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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니지에서 일어난 비폭력 평화시위는 독재자를 약화시키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또한 북아프리카 지역 전역에 이미 굳어져버린 독재정권을 뒤흔들 민주화 운동의 희망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것은 1989년 동유럽이 붕괴한 것과는 여러 가지로 다르다.

지중해 연안에 위치하고, 이탈리아와 가까운 튀니지는 고대로부터 북아프리카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유럽이 북아프리카를 식민지로 삼기 훨씬 전부터 튀니지는 카르타고인(Carthaginians), 로마인, 반달인(Vandals), 비잔틴인(Byzantines), 중세아랍인, 투르크인(Turks)이 다스렸던 오랜 문명의 집합지였다.

현존하는 튀니지 북부의 많은 도로는 로마시대 준설되었다. 2천년 동안 튀니지는 현재의 수도 튀니스(Tunis) 근방에 있는 카르타고(Carthage) 시(市 )를 중심으로 발전하여 왔다. 유목민족 정체성을 가진 튀니지에서 도시화는 2천 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중세 역사학자인 이븐 칼둔(Ibn Khaldun)에 따르면, 정치적 안정성을 저해하는 유목민족적 성향은 도시화로 인해 약화되어왔다. 사실 튀니지는 북아프리카의 아랍 문화와는 깊지 않은 관계를 갖고 있는 반면, 바다와 사막으로 인해 머리 떨어져 있는 유럽의 문화는 동경하는 섬나라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기원전 202년 로마 장군 스키피오(Scipio)는 한니발(Hannibal)을 무찌른 후에 포싸 레기아(fossa regia)라는 도랑을 파 문명화와 비문명화의 경계를 그었다. 이 도랑은 오늘날에도 존재하는데 북서쪽 해안 타바르카(Tabarka)에서 동부의 지중해 항구 스팍스(Sfax)까지 이어져있다. 이 경계선 밖은 오늘날까지 덜 발전되어 높은 실업률을 보이는 빈곤한 지역으로 남아있다. 과일행상을 하던 한 청년의 분신으로 촉발된 이번 시위는 스키피오 장군이 그은 경계선 바로 바깥에 위치한 시디 부지드(Sidi Bouzid)라는 마을에서 일어났다.

튀니지는 상대적으로 중산층이 튼튼한 나라라고 할 수 있다. 튀니지는 이웃 알제리나 리비아처럼 극단적 이상주의에 영향을 받는 나라가 아니라 민생과 같은 실제적인 문제에 대해 정치적 논의가 이루어지는 나라다. 튀니지는 로마와 다른 제국들의 유산을 간직하고 있는 나라일 뿐만 아니라 잘 알려지진 않은 20세기의 위대한 지도자 하빕 부르귀바(Habib Bourguiba)를 배출한 나라이다.

부르귀바는 튀니지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1950년대 중반부터 30년간 정교분리의 세속주의적 방식으로 나라를 통치한 정치 지도자였다. 그의 통치하에서 튀니지는 웅장한 건물이나 강한 군대보다는 출산 제한, 여성 문맹 퇴치, 기초 교육에 더 많은 투자가 이루어졌다. 부르귀바는 여성들의 베일 착용을 철폐했고 이슬람 금식 기도 기간인 라마단의 영향력을 없애려 하였으며, 이집트의 안와 사다트(Anwar Sadat)가 예루살렘을 방문하기 10년 전 이미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그는 권위주의자였지만 그가 통치했던 튀니지는 매우 온건한 정치적 성향을 추구했고, 인종적, 종파적 갈등이 적었으며, 1980년대 이래로 민주주의가 자리 잡혀 온 나라가 되었다.

이슬람 세력이 부상하였지만 부르귀바가 통치하기에는 너무 쇠약해졌다. 그리하여 1987년 그를 대신하여 전(前) 내무부 장관이었던 벤 알리(Zine el-Abidine Ben Ali)라는 인물이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이집트의 무바라크(Hosni Mubarak)와 매우 유사한 인물이었다. 벤 알리는 비전을 제시하기보다는 규율을 도입하였고, 이슬람주의자들과 반대 세력을 죽이고 고문하였다.

벤 알리를 판단하기에 앞서 기억해야 할 것은 그가 튀니지의 경제와 중산층의 성장을 이끌어 냈다는 사실이다. 이런 발전은 스키피오 장군이 그어 놓은 문명과 비(非)문명의 경계선 포사 레기아를 넘어 튀니지 전역으로 퍼졌다. 하지만 국가를 독립으로 이끈 영웅으로 추앙받았던 부르귀바와는 달리 벤 알리의 업적은 특별히 부각되지 않았고 포악한 성격과 부패한 가족들이 주목을 받았다.

부르귀바의 뜻에 따라 튀니지의 군대는 작고 정치와 무관한 조직으로 존재해왔기 때문에 지금 튀니지의 군부는 국가기관 중에서 가장 공신력을 가진 조직이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튀니지 군대는 민중의 민주 항쟁을 용인하면서 시위 와중에 벌어지는 혼란에서 공공질서를 확립할 큰 버팀목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다른 북아프리카의 국가와는 달리 부유하고 안정되어 있는 튀니지라 할지라도 그 앞길은 아직 불확실하다.

이집트는 온 나라가 다수의 무슬림과 소수의 콥틱(Copt) 기독교인들과의 갈등에 노출되어 있기는 하지만 1952년 선포된 긴급군사법 아래에서 그럭저럭 효과적으로 통치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비해 알제리와 리비아 정부는 효과적인 조직이라고 볼 수도 없고, 튀니지와 같이 자랑스러운 전통을 가지지도 못했다. 사실 리비아는 가다피(Qaddafi) 지도자가 물러나면 튀니지보다 더 혼란한 상태가 될 것이다.

지독한 공동체주의(communalism)를 표방하는 레바논과 잠재적으로 유고슬라비아와 같은 몰락의 가능성을 가진 시리아는 종교적 분쟁으로 얼룩져있다. 1947년부터 1954년 사이 시리아에서 실시된 3번의 자유 선거는 종교와 지역에 기반을 둔 정치 세력을 몰락시켰고 뒤이어 부상한 군부는 시리아 국민으로 하여금 민주주의를 위한 어떤 준비도 시키지 않았다.

후세인(Hussein) 독재 정권이 무너진 이후 이라크에서는 수만 또는 수십만 명이 종교와 인종적 폭력에 의해 희생되었다. 이렇듯 독재자 이후의 사회는 종종 더 잔혹하기도 하다. 2011년의 중동의 민주화 혁명을 1989년의 동유럽과 비교하는 수많은 논의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순진한 발상이다. 중동에 민주주의가 도래한다는 것은 공산권의 쇄락에 따른 동유럽의 붕괴 그 이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중동에 민주화가 도래했다고 속단하기 어려운 이유들이 즐비하다. 1979년 왕의 폭정에 대항한 이란 혁명의 끝은 이전보다 더 극심한 권위주의적 종교 정권의 등장으로 마무리되었다. 같은 해에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벌어진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이슬람 성지 메카(Mecca)의 대성전(Grand Mosque) 장악은 지엽적 사태로 취급되었지만 이로 인해 사우디아라비아에 절대군주보다 더 포악한 독재가 출현할 뻔 했다. 2005년의 레바논의 체다(Cedar) 혁명은 실패했다.

하지만 기대할 만한 요소도 있다. 그 중 하나가 아랍어 케이블 방송이다. 케이블 방송은 중동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으며 한 지역의 사건을 다른 지역으로 파급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튀니지의 자스민(Jasmine) 혁명은 중동지역에 영향을 끼치며 반세기 동안 신음하고 있는 중동의 국가들에 경제적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 낼 거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

튀니지의 혁명이 전파되고 국제 사회가 아랍 전역을 주목하는 상황에서 중동의 국가들의 공통점 보다는 상이한 상황에 주목을 할 필요가 있다. 튀니지의 상황이 독특한 것처럼, 다른 나라들 역시 저마다의 독특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국제 사회가 각국의 특성에 주의를 기울일수록 각국에서 전개되는 정치적 소요 국면으로 인해 놀라는 일은 줄어들 것이다.

지역의 평화를 위해 염두해 두어야 할 요소는 민주주의에는 커다란 위험이 따른다는 사실이다. 이스라엘과 평화적 관계를 맺은 이들은 아랍의 민주주의자들이 아니라 이집트의 사다트나 요르단의 후세인(Hussein) 국왕처럼 아랍의 독재자들이었다. 강력한 독재자들은, 팔레스타인의 서안 지역(West Bank)의 압바스(Mahmoud Abbas)와 같이 선거에 의해 선출된 약한 지도자들보다 훨씬 쉽게 결단을 내릴 수 있다. 가자(Gaza) 지구에서 극단주의 단체 하마스(Hamas)를 집권하도록 만든 것은 바로 민주주의였다. 요르단의 압둘라(Abdullah) 국왕과 같이 진보한 지도자들이 시위로 인해 세력이 약화되는 것도 민주화 시위가 가져올 결과가 될 수도 있다.

출처: The New York Times, 2010년 1월 22일, 한국선교연구원(krim.org) 파발마 75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