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는 ‘이스라엘’이라는 단어가 2,336회 사용되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과 관련된 사건들을 제외하면 남는 것이 거의 없다. 성경은 ‘이스라엘 민족’으로 시작되었고 전개되었고 현재도 진행되고 있다. 그래서 기독인들은 이스라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 안에서 국가적, 민족적 비전을 갖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여정에서 이집트 민족이 무릎을 꿇고 그분이 주님임을 알게 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필요했다. 이스라엘 민족이 풀려나기 전에 그들은 집 문 주위의 인방(引枋) 기둥에 어린 양의 피를 바름으로써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했다. 여기에는 믿음의 행위와 순종이 필요했다.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당시 이집트인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따랐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손으로 그들에게 닥친 무서운 재앙 후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본지에서는 출애굽 진실에 관한 저자의 30여 년간의 끈질긴 탐구 결과물로, 아마존에서 영어권 크리스천 독자들에게 호평받는 『Battle for the Firstborn』의 번역본인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투탕카멘의 죽음』의 내용을 발췌하여 소개함으로써 이스라엘 출애굽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장자(이스라엘)를 위한 전투
▲이 사진들은 모두 원래 상태의 투탕카멘 묘지를 보여준다. ⓒHarry Burton/ Public Domain

고대 기록의 증거에 따르면, 파라오와 그의 군대는 모세와 큰 무리를 뒤쫓았을 때 이집트의 모든 신들의 사제직 전체를 데리고 갔다. 그는 참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다. 이집트 군대가 그들 신들의 손에 의한 초자연적인 개입이 필요했다면 바로 이때였다.

마침내 큰 무리가 구불구불한 와디를 빠져나와 모든 백성과 그들의 양 떼와 소 떼를 모두 수용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큰 해변에 이르렀다. 그러나 오른쪽으로는 산들이 바다와 만나 그 방향으로 갈 길이 없었고, 왼쪽으로는 산들이 바다를 잠식하고 있고 이용할 수 있는 해변은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좁았다. 사람들은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몰랐다.

백성의 불평이 모세에게 쏟아졌다. 기적을 본 후에도 사람들의 믿음은 흔들리고 있었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구해 주실 것을 기다리라고 그들에게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파라오가 이끄는 애굽 군대가 와디를 빠져나와 나타났다. 두려움이 군중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구출은 불가능해 보였다. 모세가 그들에게 말했다. “당신들이 오늘 보는 이 애굽 사람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들을 구하여 주시려고 싸우실 것이니, 당신들은 진정하십시오.”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자, 바다가 갈라졌다. 그런 다음 큰 무리는 마른 땅으로 약 10마일(약 16km)의 먼 거리를 건넜다. 파라오의 군대가 그들을 추격했고 천사들은 병거 바퀴를 제거했고 군대는 몹시 두려워하여 해안으로 물러나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맞은편 물가에서 모세가 다시 손을 바다 위로 내밀자, 물이 함께 닫히며 온 군대가 익사했다.

장자(이스라엘)를 위한 전투
▲이 사진들은 모두 원래 상태의 투탕카멘 묘지를 보여준다. ⓒHarry Burton/ Public Domain

이것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 신성한 기적이었다. 하나님은 오래전에 넓은 해변, 구불구불한 와디, 비록 매우 깊지만 완만하게 경사지고 백성과 그들의 수레와 양 떼를 위해 나아갈 수 있는, 물을 가로지르는 길을 예비하셨다. 만물을 창조하신 분만이 그런 일을 하실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거대한 군대에 있던 이집트 군인들이 마지막으로 본 것이었다.

다음 날 아침에 이스라엘 자손들은 해변에 널브러져 있는 이집트 군인들의 시체를 보았다. 병거를 탄 이스라엘 청년들은 무기를 몸에 차고 사람들은 무기를 모았다. 그들은 이제 거대한 군대로부터 자유로워졌고 시내산으로 행진을 계속하면서 무장했다.

파수꾼들은 산 전체와 이집트로 돌아가는 광야 길을 따라 재앙의 소식을 전했다. 이 전달 내용이 멤피스의 궁전에 다시 도착했을 때, 그것은 너무 기상천외했기에 믿을 수 없었다. 전체 군대, 모든 사제, 그리고 파라오 자신이 홍해에서 익사한 것이다. 온 나라의 혼란과 슬픔과 고통은 헤아릴 수 없었다. 일어난 일에 대한 모든 정보를 비밀로 유지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적의 희생양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애굽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또 다른 즉각적인 조치가 필요했다. 온 나라에 걸쳐 모든 가족은 죽음의 천사에게 당한 장자를 장사 지내야 했지만, 그 장례식을 집행할 제사장이 없었다.

투탕카멘의 매장

장자(이스라엘)를 위한 전투
▲묘지 안에는 10'10"x16'5"x9' 크기의 큰 황금 사당이 있었다. 이 사당 안에는 3개의 신사가 더 있었는데, 하나는 다른 것 안에 있었다. ⓒWikimedia Commons -Je-str

약 3,300년 후, 또 다른 기적이 드러났다. 1906년 테오도르 데이비스는 많은 왕릉이 발견된 왕가의 계곡을 발굴하고 있었다. 그는 은닉처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투탕카멘이라는 이름이 적힌 파란색 물 주전자를 발견했다.

다음 해에 그는 동굴을 발견하고 지하 21피트(약 6m)의 방으로 따라 내려갔다. 이 방에는 투탕카멘, 그의 아내 안케세나문, ‘신성한 아버지’인 아이의 실루엣이 있는, 금박 몇 개가 들어 있는 부서진 나무 상자가 있었다.

장자(이스라엘)를 위한 전투
▲중간 관(위)과 가장 안쪽 관(아래) ⓒWikimedia Commons-A. Parrot / CC EY-SA

이곳에서 남쪽으로 약 100야드(약 91m) 떨어진 우물굴에서 그들은 투탕카멘이라는 이름이 적힌 마개가 달린 항아리와 같은 다른 물건들을 발견했다. 항아리 하나는 투탕카멘 재위 6년의 천으로 싸여 있었다. 미라를 감싸기 위한 아마포 더미 옆에서 내용물이 먼지로 변한 작은 가방들이 발견되었다. 천에는 일종의 반원형 가발 커버 3개와 같은 목적을 위해 가장자리로 특별히 짜진 미라용 붕대 50개가 포함되어 있었다.

발굴자들은 그들이 젊은 투탕카멘의 매장지 유적을 발견했다고 가정했다. 그들은 외부인들이 그의 봉사에서 착용했다고 추정되는 푸른 구슬이 달린 올리브잎 바닥에 얽힌 수레국화와 푸른 연꽃의 꽃목걸이를 발견했다. 그들은 그의 묘지를 찾았고 그것이 강도들에 의해 황폐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투탕카멘의 묘지가 아니었다.

1922년 하워드 카터가 그 지역에서 왕릉을 계속 찾고 있었을 때, 그는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이 젊은 왕의 실제 묘지를 발견했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것은 세상에 알려진 것 중 가장 놀라운 발견이었다! 책은 젊은 투트를 둘러싼 신비에 대해 말하지만, 이러한 신비는 성경의 맥락에서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지금까지 왕릉에서 발견된 가장 큰 보물은 역사의 작은 인물을 위한 이 묘지에 있었고 모든 학자는 이 묘지가 왕을 위해 지어진 것이 아니라는 데 동의한다. 파라오의 왕실 매장은 사치스러웠지만 투탕카멘의 묘지는 그렇지 않았다.

투탕카멘의 이름이 포함된 항목이 있는 매장지의 초기 발견에서 매우 이상한 것이 발견되었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미라화 과정이었고 방부처리소 대신 은닉처 현장에서 수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장자(이스라엘)를 위한 전투
▲세 번째이자 마지막 내부 관에서 두 번째 관을 들여다보는 하워드 카터. 내부 관은 22k 금 2,448파운드(약 1,100kg)였다. ⓒWikimedia Commons-Exclusive to the Times

보통 왕실의 미라와 장례는 70일의 시일이 소요되며, 시신을 조심스럽게 싸서 관에 안치한다. 그런 다음 행렬에 의해 묘지로 옮긴다. 그러나 그의 묘지와 이전 매장지 위치의 증거는 매장을 서둔 인상을 남겼다. 묘지가 처음 열렸을 때 모든 것이 무질서했다. 전차는 분해되어 다시 조립되지 않았다. 그것은 혼돈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분명히 매우 서두르면서 이루어졌다. 절묘한 항목은 일반적으로 병거와 함께 적절한 순서로 설정되었을 것이다.

그것을 본 모든 사람의 첫 반응은 충격과 경외였다. 분명한 의미는 장례부장품이 매우 급히 묘지에 매장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어떤 주요 묘지에서도 이런 종류의 혼란을 나타내지 않았다. 일부는 묘지가 도둑맞았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유물이 그렇게 혼란스러웠을까? 그러나 그것이 도둑맞았다는 증거는 없다.

장자(이스라엘)를 위한 전투
▲중간 관이 처음 열렸을 때 젊은 투탕카멘의 장례식 가면 ⓒPublic domain

묘지 안에는 10'10"x16'5"x9' 크기의 큰 황금 사당이 있었다. 가장 작은 사당 안에는 석관과 일치하도록 급히 칠한 거친 화강암의 깨진 뚜껑이 있는 웅장한 작업의 붉은 사암 석관이 있었다. 이 석관 안에는 금으로 칠한 나무 미라가 있었다. 미라의 발이 너무 길어서 석관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단순히 발을 대패질하고 그 아래에 떨어진 나무 부스러기를 남겨 두었다.

이 미라 형태의 관 안에는 또 하나가 다른 하나 안에 두 개 더 있었다. 투탕카멘의 미라를 포함하고 있는 마지막 것은 순금 22k의 2,448파운드였다. 안에는 순금 데스마스크를 쓴 미라가 있었다. 그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미스터리를 더해 묘지에 있는 수많은 물건의 이름이 변경되어 다른 이름에서 투탕카멘의 이름으로 변경되었다.

게다가, 묘지에는 많은 유물이 있었지만, 어떤 종류의 왕관도 보이지 않았다. 묘지의 보물 부장품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솜씨는 훌륭했지만, 석관에는 임시변통 덮개가 있다. 묘지 자체는 분명히 왕을 위해 지어진 것이 아니다.

미라의 상태도 충격이 컸다. 일반적인 미라화 과정은 몸에서 모든 수분을 제거하기 위해 70일 동안 몸을 천연 소다액에 담그는 과정을 포함한다. 그러나 투탕카멘의 관이 열렸을 때 그의 미라는 이 절차가 제대로 수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다.

장자(이스라엘)를 위한 전투
▲투탕카멘 석관에서 발견된 황금 미라 마스크 ⓒPixabay

투탕카멘 미라의 모든 부드러운 조직은 봉인된 관의 열과 습기로 인해 몸에 쏟아진 일종의 자연 연소로 탄화되었다. 그의 몸이 완전한 미라화 과정을 거쳤다면 이 습기는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모든 첫 번째 사람들이 묻힐 것이고 정교한 의식을 수행할 제사장이 없는 것으로 보이며, 시신들은 빠르게 방부 처리되고 입관 된 후에 서둘러 묻혔다.

그의 죽음의 시간에 대한 긍정적인 표시는 그와 함께 묻힌 꽃에서 나온다. 합환채와 수레국화는 3월 말과 4월에 만개하여 그의 죽음의 시간을 유월절의 정확한 시간으로 정했다.

장자(이스라엘)를 위한 전투
▲아멘호테프 Ⅲ 세가 아주 어렸을 때의 동상 ⓒRandall Lee

어린 소년을 위한 묘지가 만들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 묘지가 누구를 위해 만들어졌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묘지의 많은 장식이 그를 위해 만들어지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그의 묘지에는 두 명의 미라화된 태아가 있었는데, 아마도 만삭에 이르지 못한 그의 자녀이거나 열 번째 재앙으로 첫아들을 잃은 다른 가족 구성원의 태아일 것이다.

그의 아버지인 아멘호테프 Ⅲ세를 위해 막대한 비용을 들여 만든 장례 도구가 그의 아들을 매장하는 데 사용되었다는 증거가 있다. 아멘호테프 Ⅲ세는 마지막으로 홍해로의 운명적인 군사 출정에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들이 필요하지 않았다.

장자(이스라엘)를 위한 전투
▲출애굽의 파라오 아멘호테프 Ⅲ 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하다가 홍해에 빠져 죽었다. ⓒRandall Lee

많은 부속물의 이름이 변경되는 것 외에도 관의 얼굴은 젊은 투탕카멘의 얼굴이 아니라 젊은 시절, 그리고 성인이 된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젊은 아멘호테프 III세의 많은 조각상은 젊은 투탕카멘에서 발견되는 데스마스크(사람이 죽은 직후에 그 얼굴을 본떠서 만든 안면상) 및 미라 형태와 매우 유사하다.

아멘호테프 III세의 장인인 케루프(Kheruef)의 묘지에서 발견된 멋진 보석류와 관련하여 묘지 주인 케루프가 파라오 아멘호테프 III세에게 그가 만든 멋진 보석을 선물하는 그림이 있다. 많은 학자는 이것들이 투탕카멘의 묘지에서 발견된 부장품들과 사실상 똑같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 부장품들이 그의 아버지의 것이라는 또 다른 증거이다.

리진만 선교사
▲리진만 선교사

그러나 묘지에는 젊은 투탕카멘이 실제로 누구인지에 대해 완전히 다른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혼란을 일으킨 다른 부장품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그가 처음 묻힐 때 그의 묘지에 두지 않았다. 그러한 사실은 나중에 다시 공개될 것이다. 그것은 사건들이 전개됨에 따라 설명될 것이다.

그 당시 애굽은 슬픔으로 가득했고 이스라엘 자손은 광야를 지나 시내산으로 가고 있었다. <끝>

※이 글은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투탕카멘의 죽음』에서 발췌해 소개합니다.

글: 메리 넬 와이엇(Mary Nell Wyatt) 번역: 리진만 선교사(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