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로부터 얻은 구원
양익환은 매서인들을 방문하여 일하는 방법을 제시하거나 그들을 격려하고, 그들의 신앙생활을 돕는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매서인 시찰이었는데, 그의 보고이다.
“지난(1912년) 4월 원주 구역 북감리교단과 함께 사역하고 있는 매서인들과 순행을 하는데, 길옆에 앉아 있던 두 할머니에게 말을 건넸다. 잠시 대화 후 그들은 나에게 ‘쌀떡’을 건네주어서 받았다. 그 두 명은 12년 전에 불교에 입문해 비구니가 되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의 삶이 곧 끝나면 극락에 가기를 바랐다. 그들은 이것을 확보하기 위해 부처에게 드려졌던 특별한 쌀떡을 먹으며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행복의 길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다고 전했다. 그리고 간단하게 복음에 대해 얘기해 줬다. 나는 복음서의 말씀 몇 절을 그들에게 읽어주었다. 그중 한 여인이 말하기를, 자기는 이미 ‘예수님의 도’에 대해 예수를 믿는 그녀의 손자로부터 들어본 적이 있으며, 내가 얘기해 준 것과 같다고 했다. 그녀가 말하는 그 사람의 손자의 이름이 나와 함께 순행하고 있는 ‘매서인’ 손자의 이름과 같았다. 그 비구니들은 바로 예수를 믿겠다고 했고, 그들의 신실한 태도로 보아 그들이 한 말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부인매서인
‘이 부인매서인들이 없으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라는 것은 대한의 부인매서인들의 활동에 대해 감사를 표시하는 여러 동역자의 표현이다. 지난해 우리는 33명의 부인매서인을 후원했고, 그들은 8,884권의 성경을 판매했다. 많은 부인매서인 감독이 부인매서인들이 여인들에게 읽어준 성경과 한글을 가르쳐준 인원에 대한 보고를 빠뜨렸다. 그러나 보고된 것만 소개해보면, 47,215명의 여인에게 성경을 읽어줬고 373명에게 한글 읽는 법을 깨우쳐 줬다. 부인매서인 감독의 보고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부인매서인은 귀신과 불신의 어두움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놀랄만한 개심의 힘, 위대한 빛이 그들에게 들어갔다.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축복이 동양의 여성들에게 실현되었다는 것을 느끼며, 그들은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다. 아직까지 예수님에 대해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을 향한 그들의 열정, 그들의 권능, 그들의 사랑은 대단하다.
차가운 가을바람 속에서 험한 산길을 267마일이나 걸어 다니며, 복음서 40권, 신약전서 5권, 구약전서 1권 등을 팔고, 790명에게 전도한 63세의 부인이 한 달 동안 일을 잘 못 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성서공회가 지원하는 나이 든 부인매서인 원 다비다(Won Tabitha)가 한 일로, 지난달 사업을 보고한 것이다. 그녀는 믿은 지 4년밖에 안 되었으며, 그 이후 읽는 것을 배웠고, 매일 보고서까지 기록한다. 1년 전에 그녀가 나와 함께 일을 시작할 때 나는 그녀가 너무 어리석게 보여 체념하고 있었으나, 그녀의 활동 이야기를 듣고, 또 판매량을 보고는 모든 불신은 사라졌다. 나는 같은 지방을 순회하는 현지 목사에게 그녀가 근면하게 일하는지 물어보았다. 그는 ‘그녀는 결코 전도하기를 멈추지 않습니다’라고 답하면서, 매달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성경을 읽어주고 전도하는지를 설명하였다.”
함흥에서 선교하는 맥컬리(Miss McCully) 양의 보고이다.
“부인매서인들이 3개월 과정의 ‘성경연수반’에서 공부하는 것은 많은 영적인 축복의 수단이 되었다. 우리가 알기로는 수업을 받을 때부터, 얼마나 많은 여인이 부인매서인들로부터 읽는 방법을 배우는지 모른다. 그들은 또한 성경말씀을 더 잘 설명해 줄 수 있다. 복음서를 여인들에게 판매하는 것은 많은 여인이 글을 읽을 줄 모르기에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글을 배우라고 설득하는 것은 커다란 장점이 되고 있다.”
번하이슬(Mrs. Bernhesel) 여사의 보고는 부인매서인들이 어떻게 활동하는가를 잘 보여준다.
“부인매서인 이신찬의 활동은 다른 해와 같았다. 저와 몇 년 동안 함께 일하는 부인매서인은 일 년의 반은 저의 구역에서 저를 돕고, 나머지 반은 평양에서 일한다. 시골에 있을 때 이 여사는 성경공부반을 지도한다. 여행을 하거나 수업을 마친 이후에 기회 있을 때마다 복음 말씀을 전하고, 만나는 부인들에게 성경을 읽어준다. 성경공부반에는 항상 글을 읽지 못하는 여인들이 있는데, 그녀는 그들을 위해 특별히 시간을 할애해 읽기 지도를 해준다.
평양에서 이 여사는 신자나 불신자들 집을 방문해서 복음을 전하고, 듣고자 하는 이들에게 성경을 읽어주고, 또한 가능하면 한글 읽는 법도 가르쳐준다. 여름 기간에 이 여사는 교회에서 일주일에 2번 한글 읽기를 가르친다. 그녀가 보고하기로는 많은 부인이 성경반에 처음 와서는 더듬더듬 읽었지만, 벌써 성경을 잘 읽는 사람도 많다고 했다. 유창하지는 않지만, 연습이 완벽을 만들 듯이, 우리는 그들이 발전하기를 믿는다.
평양에 있을 때 매주일 이 여사는 주일학교를 담당한다. 주일학교에서도 아직 한글을 잘 읽을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읽고 이해하는 것을 배울 좋은 기회를 준다. 부인매서인은 내가 평양을 거쳐 갈 때 그녀의 사역에 관계된 사례를 하나 얘기해줬다.
믿지 않는 가정의 아이가 많이 아팠는데, 그의 고통을 줄여줄 방법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 그 부모에게 말하기를, 그 아이가 아픈 것은 어떤 귀신이 그 집에 있기 때문이라 해서, 아이를 다른 집에 옮겨 보았지만 변화가 없었다. 또 다른 사람이 말하기를 ‘부인매서인에게 부탁해서 기도하고 성경을 읽어달라고 하면 낫겠다’고 했다. 부인매서인 이 씨는 그들에게 갔다. 그들은 함께 성경을 읽고 함께 기도했다. 그리고 아이의 부모에게 말하기를 그들의 삶에서 죄를 멀리하고, 신자가 되면 하나님께서 그 아이의 병을 치유해 주실 수 있다고 전했다. 성경말씀을 더 읽고 서로 얘기를 나눈 후 그 부부는 믿기로 했다. 그 아버지는 그다음 주일, 가족과 함께 교회에 출석했다. 그러나 아이 엄마는 아이를 지키고 있어야 했다.
부모가 믿기로 작정한 이후 그들은 집안에 있던 미신숭배 물건들을 죄다 밖에 버리고 부숴버렸다. 오래지 않아 그 아이는 죽었지만, 지난주일 그 부인 가족 5명이 오전 부인반 예배에 참석해서 일어서서 고백하기를 그들은 믿겠다고 했다.”
대한국에서의 선교활동 진척은 최근 정치적 어려움으로 인해 심각하게 복잡해지고 있다. 1911~1912년 겨울 동안에 150명 이상의 인사가 조선총독을 해하려는 음모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들 중 9명은 재판도 없이 추방되었다. 체포된 123명 중 98명은 기독교인이고, 그중 28명은 미국장로회선교부 소속 목사, 집사, 장로들이다. 이들은 1912년 여름에 재판을 받았고, 그 결과 17명은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106명은 5~10년형이 선고되었다. 이러한 선고에 대해 구금자들은 항소를 했고, 항소 결과는 1913년 3월 20일에 선고되었다.
하급 법원에서 106명 중 99명에게는 무혐의가 선고되었고, 나머지 7명 중 6명은 6년으로 감형되고 7번째 인사는 5년 형으로 감형되었다. 조선 Y.M.C.A. 회장이고 전 중추원 고문이었던 바론 윤치호(Baron In-Chi-Ko)는 장기 유죄선고를 받은 인사 중 한 명이다. 그러나 그를 포함한 5명의 수감인은 재심을 요청했다.
비록 우리 반포량이 줄어든 것을 보고하지만, 우리는 실망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백만구령운동’으로 한시적으로 늘어난 뒤편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에는 일상적인 판매량의 기준이 늘어나고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한다. 성서공회에 보고된 여러 가지 일 중, 공회에서 파송한 매서인들과 부인매서인들에 의해 읽히고 들려지는 하나님의 말씀은 많은 사람에게 효과적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을 보여주는 데 대해 무한히 감사한다. B.F.B.S.는 구세군에서 직원으로 근무한 경력이 있는 홉즈(Mr. Thomas Hobbs)를 성서공회 한국지부 부총무로 임명했다.
선교사와 교회 용어의 변천 이야기
선교 초기 한국에서는 선교사를 교사, 목사, 선생으로 혼용해 부르다가 ‘宣敎師’(선교사)로 용어가 정착되어갔다. 한국 목회자도 조사, 토착전도인, 조선목사, 집사목사(설교만 할 수 있음), 장로목사(안수를 줄 수 있음)를 거쳐 ‘牧師’(목사)로 부르게 되었다. 전도사는 안수를 받지 않은 설교자, 교역사는 유급으로 목회를 돕는 사람을 일컬었다. 교회 역시 敎堂(교당, 교회건물) → 禮拜堂(예배당) → 敎會堂(교회당) → 敎會(교회)로 용어가 정착되었다. 연회 용어를 살펴보면 초기에는 연화회, 년화회, 련환회로 불리다가 ‘年會’(연회)로 정착이 되었다. 미이미교회는 감리교회로 바뀌었고, 총교사는 교장, 학원은 학생으로, 監理司(감리사)라는 초기 한자 표기는 1931년부터 현재까지 ‘監理師’(감리사)로 사용하고 있다.
1930년 기독교조선감리회가 창립되며 불리던 총리사는 1938부터 총회감독으로, 1941년 일제의 탄압으로 연회가 해산되고 1942년부터는 통리자로 바뀌었고, 다시 해방 이후에는 총회 연회감독을 거쳐 감독회장으로 정착이 되었다.
PART Ⅳ 초기 선교 사역과 ‘매서인’ 사역
『The Korea Mission Field』와 기독교 매체를 중심으로
오늘의 한국 개신교회가 형성되는 데 초기 영향을 끼친 선교활동은 1870년대 중반 만주에서 시작된 선교사 로스(John Ross)와 맥킨타이어(John MacIntyre)가 봉천 등지에서 조선인들을 만나 기독교를 전하기 시작할 때부터이다. 이들의 전도를 받은 이응찬, 백홍준, 김청송, 서상륜 등 조선인들은 선교사들과 함께 『예수성교누가복음전서』와 『예수성교요안내복음전서』를 봉천에서 간행했다. 이 개종자들은 한글 성경을 간도와 한만 국경지역 뿐만 아니라, 목숨을 걸고 국내도 반입하여 서울까지 가지고 와서 전파했다. 이들 조선인 ‘매서인’들의 활동으로, 조선이 개항하여 미국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전까지 1만권 이상의 한글 복음서를 반포하고 전도했으며, 미국 선교사들의 입국 이전에 서간도, 의주, 평양, 소래, 서울 등지에 많은 공동체가 만들어진 것이다.
미국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하기 전, 일본에서도 1883년 이수정이 최초로 세례를 받은 이후 조선인 유학생 사이에서 다수의 개종자가 생기고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 미국성서공회의 지원으로 이수정이 번역에 참여해 『신약마가복음서언해』가 1885년 2월에 출간되어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그해 부활절에 조선에 입국할 때 이 복음서를 갖고 오게 되었다.
1897년 12월 8일 서울교회에서 개최된 남감리회한국선교회 제1회 연회보고를 보면, 당시 선교사는 서울에 3명, 개성에 1명인 반면, ‘매서인’은 서울에 1명, 개성에 1명이 선교사를 도와 토착전도인으로서 복음을 수용한 토착구도자들에게 열심히 전도했음을 보여준다.
이에 남감리회의 선교구역이 서울과 경기 북부를 넘어 강원도까지 확산되었다. 남감리회 선교부에서는 윤성근을 김화로 보내 전도하게 하였고, BFBS의 파송을 받은 ‘매서인’ 나봉식과 정동열이 춘천 지방에 파송되어 강원도 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청일전쟁 이후 1904년 다시 한반도를 전장화시킨 러일전쟁 기간, 우리 선조들은 먹을 것과 머리 둘 곳을 찾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매서인’들은 그 와중에서도 최선을 다해 사역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우리 민족은 큰 각성을 하게 되고, 이전까지 기독교에 대해 경멸하던 식자 계층에도 상당한 종교적 각성이 일어났다. 이로 인한 성경의 수요는 점점 증가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06년 각 선교회에서는 선교 거점마다 특별집회를 갖고 영적 분위기에 불을 붙인다. 평양, 원산, 송도, 서울, 제물포의 부흥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는데, 이 부흥운동은 계속되어 1907년도 대부흥운동 후 1909년 한국 기독교 신자는 총 15만 명에 이른다. 각 선교회와 성서공회는 이러한 마음을 움직여 신자수를 100만 명에 이르게 하자는 ‘백만명구령운동’을 추진한다. 1909년 가을에 시작한 이 전도운동은 한국교인들의 적극적인 호응으로 크게 성공했다. <계속>
『매서인은 교회설립의 선구자였다』에서 발췌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