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5년 『The Korea Mission Field』 12월호
대영성서공회 매서인들의 서울 방문 / 휴 밀러(Mr. Hugh Miller)

수년 동안 공회에서는 선교거점 매서인들이 함께 모여 연합회의를 개최하여 열정적으로 매서활동을 추진하려 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러한 모임에서 뭔가 우리의 조직을 활성화하는데 필요한 것이 나올 것이라 생각했고, 이를 통해서 매서인들도 BFBS라는 커다란 조직의 일원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하려 했다. 올여름 초에 우리는 당국에서 금년 9월 11일부터 10월 31일까지 서울에서 산업박람회(共進會)를 주최하고 참가를 권유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후, 박람회 기간이 공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매서인들의 총회를 열기 적절한 시기라고 생각했다.

각 선교거점에서 매서인들을 감독하고 있는 선교사들과 상의하고 협의한 후에 앞으로 매서일을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리라는 믿음을 갖고, 공회에서는 매서인들에게 10월 1일부터 8일까지 서울에서 열리는 매서인회의에 참석해, 성서 관련 업무에 관한 회의와 박람회 참관, 그리고 서울 관광 등을 하러 상경하라고 초청장을 보냈다. 172명이 답신을 보내왔는데 여기에는 제주도뿐만 아니라, 남쪽 섬지방과 북쪽 만주의 간도에서도 응답이 왔다. 여기에 참가하려고 멀리서 온 매서인들의 외양을 통해 많은 발전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이들 중 단 6명만 전통 갓을 쓰고 왔으며, 단 한 명도 상투를 튼 매서인이 없었다.

1915년 승동교회에서 매서인 총회가 열렸다.
▲1915년 승동교회에서 매서인 총회가 열렸다.
매서인들 중 많은 사람은 서울로 올 때 기차를 탔다든지, 서울에 있는 전차, 말이 끄는 웨곤 마차, 그리고 대로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는 오토바이 등을 처음 보았다. 박람회장에 커다랗게 전시된 여러 전시품을 만져보고 느껴보는 것은 매우 흥미롭고 또한 교육적이었으며, 우리는 이에 대한 효과를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매서인들의 회의는 승동장로교회에서 클락(Rev. C. A. Clark) 목사와 그의 분과 주관으로 진행되었다. 매일 오전 9시 모임에서는 아래와 같은 주제의 특강이 있었다.

* 언더우드(Rev. H. G. Underwood) 목사의 ‘우리는 어떻게 한글 성경을 갖게 되었는가?’
* 케이블(Rev. E. M. Cable) 목사의 ‘기도인의 삶’
* 쿤스(Rev. E. W. Koons) 목사의 ‘성경공부의 중요성’
* 게일(Rev. J. S. Gale) 목사의 ‘읽기의 가치’
* 클락(Rev. C. A. Clark) 목사의 ‘개인 사역자로서의 매서인’
* 애비슨(Dr. O. R. Avison) 의사의 ‘매서인은 어떻게 자기 몸 관리를 할 것인가?’

하루는 오전 세션을 마치고 시내로 매서활동을 펼쳐 2,000권의 성경을 배포했다. 또 다른 날은 박람회장에서 연합전도 캠페인을 벌여 466명으로부터 주소와 성명이 있는 상담카드를 받았다.

다른 날들은 매서활동에 관한 특강과 회의로 진행되었는데 토의 주제는 아래와 같았다.

* 매서인이 매서활동에서 사용할 성경구절
* 매서인과 교회와의 관계
* 매서인의 시간 사용법, 특히 비 오는 날은 어떻게 보낼 것인가?
* 매서인의 여행비용 사용에 대하여
* 허위 실적보고로 인한 죄
* 가장 유용한 책을 전달함에 대하여
* 물물교환, 구매자가 현금이 없을 때 곡식이나 다른 물품을 받는 것에 대해(이러한 물물 교환은 현금이 없을 때만 이루어져야 하고, 구매자에게 나쁜 인상을 주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기숙사에서 이들이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여러 경험을 쌓도록 북부 지역에서 온 사람들은 남부 지역에서 온 사람들과, 동부 지역은 서부 지역 내륙에서 온 사람들과 섬 지방에서 온 사람들과 배치했고, 며칠 밤 자유롭게 교제 할 수 있도록 자유 시간을 주었다.

행사 중 아주 흥미로운 일은 사업을 크게 하는 기독사업가 민강 사장께서 매서인들, 직원들 그리고 사역자들을 시내에 있는 근사한 한식집에 초대해 주신 것이다. 식사 시작 전에 아주 말을 재미있게 하는 전문가가 초청자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들을 (다시) 구성해서 재미있게 전해주었다. 이 얘기를 들으며 매서인들은 그들이 활동하면서 박해와 매우 힘든 일에 인내했던 일, 그리고 고독과 난관의 순간들을 잊을 수 있었다. 정찬을 마치고 250명의 초대객은 다시 홀에 모여 다른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모든 메시지는 거의 간단했지만, 모든 이가 초대자의 환대와 사려 깊음에 감사를 표했다.

초청 일정을 마치고 모든 매서인들은 더 넓은 생각을 하게 되었으며, 총독부에서 대한국을 발전시키기 위해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를 더 인식하게 되었고, 매서인들의 활동에 대한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복음서를 그들 형제자매들 가슴과 손에 쥐여 주게 하는 것이 그들이 경외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깊은 헌신이라고 생각하며 각자 집으로 떠났다.

연합전도관
▲1915년 일제는 조선의 정궁 경복궁에서 한일합방 5주년의 성과를 홍보하기 위해 조선물산공진회(박람회)를 개최했다. 박람회장 입구에 외국선교부와 한국교회의 여러 교파가 주축이 되어 연합전도관을 만들고 박람회 기간 연합전도 활동을 했다. ⓒGCAH Digital Gallary
1915년 『The Korea Mission Field』 12월호
산업박람회 소감 / 쿤즈(E. W. Koons)

대한국에서 이러한 박람회가 열린 것은 처음이고, 그 효과는 분명 나타날 것이다. 13개 도에서 개인으로 또는 단체로 사람들이 관람을 왔고, 금세기에 이 나라 사람들에게 어떤 상품을 제공할 것인가를 경쟁하게 했다.

나는 아직까지 이 박람회를 통해 성과를 얻었다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지만, 박람회장에 다녀올 때마다 새로운 정보를 갖고 온다. 전시해 놓은 가축들은 서방 사람들이 보기에는 실망스럽고 소나 돼지 종류가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 나라에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이 큰 의미가 있다.

또한 박람회의 슬로건은 ‘지난 5년간의 발전’인데, 이 나라의 보통 산업을 없애버리려거나 아니면 작은 부분으로 격하시키려는데 있다. 그러나 그러한 발전의 전시는 풍성함을 통계표로 분명하게 보여주었는데, 이는 큰 성과이다. 박람회에서 본 아이들까지도, 규모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매년 철도로 수송되는 여객의 수는 잊지 못할 것이다. 모든 전시품은 특색을 가졌다. 소학교 학생 관련 일과, 황실보조금 재단도 잘 운용해 항상 받아오던 것보다 가치 있고 심사숙고해 운영했다. 적십자사 전시 부스는 가장 눈에 띄었다.

수천 가지 상품에 대한 설명서를 준비하기는 어려웠고 또한 방문객 수준에 따른 설명도 어려웠다. 밤의 조명 효과는 아주 찬란했으며, 전깃불을 처음 본 사람들한테는 굉장히 놀랄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국적을 불문하고 방문객들은 경회루를 보며 아름다운 건축양식을 세밀하게 관찰하기도 하고, 수백 개의 조명등 불빛이 잔잔한 연못물에 반사되는, 연꽃이 있는 연못에서 더 머무르기를 좋아했다. 또한 왕실 ‘이왕직 아악부’ 악단이 연주하는 정말 아름다운 공연을 보았던 순간들을 감사하며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박람회장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전국에서 모인 사람들이었다. 소풍 놀이도 있었는데 둘씩 짝지어 참가했고, 혼자 온 사람은 즉석에서 짝을 만들어 유니폼을 입은 박람회 안내 직원이 설명하는 대로 가는 것이다. 가족 팀들도 있었고, 아이들만 데려온 팀 등등. 관람 온 외국인은 대한인들을 쳐다보고 대한인들은 외국인들을 쳐다보는 소풍인 것이었다.

젊은이들은 여기에 있는 모든 것을 안다는 듯이 뽐내며 걷고 막대기로 여기저기 가리키기도 했고, 반면 나이 든 어르신들은 시간이 갈수록 천천히 걷다가는 주위에 있는 벤치를 찾아가 앉아 휴식을 취했는데 어떤 이는 오수를 즐기며 집으로 돌아가는 꿈을 꿀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들은 모두 관람하고자 왔다. 그들이 이곳에서 한 시간 동안 계속해서 받은 감명은 집에서 농사지으며 논밭에 왔다 갔다 한다든지, 아니면 작은 마을에서 한 달 동안 보내며 받을 수 있는 감명보다 더 많을 것이다. 그들은 아마 그들이 앞으로 10년 동안 얘기할 소재를 머리에 넣고 돌아갈 것이다.

봄이 돌아와 예방주사 철이 되면, 그들은 이곳 의료전시부스에서 보았던 예방주사약은 어떻게 만드는지 얘기해 줄 것이다.

관람객들은 등대도 보았고, 커다란 지도 위에서 증기선이 기계의 힘으로 움직이는 것도 보았다. 어류 전시장에서는 생선 냄새도 맡아보고(아무도 그런 경험을 잊지 않을 것이다), 자동 모형이 두레질하는 광경도 오래 기억할 것이다, 또한 그들은 기계 건물에서 폭포를 만드는 동력 펌프도 보았고, 놀랄만한 성능의 농기계, 기구도 보았다. 모든 기구가 지금껏 사용해 보지 못한 정말 별난 것들이었다. 개량된 괭이도 보았는데, 이것은 대한인들이 사용하던 것보다 하루 2배의 작업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어떤 사람들은 장신구도 사고 집에 선물할 기념품도 샀다, 그들이 여기에서 본 것들은 그들 머리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져다주었고, 새해 일을 시작할 때 적용할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게 하기도 했다.

여기서나, 모든 곳에서나 관람객은 (전도의) 대상이다. 어떤 사람은 여기에 온 사람이 모든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가능하면 그들의 집에까지라도 따라가 그들을 이해하고자 했다. 관람객이 대상이기 때문에 시골에 있는 기독교인이나, 도시 교인이나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 했다. 총독부는 시내에서 박람회장 정문으로 가는 가장 대로길인 자동차 길 옆 가장 좋은 구역을 선교홍보관(전도관)으로 사용하게 했다.

전도관은 그 목적에 맞도록 잘 지어졌다. 한 방문객은 나가면서 “이곳은 전도하는 장소라기보다는 영화관처럼 느껴지네요!”하고 말했다. 이 전도관은 박람회 관람객을 위한 두 가지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맞다.

박람회 개장 시간부터 폐장 시간까지 각 교단에서 교대로 봉사자들이 나와 방문객을 맞이한다. 낮에는 악단이 전도관 앞에서 연주하며 사람들을 모으고, 봉사자들은 그들을 전도관 안으로 안내해서 짧은 복음을 전하며 전도한다. 그리고는 궁금한 사항은 상담할 수 있도록 상담실로 안내하고, 마지막으로 구원의 길로 안내하게 된다.

선교의 벽이 열리지 않은 지역에서 선교사역을 하는 한 선교사가 이렇게 말했다. “이 기회는 내가 본 선교 사역 중 가장 밀착해 전도할 수 있는 기회였다.”

전도관은 관중들이 들고 나느라 시끄럽고 혼란스러웠지만, 만나는 사람마다 신앙 상담을 받은 사람들은 그의 영혼에 관한 질문에 진솔하게 대답했다. 하루에 보통 200여 명의 신상 정보를 받았는데, 이렇게 많은 숫자는 현재 도시교회 교인들의 역할과 많은 차이가 난다. 주일날 우리 교회에는 전도관에 이름을 알려준 남자들이 15명 참석했지만, 여자는 몇 명인지 모르겠다.

전도관에서 만난 사람들 중 2명은 돌아가서 그들의 집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했다. 한 사람은 말하기를 두어 달 전부터 남부 지역에 있는 교회에 나갔는데 믿지 않는 도시에 와서 신앙을 잃었다고 했다. 그는 곧 다시 신앙생활을 하기로 했고, 그의 친한 친구가 그를 돕기로 했다.

또 다른 사람 역시 남부 지방 사람이었는데 중산층 출신이었다. 그는 말하기를 그가 가끔 전도인과 매서인을 만났지만 어떤 좋은 열매를 맺지 못했다. (아마도 포괄적으로 얘기하고, 체계적으로 전하지 못한 것 같다.) 그는 얘기하기를 그의 집이 읍내에서 제일 큰 집이고, 조사나 목사가 오면 한주 일간 묵을 수 있고, 그의 집을 기도처로 제공하고 자신도 신자가 되겠다고 했다. 나는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지역의 선교책임자에게 그를 잘 양육해 달라고 바로 편지를 써서 알렸다. 그는 또 같은 편지 다른 장에 이렇게 썼다. “우리가 받은 신상 정보 중 많은 것은 쓸모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중 수십 명은 진실한 대상입니다. 잘 양육한다면, 분명 결실이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매일 하루 종일 계속되었다. 한국어로 설교하는 방은 일본어로 설교하는 방보다 컸지만, 거기에서 봉사하는 봉사원들의 열성은 같았고, 전도 방법도 같았고, 물론 결과도 같았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일본에서는 전도관(교회) 밖에서 사람들을 끌어들여 설교를 듣게 하는 것은 ‘좋은 모습’이 아니라고 했다. 여기서는 일본 사람도 밖에서 사람들은 끌어들였고, 많은 사람을 모을 수 있었으며 그들의 모습은 경건했을 것이다.

전도관 중간 공간에는 유료 영화 상영관이 있었다. (입장료 2센=1센트, 시내 극장의 1/3 가격) 상영관은 인기여서 매일 밤 만원이었고, 어떤 날은 매진이 되어 입장권을 더 팔 수 없었다. 복음영화였는데 내레이션이 잘 되어 있어 관중이 많았다. ‘아기 예수 이야기’가 끝날 때쯤이면 스크린에 예수님 가족이 이집트로 가는 모습이 보이고, 비통해하는 헤롯의 모습이 나오면 내가 어떤 다른 극장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가슴으로부터 나오는 열광적인 박수를 치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이러한 최신의 서양 기술 자원들이 동양에서 쓰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 데 대하여 기쁘다. 이곳에서 또한 알게 된 사실은 전도관에 들른 남녀들은 여러 나라에서 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안전할 것이다 즉, 이 대한국을 방문한 사람들 중 많은 사람이 이 전도관에 들렀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바는 이 나라에 있는 선교사들과 목사님들 중 1/3이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에게 현지 교회를 방문해 달라고 초대장을 보내는 것이며, 그렇게 된다면 그들은 이곳 박람회장에서 시작한 믿음의 길로 갈 수 있을 것이다.

『매서인은 교회설립의 선구자였다』에서 발췌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