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dj_ed.jpg오는 11월 3일 자카르타에서 '제10회 아시아선교협의회 자카르타 대회'가 시작된다.

이번 행사는 아시아선교협의회(AMA) 회장 제이콥 나후와이 목사가 자카르타 최대의 종교건물인 마와르 샤론 성전을 헌당하며 개최된다.

이번 대회에는 모든 대륙으로 부터 수천 명이 참가할 예정이며, 대회의 주제강연과 워크샵 등을 위해 30여 명의 국제 선교지도자들이 발표자로 선정됐다. 또 저녁 집회는 자카르타의 기독교인들을 함께 초청해 세계적인 부흥사들의 집회로 가질 예정이다.

AMA 창립자인 조동진 박사(조동진선교학연구소, 사진)는 "이 세대에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기 위해 모이는 이 역사적인 대회에 세계선교의 동역자되시는 여러분들을 초청한다"고 전했다.

한편 지난 2000년 이후 AMA는 2000년 자카르타에서, 2003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2006년 소아시아 에베소에서 대회를 가졌다. 이 세 대회는 지난 1975년이래 아시아선교협의회 창립멤버인 제이콥 나후와이 박사가 주도했다. 다음은 조동진 박사가 전하는 AMA 창립 배경이다.

아시아선교협의회(AMA) 창립 배경

1971년 가을 미국 선교 지도자들은 위스컨신 주 그린 레이크에 모여 교회와 선교의 상호관계에 대한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19771년 9월27일부터 10월1일까지 개최되었던 미국 복음주의선교협의회(EFMA)와 초교파선교단체협의회(IFMA) 공동주최의 교회와 선교의 관계에 대한 Green Lake Consultation에서의 일이다.

나는 역사와 시대의 변동에 둔감한 서구 선교 지도자들의 눈을 뜨게 하려면 보다 강력한 충격적 제안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왔다. 이를 위해 1970년 8월 26일로 30일까지 홍콩에서 국제선교협력기구 선교전략 회의를 가지고 서구 선교 세력과의 협력을 모색하기에 앞서 아세아 선교세력간의 협력과 네트웍을 구성할 필요를 확인하는 작업에 착수했었다.

나는 미국 위스컨신 주 그린 레이크에서 열리는 EFMA와 IFMA 선교전략회의에 가기 전에 먼저 아세아 국가들의 선교지도자들을 방문했다. 일본해외선교협의회 회장 하도리 아끼라 목사와 총무 후루야마 안드레 목사, 대만에서 중국해외선교회를 이끌고 있는 데이빗 랴오 목사와 죠셒 솅 목사, 홍콩의 필립 텡 목사, 태국의 위치엔 태국교회 총회 총무, 싱가포르의 챤두레이 감독과 G. D. 제임스 목사, 필리핀복음선교회와 사라왘복음선교회, 인도네시아선교회 회장 옥타비아누스 목사, 인도의사무엘 카말레슨과 데오도어 윌리암스 파키스탄의 바지르 지완 파키스탄교회 감독 등을 만나 동참 약속을 받았다.

나의 아세아권 선교협력 조직망 구축을 위한 이러한 대장정은 그 여세를 가지고 태평양 건너 북미 대륙의 위스컨신 그린 레이크의 서구 선교 세력의 1,000여명 지도자들의 대선교전략회의에 나타나 아세아선교 지도자들의 공동 명의로 서구 선교지도자들을 공식으로 초청하는 발표를 하기에까지 이른다.

개회식에서는 여러 저명한 선교학자와 선교지도자들의 강연과 발표가 오랜 시간 계속된 후 사회자 버질 거버 박사는 미국 밖에서 특별히 초청된 내빈을 소개한다고 말하면서 나를 단 위로 올라오게 했다. 나는 먼저 미국의 복음주의 선교단체의 대표적인 두 협의회가 이처럼 뜻깊은 교회와 선교간의 관계 정립을 위하여 소집된 전략회의에 100년 동안 피선교 지역이었던 아세아의 대표를 불러준 데 대하여 사의를 표했다.

그리고 나서 나는 곧바로 1960년 이후 서구 선교가 석양을 맞이하고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지금은 교회와 선교간의 관계 정립보다 더 시급한 것이 선교의 계승 세력으로서의 비서구 국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선교의 새 세력들과의 관계 정립이라고 말했다.

나는 방금 아세아 14개국을 순방하고 각 나라의 선교지도자들을 만나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아세아 선교 지도자들이 세계선교의 새 시대를 맞기 위한 “아세아 선교지도자들간의 컨설테이션”을 1973년 8월에 대한민국 서울에서 가질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기독교 역사상 최초로 가지게 되는 비서구 교회의 선교지도자들이 주최하는 이 역사적인 회의를 서구 교회 선교지도자들에게 알리고 미국 선교단체들의 대표들을 초청하기 위해서 왔다고 했다. 나의 이러한 도전과 호소에 개회식장을 가득 메운 1,000여명의 참가자들은 어리둥절해 하기도 하고 놀라기도 하는 것 같았다.

나의 한 주간 동안의 그린 레이크 선교 전략회의 참가는 1,000명에 가까운 참가자 중에서 랄프 윈터 박사와 죠지 피터스 박사, 단 두 사람의 미래지향적 선교학자를 선교의 새 역사 창조를 위한 동반자를 얻은 데 만족해야만 했다.

1971년 늦가을의 위스콘신 그린레이크 에서의 서구선교 주세력이 새로 일어나는 아세아 선교 세력의 한 젊은 선교 개척자에게 받은 강력한 도전이 당장 그 자리에서는 지극히 적은 반응을 일으키는데 그쳤지만 그것은 선교의 새 시대를 알리는 파수군의 새벽 나팔소리였음이 틀림없다.

서울 ‘73 범아세아 선교 컨설테이션이 1973년 8월 27일부터 9월 1일까지 서울 우이동 숲속에 자리잡고 있는 크리스챤아카데미하우스에서 열렸다.

인도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파키스탄, 월남, 캄보디아, 대만, 홍콩 등 일본을 제외한 모든 아세아 국가 대표들의 여비와 유럽과 미국에서 오는 옵서버들의 여비도 전액을 우리가 부담하기로 했다. 당시 한국의 가난한 경제 실정으로서는 상당히 무거운 짐이었지만, 한국이 영국이나 미국 같은 나라의 참가자들의 여비를 부담한다는 데 대한 뿌듯한 자부심과 기쁨을 체험했다. 아마도 이 회의에 초청받았던 유럽이나 미국의 참가자들 뿐만이 아니라 아세아의 다른 나라에서 초청된 다른 참가자들도 아세아의 한 작은 나라의 교회로부터 회의 전체의 비용과 여비를 지급받은 것이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아세아의 서부에서 온 파키스탄과 인도와 방글라데시의 선교지도자들이 뚜렷하게 반 서구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비하여, 인도네시아와 타일랜드와 필리핀과 싱가포르, 말레이지아 등 동남아세아 국가들에서 온 대표들은 타협적이면서도 아세아적 차별성을 지키려는 자세가 이 역사적인 아세아 선교 컨설테이션의 성격을 뚜렷이 보여주는 것 같았다.

서부아세아나 동남아세아 국가 대표들과는 달리 대만, 홍콩 같은 중국계 국가 대표들이나 일본과 한국의 대표들은 중용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공정한 비판자적 자세를 보이면서 서구 선교의 역사적 공헌에 대하여 상당히 긍정적 입장을 취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러한 아세아 지도자들의 솔직한 감정 표현을 처음 경험한 영국과 미국 등 서구 교회 선교지도자들과 학자들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나는 하는 수 없이 타협안을 내놓았다. “6일간의 회의 일정 중 처음 사흘간은 아세아지도자들만의 회의로 하고 후반 사흘은 동과 서가 한자리에 모이는 합동회의로 하자”는 안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타협안도 오랜 토론 끝에 서구 참가자들의 자격을 엄격히 제한하자는 수정안이 만들어져는 것이었다. 6일간의 회기 중 후반 2일만으로 서구 참가자들의 제한하자는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발언자는 조지 피터즈 박사와 아더 글라써 박사와 랄프 윈터 박사, 그리고 피터 와그너 박사 네 사람으로 국한하자고 했다. 그 들의 발언도 지정해 준 제목에 따라 논문 발표만 하고 질문에 대한 답변만 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이들의 참가 자격은 “선교에 관한 Resource Person으로 정하자”고 했다. “미국 선교단체대표로 참석한 미국 복음주의외국선교단체협의회(EFMA) 총무 클라이드 테일러 박사와 미국 초교파외국선교단체협의회(IFMA) 총무 젝 푸리제인 박사는 내빈으로서 인사할 시간을 주는 것으로 그치게 하자”고 했다.

개회식에서만은 동과 서가 모두 자리를 함께 했다. 사회를 맡은 나는 환영사를 하면서 “주 예수 안에는 동서와 남북이 차별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In Christ there is no East or West in Him no South or North but one great fellowship of love throughout the whole wide earth로 시작되는 찬송을 다 함께 일어서서 손에 손을 잡고 불렀다.

회회의 스케줄과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찬두 레이 감독이 나섰다. 아세아 대표들만의 회의가 4일간 먼저 있고 남은 2일간은 동과 서가 한자리에서 선교의 선진 세력인 서구 선교학자들의 발표를 듣기로 했다고 말하고 그렇게 해야만 할 이유를 거침없이 당당하게 설명해 나갔다. 회의장은 순식간에 찬물을 끼어 얹은 것 같이 싸늘하게 얼어붙는 것 같았다.

개회식 후 조지 피터즈 박사가 “이게 누구의 짓이요? 우리는 나흘 동안 무얼 하고 있으란 말이요?”며 나에게 항의해 왔다. 나는 피터즈 박사의 손을 붙잡고 “ 깊이 생각하시고 아시아인들의 심정을 이해하려고 노력해보십시오. 아시아인들은 지난 한 세기 동안 서구 선교지도자들의 어떤 중요한 선교정책회의에도 초청되었던 일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선교 역사를 창조하려고 계승과 단절의 중대한 기로에 서 있습니다. 선교의 새 세력의 탄생을 위한 역사적 시간에 아시아인들의 단결을 위한 저들만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모든 토의 내용은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 모두 문서로 배부될 것입니다.” 하면서 양해를 구했다.

이 컨설테이션에서는 세계선교에 대하여 연합된 아세아인의 분명한 소리를 낼 수 있었다는 것이 이 회의를 계획했던 나의 큰 소득이었다.

나는 이 회의의 기조강연을 위하여 여러 달 동안을 준비헀다. 그것은 이 회의를 처음부터 기획했던 사람으로서 아시아인들의 세계선교를 위한 분명한 역사적 책임을 밝힐 책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기조강연은 회의가 끝나는 순간까지 중심 토론 주제가 되었다. 나의 기조강연의 줄거리는 “단절과 계승”, “석양과 새벽” 그리고 또 2000년대를 준비하기 위한 새로운 “선교구조와 선교전략” 그리고 나서 이것을 성취하기 위한 아세아인들의 “단결과 협력”의 당위성에 관한 논리를 전개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서구인들은 나의 강력한 서구선교로부터의 단절에 대한 논리에 크게 당황하는 것이었다. 아세아 대표들도 나의 단절의 강조에 크게 충격을 받고 아세아 교회와 서구 선교와의 역사적 관계를 어떻게 바르게 청산할 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는 서구 문화 식민정책과 유착된 서구 선교문화와의 단절을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비 서구세계의 교회가 서구 문명 이식의 연장으로서의 기독교선교를 계승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자는 것이지, 서구 교회가 자기 본국에서 가지고 있고 지키고 있는 숭고하고 순결한 신앙을 거부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우리가 계승해야 할 것은 정복과 국력 신장의 도구로 얼룩졌던 오욕스러운 서구선교를 계승해서는 안된다는 뜻이었다. 우리가 계승해야 할 참 역사는 사도적인 선교임을 강조하는데 나의 목적이 있었다.

나는 서구선교의 석양을 예언하고 새벽을 준비하는 제삼세계의 새로운 선교세력의 도래를 예언했다. 나는 이러한 세계선교의 역사를 여는 새아침은 주후 2000년이 되기 전에 온다고 했다. 그래서 새로운 선교의 시대를 감당할 수 있는 새 선교구조를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새로운 선교구조와 함께 필요한 것은 새로운 역사에 대처하고 선교의 영적 싸움에서 승리를 쟁취하기 위한 선교전략 수립의 긴급성에 대하여 호소했다.

이처럼 회의가 아세아인들의 입장과 아세아인들의 소리가 거침없이 밝혀진 성격이 뚜렷한 진정한 아세아인의 회의로서의 성과를 거두었다는 사실은 한해를 지나 스위스의 로잔에서 개최된 로잔 세계복음화대회에서 나타났다. 로잔 세계복음화대회 준비위원회는 나를 세계선교 구조 갱신 분과토의 기조 발표자로 지명했다. 그리고 선교의 새 역사 창조를 다루는 전체회의에서 아세아의 소리를 대변하도록 초청되었다. 로잔 대회의 첫날 회보에는 내가 발표한 선교구조 갱신의 이론이 소개 되었다. 그리고 한해 후에 발행된 로잔 보고서에는 선교의 역사 단절과 계승에 대한 나의 발표와 선교구조 갱신에 관한 논문 전문을 수록했다.

이러한 서구 선교지도자들의 방향 전환은 다음 해인 1975년 8월 또다시 서울에서 소집된 아세아선교협의회 창립총회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다. 아세아선교협의회 창립총회는 기독교 선교에 관한 서울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문의 작성을 맡았던 나는 기독교 선교의 성서적 원리와 역사적 해석 그리고 종말론적선교를 위한 미래선교의 틀을 마련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이 서울선언은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선언과 함께 1970년대 이후의 선교의 방향을 바꾸는 기초를 마련하였다.

조동진 박사 (조동진선교학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