방은 지방아전의 대표자로서 수리(首吏)라고 불렸고, 호방(戶房)·형방(刑房)과 함께 3공형(三公兄)으로 통칭되어 지방행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2) 현 경북 예천군 용궁면을 말한다. 상주에서 용궁까지는 ‘상주>함창(공갈못)>점촌’을 거쳐 약 32km로, 80리 길이다. 자료: 상지대학교 김은철 교수
33) 이곳 풍산역은 현 풍산읍 안교리에 있던 안교역(安郊驛)을 말한다. 안교역은 안동부(安東府)에서 서쪽으로 37리에 있었다. 서북으로 예천(醴泉) 통명역(通明驛)이 30리, 서남으로 용궁(龍宮) 지보역(知保驛)이 40리에 있다. 안교역에는 대마는 없고 중마 2필, 복마 8필을 구비하고 있었으며, 역리 28명, 노(奴) 60명, 비(婢) 11명을 거느리고 있었다. 상지대학교 김은철 교수
1808년(순조 2)에 편찬된 『만기요람』에 나타난 경상좌·우도의 역은 150곳이었고 역마는 합계 1,687마리였다. 하지만, 베어드가 기록한 풍산역은 조선시대 『萬稷要覽』(만직요람)에 나오지 않고 고려시대 역참에 풍산에 있는 안교역(安郊, 현 豊山)으로 나타난다. 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4) 베어드는 일기에서 4월 22일과 5월 4일에만 숙소를 House로 표기해 기존 숙소(Inn, 주막)와는 다른 객사 또는 원우를 나타낸 것 같다. 조선시대 교통과 관련된 대표적인 숙박 시설에는 역사(驛舍), 객사(客舍), 원우(院宇)를 들 수 있다. 역사와 객사는 관아적 성격을 지니고 있으나, 원우는 각 도로변에 배치하여 위로는 국왕에서부터 아래로는 일반 백성에서 이르기까지 여행 중에 이용할 수 있는 교통편익시설이었다. 원우는 반관반민(半官半民)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자료: 한국콘텐츠진흥원
35) 상주에서 100리라고 하였으므로 용궁에서 30리 거리의 지점이다. 행로가 예천>안동으로 정해진 것으로 보아 서울로 가는 지름길인 경진나루(서울나들이)에서 묵은 것으로 추정된다. 현 예천군 개포면 경진리. 자료: 상지대학교 김은철 교수
36) 안교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잠을 잔 경진나루에서 지류인 한천을 건너고 다시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을 건너야 했다. 자료: 상지대학교 김은철 교수
37) 1893년 당시 경상도에는 영천군이 2곳이 있었다. 永川郡은 1914년 신녕군을 통합, 1981년 영천시로 승격되었고, 榮川郡은 1914년 순흥군, 풍기군과 통합, 1980년 영주시로 승격되었다. 따라서, 이 일기에서 영천은 현 永川市이다. 자료: 영천시 홈페이지
38) 안동에서 다시 풍산으로 갔다가 의성으로 가는 경로가 이해되지 않는다. 풍산에서 의성까지는 약 100리 길이므로 늦은 점심을 먹고 100리를 이동하기 어렵다. 점심을 먹은 풍산역은 아마 안동에서 의성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어느 곳의 착오인 것으로 보인다. 자료: 상지대학교 김은철 교수
39) 현 군위군 우보면 모산리 소실
40) 현 경북 영천시 신녕면
41) 조선시대 경상도 신녕의 장수역(長水驛)을 중심으로 한 역도(驛道)는 장수도(長水道)인데 아화(阿火)는 장수도(長水道) 소속 역으로, 소로(小路 또는 小驛)에 속하는 역이었다. ‘아울(Aool)’은 현 경주와 영천 경계에 있는 아화고개 아래의 ‘아하리’이다. 그곳 지명을 아화(阿火)로 적는데, 옛 지명은 ‘아불(阿弗)’, ‘아울(阿鬱)’, ‘아을’로 기록되어 있다. 즉, ‘아울’은 ‘아불>아ᄫᅮᆯ(ㅂㅇ, 순경음)>아울>아을’로 음운변천한 것이다. ‘阿火’는 ‘아불’의 ‘불’을 fire로 본 결과이다. 아울에서 경주까지의 거리가 정확하게 50리이다. 자료: 상지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김은철 박사.
42) 영어로 기록한 “Gescent”의 단어를 판독할 수 없지만, 문장의 뜻은 사찰 입구에서 볼 수 있는 일주문을 뜻한다. ‘일주(一柱)’라는 말은, 이제 이 문을 지나면 속세의 세상을 벗어나는 것이니 ‘마음을 하나로 기둥처럼 곧게 모으라’는 의미라고 한다.
43) 이 글에 석빙고, 일주문 등이 나오는 걸 감안하면 그 인근에서 볼 수 있는 곳은 반월성일 것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반월성은 101년(파사왕 22)에 쌓은 것으로 둘레는 1,423보(步)라고 되어 있다.
44) 이상규는 이 문구 내용 중 pole of grounds를 palace of grounds로 판독 번역해 ‘문이 없는 고궁터가 개성터’라고 추측 번역했는데, 이는 pole of grounds로 판독해야 한다. 계속해서 An in room은 An ice room으로 판독함이 올바를 것이다. 이 문구 역시 연구자들을 위해 원문을 번역문 아래에 소개한다.
45) 조선시대 경상좌도 울산에 있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의 주둔 병영을 말한다. 1407년(태종 7년)의 행정구획 시 경상도의 낙동강을 경계로 하여 낙동(洛東)과 낙서(洛西)로 나누었는데, 이를 각각 좌도와 우도로 삼았다. 우병영(右兵營)은 진주에 있었다.

리진만 선교사
역자 리진만(우간다·인도네시아 선교사)

※ 옛 지명에 대한 각주는 상지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김은철 교수께서 자료를 제공해 주시고 감수해 주셨음에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