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 하나님께 묻지 않는가
성경
열왕기하 1장 1-17절
서론
위기는 내가 무엇을 믿는지를 드러냅니다
사람은 평안할 때는 자신이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가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예상하지 못한 위기가 찾아오면 달라집니다. 갑자기 병이 들고, 사업이 흔들리고, 자녀에게 문제가 생기고, 관계가 무너지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무엇인가를 붙잡으려 합니다. 바로 그때 믿음의 실체가 드러납니다. 위기는 믿음을 만들어 내기보다 내가 무엇을 믿고 있었는지를 드러냅니다.
성경을 보면 실패한 사람들에게서 반복해서 발견되는 한 가지 모습이 있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께 묻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기브온 사람들이 낡은 옷과 신발, 오래된 떡을 증거로 내놓자 그들의 말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결정적인 실수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어떻게 할지를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수 9:14) 눈으로 확인했고 사람의 설명도 들었지만 하나님께 묻는 과정이 빠졌습니다.
사울의 마지막도 마찬가지입니다. 역대상은 그의 몰락을 설명하면서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대상 10:14)라고 기록합니다. 유다 역시 국가적 위기에서 하나님보다 애굽의 힘을 의지하자 하나님께서는 “애굽으로 내려갔으되 내 입에 묻지 아니하였도다”(사 30:2)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반대로 다윗은 달랐습니다. 블레셋이 공격해 왔을 때 그는 하나님께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삼하 5:19). 그리고 얼마 후 블레셋이 다시 쳐들어왔을 때도 자신의 경험을 의지하지 않고 다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삼하 5:23). 이미 한 번 승리했던 전쟁이었지만 다시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다른 방법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묻는 사람은 경험이 있어도 묻고, 성공해 보았어도 다시 묻습니다.
하나님께 묻는다는 것은 내가 이미 결정해 놓은 것을 허락받는 일이 아닙니다. “가라” 하시면 가고, “멈추라” 하시면 멈출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 묻는 사람과 묻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기도의 횟수보다 내 인생의 최종 결정권을 누구에게 두고 있느냐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아하시야는 하나님께 묻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는 북이스라엘의 왕이었고 아합과 이세벨의 아들이었습니다. 성경은 그가 “그의 아버지의 길과 그의 어머니의 길과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였다”고 평가합니다(왕상 22:52). 아버지 아합은 사마리아에 바알의 신전과 제단을 세웠고(왕상 16:32), 어머니 이세벨은 바알 숭배를 적극적으로 후원하며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박해했습니다. 그 박해가 얼마나 심했던지 오바댜가 선지자 백 명을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공급해야 했습니다(왕상 18:4). 아하시야는 부모에게서 왕위만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대했던 태도와 삶의 방향까지 이어받았습니다.
잠언 22장 6절은 말씀합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마땅히 행할 길’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삶의 방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녀에게 물려줄 중요한 유산 가운데 하나는 바로 길입니다. 부모가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자녀는 기도를 배웁니다. 부모가 말씀을 붙들면 자녀는 말씀의 가치를 배웁니다. 부모가 위기의 순간 하나님을 찾는 모습을 보이면 자녀는 어려울 때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배웁니다. 그러나 아하시야는 부모에게서 잘못된 길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오랫동안 보고 배웠던 길은 위기의 순간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본론
1. 위기의 순간, 누구를 찾느냐가 믿음입니다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하였더라.” 아합 시대에 모압은 북이스라엘의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왕하 3장 4절을 보면 모압 왕 메사는 이스라엘 왕에게 새끼 양 십만 마리와 숫양 십만 마리의 털을 바쳤습니다. 상당한 규모의 조공을 부담하던 속국이었습니다. 그러나 아합이 죽자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여기서 ‘배반하였다’는 것은 단순히 두 나라의 관계가 나빠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압이 이스라엘의 지배에서 벗어나려 했다는 뜻입니다.
아합은 하나님 앞에서는 악한 왕이었지만 정치·군사적으로는 주변 국가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그의 죽음과 새로운 왕의 즉위는 모압에게 독립을 시도할 기회로 보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1절은 단순한 역사적 배경이 아닙니다. 아하시야의 통치가 시작부터 흔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국가적 위기에 이어 개인적인 위기까지 찾아옵니다.
2절입니다.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는 그의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매” 고대 이스라엘의 집은 평평한 지붕이나 상층 공간을 생활공간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네가 새 집을 지을 때에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신 22:8)라고 명령했습니다. 성경은 아하시야가 왜 떨어졌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높은 곳에서 떨어졌는지, 어느 부위를 다쳤는지, 정확한 병명이 무엇인지도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관심은 사고 자체보다 사고 이후 그가 무엇을 했는가에 있습니다.
1절에서는 왕국이 흔들렸고, 2절에서는 왕의 몸이 무너졌습니다. 밖에서는 모압이 이스라엘의 통치에 저항하고, 안에서는 자신의 생명까지 위태로워졌습니다. 국가적 위기와 개인적 위기가 한꺼번에 찾아온 것입니다. 바로 그때 아하시야의 믿음이 드러납니다.
2절 후반입니다. “사자를 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이 병이 낫겠나 물어 보라.” 에그론은 가사·아스돗·아스글론·가드와 함께 블레셋의 다섯 주요 성읍 가운데 하나였습니다(수 13:3; 삼상 6:17). 그곳에서 바알세붑이 숭배되고 있었습니다. ‘바알’은 ‘주인’, ‘세붑’은 ‘파리’를 뜻하여 일반적으로 ‘파리의 주’라는 의미로 설명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바알세붑이 어떤 신이었느냐보다 이스라엘 왕이 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두고 블레셋의 신에게 자신의 생사를 물었느냐는 것입니다.
아하시야의 질문은 간단했습니다. “내가 이 병에서 낫겠는가?” 병든 사람이 낫기를 원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자신의 앞날을 알고 싶은 것도 자연스럽습니다. 문제는 질문의 내용이 아니라 질문의 대상이었습니다. 아하시야는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 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아버지 아합 시대에 엘리야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죽음의 가능성이 눈앞에 다가오자 하나님이 아니라 바알세붑을 찾았습니다.
성경은 이런 행위를 엄중하게 경고합니다. “너희는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을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19:31) 오늘날에도 미래가 불안하다는 이유로 운세와 사주, 점술과 미신적 방법에서 답을 찾으려는 유혹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다른 영적 대상을 찾아 미래를 묻는다면 아하시야의 선택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병원에 가지 말거나 전문가의 도움을 받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의료와 전문 지식의 도움을 받는 것과 하나님을 대신할 영적 대상을 찾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우리는 필요한 도움을 받되 삶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잠언 3장 5~6절은 말씀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아하시야의 가장 큰 문제는 다락에서 떨어진 데 있지 않았습니다. 몸은 다락에서 떨어졌지만, 그의 믿음은 이미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있었습니다.
2. 하나님께 묻지 않아도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3절에서 장면이 바뀝니다. 아하시야가 보낸 사자들이 에그론에 도착하기도 전에 여호와의 사자가 엘리야에게 말씀합니다. “너는 일어나 올라가서 사마리아 왕의 사자를 만나” 아하시야는 하나님께 아무것도 묻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가 사람을 어디로 보냈는지, 무엇을 물으려 하는지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시편 139편에서 다윗은 고백합니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시 139:2-3) 우리가 하나님께 말씀드리지 않는다고 하나님께서 모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과 걱정뿐 아니라 무엇을 계획하고 무엇을 의지하는지도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하시야에게 보내신 첫 말씀은 그의 병에 대한 설명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이것은 정보를 얻기 위한 질문이 아닙니다. 책망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내가 있는데 왜 나에게 묻지 않았느냐?” 아하시야에게 하나님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셨지만, 그는 하나님을 없는 분처럼 대했습니다.
예레미야 2장 1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를 두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하나님을 떠나는 순간 사람은 반드시 다른 것을 찾습니다. 문제는 그곳에 생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하시야에게 필요한 것은 에그론의 신탁이 아니라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중요한 결정을 할 때 모든 계획을 세우고 마지막에 하나님께 허락을 구하는 식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묻는다는 것은 내가 결정한 것을 승인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고 그 뜻에 내 선택을 맞추는 것입니다.
3. 아하시야는 바알세붑에게 물었지만 하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열왕기하 1장에는 ‘묻다’라는 표현이 의도적으로 반복됩니다. 2절에서는 “이 병이 낫겠나 물어 보라.” 3절에서는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6절에서는 “바알세붑에게 물으려고 보내느냐.” 그리고 16절에서 다시 “바알세붑에게 물으려 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반복이 이 장의 핵심을 보여줍니다. 신앙은 무엇을 묻느냐만큼 누구에게 묻느냐가 중요합니다. 아하시야는 “내 병이 낫겠습니까?”를 물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느냐?”고 되물으셨습니다. 아하시야는 결과를 알고 싶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관계를 문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4절에서 하나님의 대답이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여기서 “그러므로”가 중요합니다. 히브리어 ‘라켄’은 ‘그러므로, 그렇기 때문에’라는 뜻입니다. 앞의 행동과 뒤의 결과를 연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네가 다락에서 떨어졌으니 죽는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3절의 불신앙과 4절의 심판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만 이 말씀을 모든 질병에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두고 제자들이 누구의 죄 때문인지 물었을 때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요 9:3)고 말씀하셨습니다. 아하시야의 경우에는 본문 자체가 그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심판을 직접 연결하기 때문에 그렇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또한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한다”는 것은 단순히 오랫동안 누워 있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로 뒤에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고 설명합니다. 즉 이번 병상에서 회복하여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는 사망 선고입니다.
여기에는 역설적인 장면이 있습니다. 아하시야는 왕좌에서는 수많은 사람을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자기 몸 하나를 침상에서 일으킬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권력은 다른 사람을 움직일 수 있어도 생명을 지배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아하시야가 바알세붑에게 답을 구했지만 바알세붑의 대답은 한 마디도 듣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사자들이 에그론에 도착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답하셨습니다. 신명기 32장 39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빼앗을 자가 없도다.” 생명과 죽음의 주권은 바알세붑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4.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면 돌이켜야 합니다
사자들은 엘리야의 말을 듣고 왕에게 돌아갑니다. 그런데 아하시야의 반응이 이상합니다. 그는 “내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잘못했느냐?”고 묻지 않습니다. 7절에서 이렇게 묻습니다. “너희를 만나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한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더냐?” 사자들이 그의 모습을 설명하자 아하시야는 즉시 알아봅니다. “그는 디셉 사람 엘리야로다.”(8절) 그는 엘리야를 알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아합 시대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선지자라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회개해야 합니다. 그의 아버지 아합조차 나봇의 포도원 사건으로 심판의 말씀을 들었을 때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고 자신을 낮춘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왕상 21:29) 그러나 아하시야에게는 그런 모습조차 없습니다. 말씀을 들었지만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야고보서 1장 22절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듣는 것만으로 신앙이 깊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 앞에서 자신을 보고, 잘못된 방향을 고치고, 돌아설 때 말씀이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말씀을 모르는 것보다 더 위험한 것은 말씀을 알고도 돌이키지 않는 것입니다.
5. 왕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높습니다
9절부터 아하시야는 오십부장과 군사 50명을 엘리야에게 보냅니다. 첫 번째 오십부장이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의 말씀이 내려오라 하셨나이다.” 그러자 엘리야가 말합니다.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너와 너의 오십 명을 사를지로다.” 불이 내려옵니다. 그런데도 아하시야는 두 번째 오십부장과 군사들을 보냅니다. 이번에는 더 강하게 명령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의 말씀이 속히 내려오라 하셨나이다.” 다시 불이 내려옵니다.
여기서 충돌하는 것은 엘리야와 군대가 아닙니다. 왕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아하시야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낮추는 대신 왕의 권력으로 하나님의 선지자를 움직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권력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배할 수 없습니다.
이사야 40장 8절은 말씀합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아하시야의 명령은 엘리야를 굴복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하시야에게 하신 말씀은 결국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17절입니다. “왕이 엘리야가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죽고.” 왕의 말은 실패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성취되었습니다. 사람의 권력은 지나가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서 있습니다.
6. 무릎을 꿇은 사람이 살았습니다
13절에서 세 번째 오십부장이 등장합니다. 앞의 두 사람과 태도가 전혀 다릅니다. 그는 엘리야 앞에 올라와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간청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원하건대 나의 생명과 당신의 종인 이 오십 명의 생명을 당신은 귀히 보소서.” 첫 번째 사람은 “내려오라”고 명령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속히 내려오라”고 재촉했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사람은 명령하지 않고 자신의 생명을 맡깁니다. 그는 앞선 두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권위가 왕의 권위보다 높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여기서 아하시야와 세 번째 오십부장이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아하시야는 침상에 누워 있습니다. 몸은 낮아졌지만, 마음은 낮아지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 오십부장은 스스로 걸어 올라왔지만 하나님의 사람 앞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잠언 18장 12절은 말씀합니다.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
아하시야의 몸은 결국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더 심각한 것은 그의 마음이 끝내 하나님 앞에 내려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세 번째 오십부장은 무릎을 꿇었고 자신과 부하들의 생명을 보존했습니다. 몸이 낮아지는 것과 마음이 낮아지는 것은 다릅니다. 질병이 사람을 자동으로 겸손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고 실패가 저절로 사람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같은 위기를 만나도 어떤 사람은 마음을 더 굳게 하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중요한 것은 위기가 아니라 위기 앞에서 내가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느냐입니다.
결론
왜 내게 묻지 않았느냐
열왕기하 1장을 시작했던 아하시야의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내 병이 낫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하시야에게 던지신 질문은 전혀 달랐습니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느냐?” 아하시야는 자신의 미래를 알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물으셨습니다.
결국 그는 바알세붑의 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가장 큰 비극은 다락에서 떨어졌다는 것도,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했다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는데도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수많은 질문을 합니다. “이 병이 나을까요?” “사업이 다시 일어날까요?” “우리 자녀가 잘될까요?” “이 문제가 해결될까요?”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보다 먼저 물으십니다. “너는 지금 누구를 의지하고 있느냐?”
예레미야 33장 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야고보서 1장 5절도 말씀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하나님께 묻는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도만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병원에 갈 때도 하나님께 묻고, 사람의 조언을 들을 때도 말씀으로 분별하며,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도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내 생각과 달라도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묻는 사람은 답만 원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답에 순종할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내가 있는데 왜 다른 곳에서 답을 찾느냐?” 다윗처럼 경험이 있어도 다시 묻고, 세 번째 오십부장처럼 하나님의 권위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고백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 121:1-2) 우리의 환경이 흔들릴 때, 예상하지 못한 일이 찾아올 때, 인생의 방향을 결정해야 할 때 가장 먼저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문제가 없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문제가 생겼을 때 하나님께 묻는 것이 믿음입니다.
![]() |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위기의 순간마다 세상보다 먼저 주님을 찾게 하시고, 내 생각과 경험보다 주님의 뜻을 먼저 묻게 하옵소서. 말씀하실 때 겸손히 듣고 순종하게 하시며,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만이 나의 도움이심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최원호 목사 (서울 상봉동 은혜제일교회)














![[이미지 묵상]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https://missionews.co.kr/data/images/full/14265/5-17.jpg?w=196&h=128&l=50&t=40)
![[이미지 묵상]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 9:27)](https://missionews.co.kr/data/images/full/14264/9-27.jpg?w=196&h=128&l=50&t=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