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글

윌리엄 베어드(William M. Baird, 1862~1931, 한국명 배위량) 선교사의 2차 선교여행은 베어드가 한국에 와서 부산에 선교거점(Station)을 개설한 후, 경상도 다른 지역에 선교지부(Sub-Station)를 개척하기 위한 선교탐방 목적을 가진 여행이라고 할 수 있다.

1889년 감리교회 선교부 아펜젤러와 존스 선교사는 처음으로 내륙 지방을 탐방하며 대구를 지났지만, 아펜젤러가 그해 선교본부에 보고한 결론은 대구보다는 부산에 선교지부를 설립해야 하겠다는 선교구상1)이었다.

윌리엄 베어드와 부인 애니 베어드
▲윌리엄 베어드와 부인 애니 베어드

감리교회 선교사들이 대구를 다녀간 지 4년 뒤, 1893년 경상도 북동부 지방을 탐방 여행한 베어드는 2차 선교여행을 하며 부산 이외의 선교지부 후보 지역으로 울산2), 동래, 경주, 대구를 마음에 두는 모습을 그의 일기와 선교보고에서 볼 수 있다. 즉, 그의 일기에서도 기술했듯이 2차 선교여행 성격을 “현지 탐방과 복음전도 여행(exploratory and evangelistic journey)”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가 1893년 선교본부에 보고한 선교리포트와 비교해 보면 그가 일기에 기록한 매서 활동, 복음전파 사역, 방문 지역 정보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그의 일기는 ‘선교일지’의 성격을 갖는다고도 볼 수 있다.

베어드의 ‘2차 선교여행 일기’는 이미 여러 번역자에 의해 우리에게 소개된 바 있다. 그러나 필자가 베어드 선교사의 ‘2차 선교여행 일기’를 다시 번역해 소개하는 이유는 지금까지 소개된 2차 선교여행 일기 중 이상규의 『윌리엄 베어드의 선교일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W. 베어드의 3남 리처드 베어드가 부친이 남긴 일기를 바탕으로 발간한 편집본을 번역했기에,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원본에서 삭제된 부분을 소개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W. 베어드 관련 책에서 발견되는 원본 일기 판독의 오류들을 바로잡아 1893년 W. 베어드 선교사가 기록한 일기의 원본 내용을 가감 없이 전하고자 함에 있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잘 알려진 W. 베어드의 ‘2차 선교여행 일기’는 아래와 같다.

1. 원본:
가. 『William M. Baird diary, 1892-1893』, pp.78~98, Presbyterian Historical Society, U.S.A.

2. 1차 자료:
가. Baird, Richard H. 『William M. Baird of Korea: A Profile』, Oakland: Calif.,1968
나. 이상규, 『윌리엄 베어드의 선교일기』,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2013

3. 2차 자료: 리처드 베어드의 『William M. Baird of Korea: A Profile』 번역본
가. 장봉학, 『한국선교의 개척자들』, 육일문화사, 2011. / 베어드 선교사의 전도 여행기
나. 유영식, 이상규, 존 브리운, 탁지일. 『부산의 첫 선교사들』, 서울: 장로교출판사, 2015. / 윌리엄 베어드의 부산선교

위에 소개한 책 중 W. 베어드 선교일기 원본을 판독해 번역한 책은 이상규의 『윌리엄 베어드의 선교일기』가 유일하다. 나머지 책들은 W. 베어드 선교사의 3남 리처드 베어드가 부친의 일기를 편집하여 1968년 출간한 『William M. Baird of Korea: A Profile』를 번역한 것이다.

베어드의 2차 탐방 여행일기 원본 표지와 첫 페이지
▲베어드의 2차 탐방 여행일기 원본 표지와 첫 페이지 ⓒPresbyterian Historical Society

리처드 베어드가 편집한 W. 베어드의 ‘2차 선교여행 일기’는 출발 일자부터 W. 베어드가 기록한 선교일기 원본과는 다르게 편집해, 연구자들에게조차도 여행 출발 일정을 상이하게 이해하도록 하는 오류를 볼 수 있다. 일기 원작자의 아들로서 리처드 베어드는 W. 베어드의 손글씨 원본 일기 중 문맥상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나, 부친의 문장에서 문법적으로 또는 단어 판독이 쉽지 않은 문장 여러 군데를 삭제하거나 교정해 편집한 부분이 나타난다.

이상규가 번역한 『윌리엄 베어드의 선교일기』 원문 판독 내용 중에도 몇 문구의 위치가 변경되거나, 판독 타이핑하는 과정에서 원본 단어를 다른 단어로 잘못 옮겨 안타깝게도 번역문의 내용이 전혀 다른 곳이 몇 군데 발견된다. 이러한 부분은 자칫 2차 자료에 인용되면서 잘못된 정보를 확산시킬 우려가 있다. 이에 연구자들은 사료를 소개하면서 오류를 바로잡고 원저자의 글을 언제든 다시 충실히 전달해야 하는 책임이 있는 것이다.

1893년 10월 미 북장로교회 선교사 사진
▲1893년 10월 미 북장로교회 선교사 사진. 중앙 앞 베어드 부부, 중앙 뒤 기포드 부부. ⓒPresbyterian Historical Society

필자는 W. 베어드의 ‘2차 선교여행 일기’ 번역문을 소개하면서 위에서 제기한 리처드 베어드가 편집하며 삭제한 부분을 힘닿는 데까지 찾고 보완하여 W. 베어드 일기 원본을 있는 그대로 판독해 소개하고자 했다. 또한 W. 베어드의 선교일기 원문을 판독해 소개한 이상규의 『윌리엄 베어드의 선교일기』 내용 중에서도 문구의 위치가 변경된 곳과 몇 군데 잘못 판독한 문장을 교정해 제시했다.

필자 생각은 처음 W. 베어드의 자료를 번역 소개한 자료는 누가 만들든 작은 오류 하나 없이 완벽한 번역 및 각주 자료로 만드는 것은 어렵다고 본다. 이렇게 오래전 W. 베어드의 자료들을 찾아 소개한 분들의 성과와 공헌에 박수를 보내며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제언을 하고자 한다.

1893년 10월 미 북장로교회 선교사 사진 명단
▲1893년 10월 미 북장로교회 선교사 사진 명단 ⓒPresbyterian Historical Society

첫째, 시간적으로 강산이 거의 13번이나 바뀐 이 시기에 W. 베어드 선교사의 글을 번역한다는 것은 단순히 언어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역사, 지리, 문화 등 당시의 환경을 고려해서 작업해야 할 것이다.

둘째, 독자들에게 더 알찬 당시의 선교 상황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관련된 각 분야 전문가들의 협력 연구가 필요하다. 이러한 시도로 필자는 이 일기에 나오는 옛 지명 및 역참의 숙소들을 번역할 때, 옛 지명 전문연구자로서 많은 성과를 낸 분들의 조언과 자료를 받아 각주를 완성해 독자들에게 더 나은 이해와 가독성을 높이고자 했다.

마지막으로, 아직까지는 완벽하지 못한 원문 판독 작업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그리고 이러한 고전 자료의 발굴과 소개에 각계 전문가들과의 합력이 이루어져야 한다. 선교역사도 일반역사와 문화사 등 동시대 환경을 함께 살펴보아야 역사적 사실을 바로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러한 일을 추진하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말씀임을 강조하고 싶다.

W. 베어드 선교사의 ‘2차 선교여행 일기’를 번역하는 과정 중 각주 작성에 도움을 주신 상지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김은철 박사님, 청도문화원 박윤제 원장님, 향토사학자 강경모 선생님 세 분의 따스한 조언과 자료 제공에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2차 선교여행 일기’를 따라가 본다.

베어드가 1895년 부산에서 운영하던 한문서당
▲베어드가 1895년 부산에서 운영하던 한문서당(The Chinese School). 맨 왼쪽 앞에서 두 번째 줄 서상륜 조사, 세 번째 줄 베어드 선교사, 맨 뒷줄 부인 애니 베어드 선교사. 맨 오른쪽 앞줄은 보조교사(as little teacher)로 활동했던 서초시의 아들, 두 번째 줄 아담스(J.E. Adams) 선교사, 맨 뒷줄 어학선생 서초시. 1895~1896년 『부산선교지부 전도 보고서 Ⅱ』의 학교 보고서에 따르면 서초시 아들은 학생 수가 늘어나자 보조교사로 고용되었다. ⓒPresbyterian Historical Society

윌리엄 베어드 선교사의 경상도 선교여행 일기
(1893. 4. 14. ~ 5. 18.)

 

1893년 4월 14일, 금요일

나는 경상도 북부지역으로 여행을 떠났다. 나는 금요일에 동래에 도착해 17일 월요일까지 기다린 후, 다음 날 대구를 향해 출발할 예정이다. 서경조3)는 조사4)(전도인)로서 나와 동행한다. 박재용은 심부름을 한다. 마부 두 사람이 내일 이리로 와서 짐들을 운반할 것이다.

심부름하는 소년에게 9달러 50센트를 주기로 약속했고 식사는 자기가 스스로 해결한다. 마부들 하루 일당은 450캐시로 정했다. 출발 전에 각자에게 10냥을 주었고, 여행 중에 필요한 것들은 그들이 사고 나머지 잔액은 여행을 마치면 정산해 줄 것이다.

우리는 동래에 도착하면서 비를 흠뻑 맞았고, 그래서 공부하며 젖은 것들을 말리면서 토요일을 보냈다. 어제는 맑았다. 우리는 온천지역을 지나며 동래에 도착했고 책 몇 권을 팔았다.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해서 많이 들어서인지 그들 중 여러 사람이 책 사기를 원했다.

오후에 온천에서 이금정(Yi Kum Chyung)이라는 사람이 방문하여 기독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선교여행에 앞서 그에게 이전 전도여행5)을 얘기해 주었다. 그는 관심을 가지는 것 같았고 똑똑해 보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너무 늙어서 공부를 잘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그에게 죽을 만큼은 나이 들지 않았고, 그의 영혼은 어디론가 가게 된다고 말했다. 언더우드(Underwood)도 2년 전 이곳에 왔었는데, 그가 이곳에 왔을 때 머물렀던 방에 내가 머물고 있다. 이금정은 우리에 대해서는 관심을 보이지만 종교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계속>

1907년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들
▲1907년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들. 앞줄 왼쪽부터 한석진, 이기풍, 길선주, 송린서. 뒷줄 왼쪽부터 방기창, 서경조, 양전백. ⓒ새문안교회

[미주]
1) 리진만, 〈아펜젤러 남부순행 일기〉, 기독일보 2021. 3. 26. ‘132년 전 아펜젤러 선교사의 조선선교 구상’을 참조
2) 1892년 1차 탐방 여행 후 베어드는 마산포에 선교지부를 개설하고픈 의향을 보였고, 2차 탐방 여행 후 1895년에는 울산의 가옥을 매입할 수 있는 100엔의 예산을 책정받았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1895년 말 대구에 선교지부를 개설했다. 『윌리엄 베어드의 선교리포트Ⅰ』,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2016
3) 1907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 최초의 목사 안수를 받은 목사 7인 중 한 사람으로, 1910년부터 1913년까지 새문안교회의 동사목사(同事牧師)로 시무하였다.
4) 1892~1893년 선교보고서에서 베어드는 서경조를 ‘Helper’(조사)로, 1893년 보고서에서는 ‘Evangelistic Helper’(전도인 조사)로 소개하고 있고, 이 일기 원문에서는 ‘Evangelist’(전도인)으로 기록했다. 조사(助師)는 한국인 목사가 양성되기 전에 초대 한국교회의 직분으로, 선교사들을 도운 사람(Helper)이다.
“조사는 선교사들의 손발이 되었으며, 선교사들과 동행하며 선교사들의 서투른 일이나 모르는 풍습과 문화에 적응하도록 안내자의 역할을 하였다. 그들은 통역자로, 교사로, 설교자로, 전도자로 선교 활동의 일선에서 늘 선교사들과 함께했다. 선교사공의회 초기에는 조사(助事)로 시작하였으나 독노회 이후에는 목회자로서 조사(助師)라는 호칭으로 불리어졌다.” 자료: 박창식 목사, 대구 경북지방 장로교회 초기 조사연구, pp.1-3.
5) 1892년 5월 18일부터 6월 13일까지 경상도 남서부 지역을 탐방 전도한 1차 여행을 말한다. 여기에는 서상륜이 조사로, 이 일기에 나오는 박재용이 심부름꾼으로 동행했다.

리진만 선교사

역자 리진만(우간다·인도네시아 선교사)

※ 옛 지명에 대한 각주는 상지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김은철 교수께서 자료를 제공해 주시고 감수해 주셨음에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