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방개척지에서 개척한 교회가 지금까지 선교적 교회가 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세상 속에 존재하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세상을 변혁시키는’ 믿음의 공동체를 지향하며 크리스텐덤 교회들은 어떻게 ‘선교적 교회’를 만들고 있을까. 크리스텐덤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전방개척지의 미전도종족들 가운데서 먼저 크리스텐덤 교회들을 만드는 일을 참으로 열심히 하고 있다는 아이러니 때문에, 전방개척지의 교회가 선교적 교회가 되지 못했다고 본다.
크리스텐덤 교회의 엉킨 선교적 고민의 뿌리를 내부자 운동에서 풀어나갈 수 있을까?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라고 말씀하셨다. 선교적 교회는 이러한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은 대행자인 신앙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말한다. 세상에 보냄을 받기 위하여 선행되어야 할 것은 물리적으로 분리되어 거룩한 장소에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과 직접 함께한 제자들인 사도들이 모두 유대인들이라는 사실과 가정을 중심으로, 기존의 가족 및 사회 공동체가 신앙의 공동체로 변혁을 이룬 초대교회의 성립, 그리고 바울의 메시지(고전 7:17~24)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미국의 의식 있는 크리스텐덤 교회들은 ‘선교적 교회론’을 들고나오게 되었다. 내용을 보면 그 원리가 바로 내부자 운동을 이야기하는 ‘하나님 나라’의 선교 패러다임인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크리스텐덤 교회론에서 선교적 교회론으로의 전환의 문제는 엄청난 선교 패러다임 전환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결국 이 문제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문제이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헌 부대가 터지는 일이 없이 둘 다 보전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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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교회의 어린이들.(사진은 글 내용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사진=선교신문DB
지금 이 땅에 사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존재 양식: 교회-이중성(duality)을 지닌 존재 양식
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이분법적(dichotomy), 혹은 이중적(dualism), 이중성(duality)이 있는 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빛은 이중성을 가진다. 빛은 파동이면서도 입자이다. 사실 입자와 파동은 서로 양립적이지 않은 다른 존재 양식이다. 한 실체가 두 존재 양식을 동시적으로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이중성은 비단 물질세계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이 땅에 들어오신 하나님 나라의 존재 양식이기도 하다. 어떤 신학자는 하나님 나라를 묘사하면서 ‘이미(already), 그러나 아직(but, not yet)’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이미’라는 단어와 ‘아직’이라는 단어는 양립적이지 않지만, 하나님 나라의 존재 양식으로서의 그 이중성은 확실한 것이다.
이중적 성향의 자연스러움을 알지 못하고 어느 하나를 택하는 것을 원칙으로 고수하게 될 때 이분법이 등장한다. 그래서 자신이 선택한 원칙에서 벗어나야 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그것을 따라가게 된다. 그러나 이미 마음은 불편해지고 타협(compromise)이라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반면 이중성을 띈 존재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확실하게 알게 되면, 빛과 파동처럼 이 세상에 존재하나 속하지 않는 자로서의 분별력을 발휘할 수 있다. 이렇게 이중성과 이분법이 다르고, 그 결과 분별과 타협이라는 전혀 다른 우리 행동의 결과를 낳게 된다.
하나님 나라의 선교? 교회의 자연스러운 존재양식
이방인들은 이방인 상태에서 예수를 만나 하나님 나라에 속하는 백성이 되고, 유대인은 유대인 상태에서 예수를 만나서 하나님 나라에 속하는 배경이 된다. 이러한 이방인 됨과 유대인 됨은 사실상 타종족적, 종교적, 문화적, 사회공동체적으로 타고난 정체성이다.
유대인 중 믿는 자들은 대부분 이방인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려면 유대인이 먼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본을 보이신 하나님 나라 전파 사역과 바울의 사역, 초대교회들의 사역으로부터 그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아직 크리스텐덤을 경험하지도 못한 종족들이나 사회 공동체들을 구태여 크리스텐덤 구조 가운데 들어오도록 하는 수고는 그 자체가 얼마나 아이러니를 품고 있는지 모른다. 결국 하나님 나라의 선교는 이 땅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공동체들의 새로운 존재양식을 발견하도록 해주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온 세계의 복음화 상황을 살펴볼 때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한 방향성은 분명해 보인다.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이것도 버리지 말고 저것도 해야 할 것’과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둘 다 보전이 된다’고 하신 말씀과도 동일하기에 사실상 패러다임의 이슈를 다룰 때 우리가 마음에 담아야 할 내용이라고 생각된다.
본국적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선교에 대한 주도권을 가지신다는 공감대는 ‘세상에 속하지 않지만 세상에 존재해야 하는’ 분명한 자기 정체성을 가진 교회가 ‘하나님의 선교의 대행자’라는 인식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파송받은 선교의 현장에서
타종교문화권 선교현장에 새롭게 투입되는 사역자들은 구태여 기존의 크리스텐덤 구조 가운데 들어가거나 동역을 꾀하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기존의 크리스텐덤 구조를 세워서 그 안으로 새롭게 믿게 되는 신자들을 크리스천으로 만드는 크리스텐덤 교회론을 실천할 필요가 없다. 곧바로 예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사역을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내부자운동의 현장에서
선교적 교회론은 사실상 내부자운동을 지지한다 할 수 있다. 내부자운동은 종종 종교-사회 공동체 내부로부터 일어나는 예수 중심의 공동체 운동이라고 부른다. 외국선교사의 역할로서 동반자(alongsiders)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존 트라비스(John Travis)가 소개한 바 있다. ▲중보자 ▲학습자 ▲친구 ▲이적을 행하는 자-신유나 내적 치유, 축사, 꿈의 해석, 예언 ▲선포자-내부자일지라도 처음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반드시 외부의 선포자에게서 복음을 들을 수밖에 없다 ▲세우는 자-내부자의 지도력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한 걸음 앞선 창의적 훈련을 제안해야 한다 ▲중재자-외부 기독교 공동체와 타 공동체에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
성경적 교회론에 바탕을 둔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로 돌아가야 한다.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이기 그렇다. 교회는 내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거룩함과 성결함을 가진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외적으로는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과업을 이루어 가도록 존재하게 되는 대행자이다. 그것은 이중성으로 이해될 수 있고, 이 땅에서 지금도 이루어져 가고 확장되어 가는 하나님 나라의 속성이기도 하다.
김요한 인사이더스선교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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