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3년 4월 17일, 월요일

오늘 오전은 번역을 하면서 보냈다. 정오쯤 아내 베어드(Mrs. Baird)6)가 부산(Fusan)에서 온천지역으로 왔다. 오후에는 내일 일찍 출발하기 위해 짐을 꾸리고 정리했다.

4월 19일, 수요일 정오

어제 아침 마부들의 협조로 9시에 출발하여 험한 계곡을 올라 범어사를 지나갔다. 길옆에 있는 한 주막에서 늦은 점심식사를 했다. 오후에 우리는 양산 읍내와 황산역(Whangsan Yuk)7)을 지났다. 우리는 낮에 약 60~65리를 걸어 밤에 낙동강 강변 물금(Moolkeum)8)에 도착했다. 물금에 있는 주막은 매우 훌륭했다. 주막 주인이 우리를 천주교인으로 오해해서 말씀 듣기를 거절했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서 전도할 기회를 놓쳤다. 책도 판매할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볼 수 없음을 긍휼히 여기시기를....

오늘 오전 우리가 여행한 대부분의 도로는 강과 언덕 사이에 있는 길이다. 비교적 적은 수의 사람들이 이곳에 살고 있었고 길은 험했다. 이곳은 길가에 있는 작은 주막인데 아주 좋은 장소는 아니다. 그러나 이 길을 따라 있는 다른 숙소 수준은 되는 것 같다. 이 지역은 까치원(Gachi Wün)9)이라는 곳이다.

1911년 밀양 영남루의 옛 모습
▲1911년 밀양 영남루의 옛 모습

4월 20일, 목요일 아침 – 밀양.

우리는 어제 오후에 보았던 그 길을 따라 여행길을 나섰다. 작은 고개를 하나 넘어 다시 북쪽으로 향했다. 크고 비옥한 계곡으로 들어갔는데, 그곳은 앞서 이전에 지나온 어느 곳보다 훨씬 더 좋은 고을이었다. 물론 여기에 더 많은 사람이 거주하고 있다. 우리는 100여 가구가 있다고 하는 작은 마을을 지났다. 해 질 녘에 작아 보이지만 집들이 1,000여 가구나 된다는 밀양에 왔다.

우리는 어제 모두 70~80리를 나아갔다. 전도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책 몇 권을 팔았다. 사람들이 우리를 피했다.

밀양엔 높은 지붕 아래 일종의 넓은 대청마루가 있는 “다락(tarak)”이라는 유명한 건물이 하나 있다. 이것이 남부에서 가장 멋지다 하여 영남루(嶺南樓, 남부지역 다락)라고 불린다. 집에 편지를 보냈다. 나는 오전에는 번역을 하면서 지냈고 오후에 대구를 향해 다시 출발할 것이다.

1929년 영남루에서 열린 소작인대회
▲1929년 영남루에서 열린 소작인대회 ⓒ국립중앙도서관

4월 21일, 금요일 정오 – 삼거리(청도).

밀양을 막 출발하려 할 때 우리는 책을 사겠다고 간청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 늦은 점심 먹을 시간도 거의 없었고 복음서 속에 들어있는 진리의 뜻을 설명할 기회도 없었다. 밀양이라는 지역은 사람들이 선하고 잘사는 것 같았다. 밀양에는 부자들이 많다고 한다.

우리는 저녁에 유천역(Yoo Chyun Yuk)10)에 도착해 숙박했다. 아버지(주막 주인)와 아들이 언쟁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아들을 심하게 꾸짖었다. 아들은 자기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땅을 치며 아버지에게 욕을(“yok haod”) 해댔다. 동네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어 어수선해서 우리는 그 언쟁을 거의 들을 수 없었다.

일찍 출발한 덕택에 잘사는 사람들의 마을을 지나 40리를 나아갔다. 마을은 언덕 아래 산을 등진 가까운 곳에 있었다. 이곳이 원골(Wonkol)11)인데 이른 아침에 이곳을 지난 것이다. 우리는 막 청도의 작은 읍내를 출발해 왼쪽으로 향했다. 비는 아직 오지 않는다. 밥값이 한 상12)에 30전에서 45전으로 오르고 있다.

옛 시장터의 밥상 한상과 장터 모습
▲옛 시장터의 밥상 한상과 장터 모습

4월 22일, 토요일 정오 - 대구.

1시경에 대구에 바로 도착했다.

우리는 어제 이른 오후 안새부리(Ansaipyuri)13)의 작은 산골 마을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우리는 2~3시간 더 여행을 했어야 했는데, 앞에 있는 매우 높은 산이 마부들에게 넘고자 하는 마음이 들 수 없게 만들어 그들의 의견에 따랐다. 책에 대한 문의가 시작되어 잘 시간까지 계속되었다. 전도할 틈은 거의 없었으나 많은 책을 배포(配布)했다. 대구에 오전에 도착하려고 우리는 일찍 출발했다. 팔조령(八助嶺)14)의 제일 높은 산을 먼저 넘었다. 산을 내려온 후 우리는 몹시 길고 폭이 좁은 계곡을 지나 서서히 넓어지며 대구를 둘러싼 계곡으로 들어갔다.

길을 지나며 땔나무를 실은 우마차와 사람들이 많이 보여 우리는 큰 도읍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시내엔 어느 곳이나 사람들이 붐비고 여기 약령시(Yung, 매년 열리는 큰 장)15)에 상인들로 인해 더 많은 사람이 보인다. 시내 구경을 나가보았다. 관아에서는 여기에 가옥(家屋) 3,700채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10,000여 채가 있다고 말하면서 실제로 약 3배(倍)라고 추정한다. 그렇다면, 이곳에 50,000명의 사람이 살고 있다. 내 생각으로는 대구가 통영만큼은 크지 않아 보인다. 몇몇 조선 사람들은 대구가 더 크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통영, 마산포, 진주, 그리고 대구의 크기가 엇비슷하다고 말한다16).

대구읍성 복원 지도
▲대구읍성 복원 지도 ⓒ대구시 중구

그곳은 물론 관찰사(Kawnsa, 觀察使), 판관(Pangwan, 判官)의 숙소와 + 영창(Yung Chang, 營倉)으로 사용되었다. 그 객사(House, 客舍)로 따라온 사람들에게 달력 여러 부를 배포한 적이 있다. 우리 숙소 근처에 서 있는 고운 검은 광택 돌의 대구 성벽비(碑, 10 x 3 x 1 1/2 ft)17)에는 성벽이 157년 전에 축성되었으며 그 둘레가 2,120보가 된다고 기술되어 있다18).

※미주 18) 원문 “The place of course is the residence of the Kawnsa, Pangwan + Yung Chang. Has been followed house by the usual crowd once disposed of several calendars. A shaft of fine black polished stone near our inn (10 x 3 x 1 1/2 ft) says that the walls of T. were built 157 years ago and are 2,120 steps around them.” <계속>

대구 영영축성비 사진과 영영축성비 탁본
▲대구 영영축성비 사진과 영영축성비 탁본 ⓒ대구시 수성구청

[미주]
6) 애니 베어드(Annie Laurie Baird, 1864~1916, 한국명 안애리)는 남편을 도와 미국 교과서들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편찬했고, 미국 찬송가를 한국어로 번역, 편집하는 일에도 큰 공헌을 했다. 영어와 한국어로 작성한 많은 소설도 남겼다.
7) 황산역(黃山驛)은 황산도의 본역(本驛)으로 찰방(察訪)이 주재(駐在)하였으며, 그 외에 역승(驛丞) 1명이 있었다. 관할 범위는 양산을 중심으로 밀양·기장·언양∼경주·울산·동래 방면의 역로(驛路)이다. 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8) 현 경남 양산시 물금읍
9) 까치원(鵲院)은 깐치원 또는 작원관지(鵲院關址)라고도 불렸다. 현, 경남 밀양시 삼랑진읍 검세리 산 101번지
10) 매일신문의 최미화 편집위원은 박정규 대구교회사연구소장의 도움을 받아쓴 ‘경상도 복음여행’이라는 글에서 “지금은 경부선 철로가 새길을 따라 약간 방향을 틀었지만, 당시는 기차가 서던 구(舊) 유천역 바로 앞의 아담한 일본식 집에 짐을 풀었다. 베어드 선교사가 묵었던 이 여관은 113년의 풍상을 이겨내고 아름다운 그 옛날 첫 모습 그대로 지니고 있다”면서 베어드의 유천역 숙소 상황을 일본식 여관 사진과 함께 소개했는데, 베어드가 여행할 당시에는 아직 경부선 기차가 개통되지도 않았다. 그러니 기차역뿐만 아니라 사진의 여관은 그곳에 없었고 베어드 일행이 묵은 곳이 아니다.
조선시대 ‘慶尙左道 省峴道(淸道) 楡川(淸道)’(경상좌도 성현도 유천)의 현 지명은 경상남도 밀양시 상동면 옥산길 17-2이다. 현재 ‘관마을’, ‘구관’이 있다. 또한 현재 상동역으로 이전하기 전 유천철도역이 있었던 곳은 현 밀양시 상동면 새마을로 37,39,41이다. 자료: 상지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김은철 교수, 청도문화원 박윤제 원장
11) 대체로 원(院)이 있던 마을을 ‘원골(院洞)’이라 불렀다. 밀양에서 청도로 가는 길의 ‘원골’은 현 청도군 청도읍 원리이다.
12) 조선 시대에는 한 상(床)이 식사 한 끼를 의미했다.
13) 청도군 이서면 양원리를 바깥샛별, 바깥쇠벌로 부르고, 거기에서 약 10리 정도 떨어진 팔조리를 안샛별, 안쇠벌로 불렀다. 일기의 ‘안새부리(Ansaipyuri)’는 안샛별, 안쇠벌을 소리로 적은 것이다. ‘벌~별’로 실현되는 것으로 볼 때 이 지명은 들을 뜻하는 ‘벌’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고 벼랑의 방언 ‘별’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다. 팔조령의 험한 산 아래에 마을이 있으므로 ‘안샛별’이라 하였을 수도 있고 들판의 안쪽이므로 ‘안쇠벌’이라 하였을 수도 있다. 현지 마을에서 ‘새월’로 부른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벌’이 ‘벌>불>ᄫᅮᆯ>울>월’로 음운변천한 것으로 보인다. 즉 ‘새벌’은 ‘새+벌>새벌>새ᄫᅮᆯ>새울>새월’로 음운변천한 것으로서 ‘벌’은 들을 뜻한다. ‘새’는 ‘샛별, 샛바람’처럼 동쪽일 수도 있고, 풀(草)일 수도 있으며, 신(新)이나 사이(間), 새(鳥)를 뜻할 수도 있다. 경주의 다른 이름인 ‘새내, 사뇌’는 동쪽의 내, 또는 동쪽의 들을 뜻하였지만, 이것을 신라(新羅)라 한 것은 ‘새’를 신(新)으로 해석한 결과이다. 이곳에 신촌리(新村里)라는 마을지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새벌’은 새로 들을 닦아서 만들었기 때문에 생긴 지명으로 보인다. 현 주소는 경북 청도군 이서면 팔조리이다. 자료: 상지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김은철 교수
14) 팔조령은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삼산리와 경북 청도군 이서면 팔조리를 연결하는 고개이다.
15) 해마다 정기적으로 열려 약재를 사고팔던 시장. 관(官)의 명에 따라 개시(開市)하였기에 영시(令市)라고도 하였다. 약령시는 약재의 주요 산지라고 알려진 경상도, 강원도, 전라도에서 집산에 편리한 주읍인 대구, 원주, 전주 세 곳에서 먼저 개시하였다. 자료: 동영중기 하, 153쪽.
16) 베어드의 1892~1893년 부산선교지부 전도 보고서에 다르면 그는 1차 전도 여행시 방문한 주요 마을과 도읍의 인구를 김해(6천 명), 창원(5천 명), 마산포(1만5천 명~2만 명), 진해(2천 명), 고성(3천 명), 통영(1만 명), 양산(3천 명), 동래(1만 명)로 보고했다.
17) 영영축성비(嶺營築城碑)는 영조 13년(1737) 경상도 관찰사 겸 대구도호부사였던 민응수(閔應洙)가 임진왜란 때 허물어진 대구토성을 돌로 다시 쌓은 후 이를 기념하고자 세운 것이다. 대구읍성의 둘레는 2,124보(步)이며, 네 개의 문을 만들고 성을 지키기 위한 군량, 전포 등을 갖춘 창고를 두었다. 석성의 공사 기간은 6개월이며, 동원된 인원은 78,534명에 달한다. 축성비의 크기는 높이 259㎝, 폭 90㎝, 두께 44㎝이다. 자료: 수성구 홈페이지
18) 연구자들을 위해 역자가 판독한 이 문구의 원문을 번역문 아래에 첨부했다. 이상규는 이 문장 중 ‘walls of T.(walls of Taegoo)’의 대구 읍성을 ‘wells’로 잘못 판독해 주위에 2,120계단이 있는 우물이라고 번역했다. 또한 이상규가 4월 22일 자 윌리엄 베어드의 일기 전문이라고 소개한 문구 대신 역자가 판독한 문구는 번역본 아래 첨부한 영문이다.

리진만 선교사

역자 리진만(우간다·인도네시아 선교사)

※ 옛 지명에 대한 각주는 상지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김은철 교수께서 자료를 제공해 주시고 감수해 주셨음에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