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3,400년 전, 모세의 인도로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뒤쫓던 이집트 파라오를 위시한 이집트 왕실의 지도자, 군대, 사제 모두는 홍해에서 죽음을 맞았다. 당시 이집트는 우리가 현재 경험하는 것보다 백배, 천배 위중한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가질 수 없는 한 가지 이점이 있었다. 그들은 극도로 고립되어 있었는데, 그들의 패전 상황을 국내외에 비밀로 유지할 수 있을 정도였다. 또 파라오를 비롯한 왕국의 수뇌부가 사망한 이후에도 그 사실을 감추고 왕국을 지켜내려 했다.
기독일보에서는 아마존에서 영어권 크리스천 독자들에게 호평받는 출애굽 진실에 관한 30여 년 간의 끈질긴 탐구 결과물인 『Battle for the Firstborn』 번역본을 발췌해 소개하며, 이스라엘 출애굽 당시 왕국을 지키려는 이집트 상황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파라오를 위시한 애굽의 고위층과 군대가 전멸했지만, 당시 두 수도인 멤피스와 테베의 궁전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애굽은 전염병을 겪으며 황폐해졌지만, 왕국은 여전히 건재했다.
죽은 자들을 모두 장사한 후, 그들에게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새로운 왕이었다. 전통적으로 새로운 파라오는 황제 아내가 섭정하는 왕의 장남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평상시가 아니었다. 애굽 온 땅에 사람이나 짐승 중에 첫째는 하나도 없었다.
새 왕을 세운다 해도 가나안과 시리아와 레바논에 있는 요새에 주둔하여 부하들을 감독하고 보호하는 군인들 외에는 군대가 없었다. 이집트의 고대 문서에는 출애굽 직후의 사건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없지만 튀르키예에서 발견된 매우 중요한 석기 설형문자 문서가 있다.
무르실리의 히타이트 문서
오늘날 보가즈코이(Bogazkoy)라고 불리는 하투사(Hattusa)의 고대 히타이트 기록 보관소에서 파라오 사망 당시 왕좌에 있던 히타이트 왕 수필룰리우마(Suppiluliuma)의 아들 무르실리가 남긴 비문이 발견되었다. 그는 이상한 이야기를 전했다. 히타이트 왕 수필룰리우마(Suppiluliuma)는 카르케미시(Carchemish)에 있었고 레바논에 위치한 암카(Amqa)로 군대를 보내 이집트 요새를 공격했다.
“내 아버지가 카르카미스 지방에 있는 동안, 그는 루파키스(Lupakkis)와 테섭자마스(Tessub-zalmas)를 암카(Amqa) 지방으로 파견했다. 그들은 암카 지방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추방자들과 소와 양들을 아버지보다 먼저 집으로 몰고 왔다.” (『Ancient Near Eastern Texts』, edited by James B. Pritchard, p.319)
그런 다음 그는 자기 아버지가 이집트에서 받은 매우 난해한 편지를 이야기했다.
“이집트 땅의 사람들은 암카에 대한 공격 소식을 듣고 두려워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들의 영주 비부루리야스(Bibhururiyas)가 막 죽었기 때문에 과부가 된 이집트 여왕이 아버지에게 사절을 보냈습니다. 내 남편이 죽고 나는 아들이 없나이다. 사람들은 당신에게 아들이 많다고 하니 당신의 아들 중 한 명을 나에게 보내면 그가 내 남편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를 내 남편으로 보내주십시오.” (Pritchard, p. 319)
미망인 여왕의 이러한 요청은 이전과 이후 모두 고대 이집트에서 들어 본 적이 없다. 아마도 절망 가운데 내린 결정이었을 것이다. 결국, 히타이트 국가는 이집트의 이 지역 지배에 다가오는 위협이었다.
아멘호테프 III세는 미탄니 공주와의 왕실 결혼을 통해 미탄니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다른 상황이었다. 히타이트인들은 강력했고 그들이 진실을 알게 되면 이집트에 실질적인 위협이 되는 것이다. 과부가 된 왕비는 히타이트의 아들을 데려와 이집트의 왕으로 삼겠다고 제안했다. 이것은 전혀 들어 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수필룰리우마는 분명히 이러한 요청에 의아했다.
이 미망인 여왕은 자신의 나라에 남아 있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하인임을 분명히 했다. 죽은 아멘호테프 III세와 투탕카멘의 아내를 포함하여 이집트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완전히 의욕을 잃었다.
그리고 어떤 아내가 그 편지를 썼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학자들은 죽은 파라오 ‘비부리아(Bibhuria)’의 이름을 ‘투탕카멘’으로 부른다. 그의 이름 중 하나가 ‘Neb-kheper-ru-re’였기 때문이다. 아멘호테프 III세의 이름 중 어느 쪽이든 증거는 똑같이 강력하다. 편지를 보낸 사람이 누구였든 이집트에서 재앙이 일어났다는 증거는 분명하다. 이 요청이 너무 이상해서 수필룰리우마는 처음에 그녀를 믿지 않았고, 그의 아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버지는 그 말을 듣고 대제사장을 평의회에 불러 이렇게 말했다. ‘예로부터 그런 일은 내 이전에 일어난 적이 없다.’ 당신은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나에게 달라. 그들은 나를 속이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왕자가 있는지에 대해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나에게 다시 가져오시오! 하투-지티스(Hattu-zitis)가 이집트 땅에 없는 동안 아버지는 카르카미스성을 정복했다…. 신뢰하는 이집트 사절 하니스(Hanis)가 그에게 왔다. 내 아버지가 하투-지티스를 이집트 땅으로 보내면서 지시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들에게는 왕자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나를 속이려고 할 수도 있고 내 아들 중 한 명이 왕권을 가지는 것을 정말로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집트 여왕은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아버지에게 대답했다. “그들이 나를 속이려고 할지도 모릅니다. 내게 아들이 있다면, 내가 외국에 나 자신과 내 왕국에 굴욕적인 그런 방식으로 편지를 쓰겠습니까? 당신은 나를 믿지 않고 그런 말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내 남편은 죽었고 아들이 한 명도 없나이다. 내가 어찌 내 종 하나를 취하여 남편으로 삼으리까? 나는 다른 나라에 편지를 쓰지 아니하고 당신에게만 썼나이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당신에게 아들이 많다고 하더이다. 당신의 아들 중 한 명을 내게 보내주십시오. 그는 이집트 땅에서 내 남편이자 왕이 될 것입니다. 아버지가 너그러워서 미망인의 뜻대로 아들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Pritchard, p.319)
수필룰리우마는 마침내 여왕을 믿고 아들을 보냈다. 그러나 기록이 계속되는 것처럼 그 아들은 결코 이집트에 가지 못했다. “내 아버지는 이집트 영토인 암카(Amka)라는 지역을 공격할 보병들과 전차병들을 보냈다. 그는 군대를 보냈고, 다시 공격했다. 그러나 내 아버지가 자기 아들 중 한 명을 그들에게 주매 그들이 그를 그리로 인도하다가 죽였도다.” (Pritchard, p.395)
이것은 자신을 구하려는 겁에 질린 왕국의 모습을 보여 준다. 강력한 히타이트는 이제 그들의 가장 큰 두려움이었다. 이집트에 남은 유일한 군대는 속국 영토에 주둔한 군대뿐이었고 그들은 곧 소환될 수 있었다. 파라오의 아내가 하인이라고 부르는 천한 계층을 제외하고는 그 나라의 인구 중 남자가 크게 줄었다.
시간은 천천히 흐르고 이집트인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들에게 유리했던 조건 하나는 이집트가 나머지 왕국들과 고립된 지역에 있다는 사실이다. 주변 군대들이 이집트에 도착하기 훨씬 전에 발각되지 않고는 누구도 이집트로 들어갈 수 없었다. 다른 이웃들이 실제 상황을 분별하지 못하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이집트 내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유일한 사람은 사망한 아멘호테프 III세의 가족, 특히 그의 아내 티예였다. 티예 여왕은 죽은 남편에게 크게 사랑받고 존중받은 것으로 모두에게 알려져 있었고 단순히 그가 과부라는 것만으로도 큰 권력을 휘둘렀다.
그녀는 파라오가 만든 많은 공식 발표문에 그녀의 이름을 쓴 최초의 여왕이었다. 한가지 예는 파라오가 외국 공주와 결혼한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진정한 왕족을 위해 남겨진 카르투슈에 동봉되기도 했다. 우리는 이 여성의 배경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지만, 파라오가 그의 아내와의 결혼을 위해 헌정한 풍뎅이(부적)에 아내 가족의 이름을 넣었기 때문에 그녀의 부모가 누구였는지 알 수 있다.
유야(Yuya)와 투야(Thuya)는 티예 부모의 이름이었다. 그들의 묘지는 1905년에 발견되었으며, 왕실 매장 명령에 따라 부장품과 관이 들어 있었다. 그들은 아멘호테프 III세의 법정에서 칭호를 받았다. 그들은 또한 아문의 두 번째 선지자인 아넨(Anen)이라는 아들이 있었지만, 아멘호테프가 황제 파라오가 되기 전에 그가 죽었다는 증거가 있다. 어디에도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증거에 따르면 아이(Ay)는 유야와 투야의 또 다른 아들이므로, 아멘호테프 III세의 아내 티예의 형제였다. 그는 왕실에서 가장 높은 지위인 투탕카멘의 총리였다.
파라오 아이(Ay) - 권부의 상징
황폐해진 이집트에서 시간이 흘렀다. 그러다 새로운 파라오가 왕좌에 나타났다. 출애굽이 발발한 지 얼마나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1년 안에 비교적 일찍 일어났을 것이다. 티예의 형제 아이(Ay)는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선택되었다. 아멘호테프 III세의 처남은 왕좌에 대한 정당성이 필요했고 분명히 그는 젊은 투탕카멘의 과부인 안케세나문(Anhkesenamun)을 그의 여왕으로 연관시켰다.
젊은 안케세나문이 훨씬 나이 많은 남자와 상징적으로 결혼한 것에 대해 어떻게 느꼈는지 잘 모르겠지만, 모두가 국가를 위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일을 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안케세나문이 그의 여왕이라는 유일한 증거는 반지에 통합된 두 왕의 이름이 있는 풍뎅이 장식이었다.
젊은 투탕카멘의 작고 뒤죽박죽인 묘지의 벽에서 장례권을 관리하는 아이(Ay)가 등장한다. 그는 파라오가 아니라 표범 가죽을 입은 대제사장인 ‘신성한 아버지’로 나타난다. 아이(Ay)는 젊은 투탕카멘의 총리였으며 아멘호테프 III세의 아내인 티예와의 관계로 인해 이 직위를 받았을 것이다. 나는 아이(Ay)가 그의 삼촌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가 수석 관리였던 젊은 공동 섭정과 가까웠다고 주장한다.
아이(Ay) 장로를 권부에 임명하는 것은 필요한 조치였으며 아멘호테프 III세의 또 다른 어린 아들이 왕위에 오를 만큼 나이가 들 때까지 아들은 권부의 상징에 불과했다. 투탕카멘의 이 어린 아들이자 형제는 아버지와 형제가 죽은 직후에 왕좌를 차지하기에는 분명히 너무 어렸다. 아이(Ay)가 왕좌에 오르면서 티예는 어린 아들을 위해 미래의 왕실 직위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후기 비문에서 아이는 테이(Tey)라는 아내와 함께 등장한다. 나는 그녀가 그의 여동생이자 익사한 아멘호테프 III세의 아내인 티예와 동일하다고 믿는다.
그는 파라오의 지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 그녀를 왕비로 지명했을 가능성이 크다. 아니면 티예가 권력을 휘둘렀다고 믿고 있으므로 그렇게 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것은 왕족 사이에서 형제자매가 결혼하는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그것은 또한 파라오의 혈통을 물려주는 용인된 전통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아이(Ay)의 통치에 대한 다른 증거는 거의 없으며 그의 통치는 약 4년으로 추정되지만, 일부 학자들은 그것이 14년만큼 길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용할 수 있는 문서가 너무 적기 때문에 투탕카멘의 남동생이 왕좌에 오르기에 적당한 나이가 되기까지는 그보다 몇 년 더 오래 지속되었을 것이다. 장기간에 걸친 논쟁은 이 청년이 왕위에 올랐을 때 이미 아내와 자녀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전적으로 결백하다!’
히타이트 왕 수필룰리우마(Suppiluliuma)의 아들이 과부가 된 파라오 아내의 남편이 되기 위해 이집트로 보내졌을 때 살해된 사건과 관련하여 아이(Ay)에 관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히타이트 기록 보관소에서 발견된 아이(Ay)의 편지에는 왕의 아들을 죽인 혐의를 부인한 내용이 나와 있다. 이것은 히타이트 왕이 그를 이 극악무도한 범죄로 힐난했음을 분명히 증명한다.
젊은 히타이트 왕자에게 일어난 일에 관한 진실은 아마도 절대 알려지지 않을 것이다. <끝>
※이 글은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투탕카멘의 죽음』에서 발췌해 소개합니다.
글: 메리 넬 와이엇(Mary Nell Wyatt·사진) 번역: 리진만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