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를 쓴 칼 세이건은 대단한 작가임은 분명하다. 유튜브를 찾아보거나 인터넷만 둘러보아도 ‘코스모스’를 읽은 사람들의 칼 세이건에 대한 찬사가 넘쳐난다. 그뿐 아니라 많은 석학들이 그의 펜임을 자처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특별함을 증명한다. 다들 코스모스(우주)를 전공과 관련 없이 편안하게 읽을 수 있게 쓸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한 칭송이다. 그는 지금까지 우주에 대한 방대한 과학지식을 읽기 쉽게 사회문화와 연계해서 정리해놓았다. 인문학과 과학을 정교하게 연결하여 씨실과 날실이 옷감을 짜듯이 인류의 역사와 우주를 설명한다. 그래서 과학책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비교적 무난하게 읽을 수 있도록 쓰여 있다.
그러나 기독교적인 관점으로 보면 그는 과학이라는 또 다른 종교의 맹신자이다. 기독교인인 독자들은 그의 글을 고개를 끄덕이며 읽다가 모순점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코스모스’는 과학이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까지 억지로 진화의 과정으로 끼워 맞춰 설명하고 있다. 인류의 전쟁을 파충류 시절 남은 유전적인 습관으로 치부하고, 사람들이 진화하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형성되었고, 노예, 남녀차별, 아동학대 등의 모습이 전반적으로 줄어들고 전쟁의 위협까지도 줄어들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대 지구를 돌아보면 1, 2차 세계대전처럼 세계적인 전쟁은 없지만, 세계 각국의 국지전은 여전하고 차별과 학대는 점점 더 지능적이고 악랄해지고 있다. 그럼 그들은 진화가 덜 돼 아직도 파충류의 속성에 지배되고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는 전쟁 속에서 인류가 진화한 것처럼 설명하지만 긴 인류 역사 중에 세계대전은 2번뿐이다. 물론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 인류 전체의 공멸이라는 두려움이 전쟁을 억제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가 지적했듯이 핵폭탄과 수소폭탄의 위력은 대단하고 그것은 인류의 비극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칼 세이건은 결국 다윈의 진화론과 같은 맥락으로 인류의 진화를 보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과학을 할 수 있는 것이 인류뿐이라고 단정한다. 그의 말대로라고 하더라도 유기물의 합성으로 생성된 생명체 중에서 인류는 가장 늦게 생성되었다. 그 긴 시간 동안 많은 생물들은 왜 인간처럼 진화하지 못했을까? 라는 의문에 해답을 주지는 못한다. 인간의 성격에 관한 의견에서도 문제점을 보인다. 유아기의 피부접촉이 유한 성격을 만든다고 했는데 이 또한 사람보다 동물이 더 자녀를 끼고 사는 경우도 많다. 이 경우도 다 유한 성격을 가진 동물이 되나? 시설 아이들의 특성이 어린 시절 접촉을 통한 돌봄을 못 받음으로 삶이 불안정하다 주장하는데 과연 그럴까? 그렇다면 그런 원리와 상관없는 사람들은 모두 돌연변이일까? 그렇다면 인류의 3분의 1 이상을 돌연변이라고 봐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노은영 작가(사회복지학 석사, 청소년 코칭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