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 도성에 복음을 전한 첫 선교사들이 다녀간 지 이미 한 세기가 훌쩍 넘었다. 늦은 감이 있지만 오는 9월 초 원주선교 관련 초기 사진 자료를 발굴·정리해 화보집으로 펴내 기록하고, 초기 선교역사를 후세들에게 전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복음과 선교의 본질을 생각하며 원주 지방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 첫 사람들부터 이를 가꾼 사람들을 Ⅰ편에 이어 연대순으로 정리해 소개한다.
2-8. 원주지방 첫 지방회 결성 및 첫 감리사, 박원백 목사 <1911년>
1911년 6월 보고에 의하면, 당시 원주지방회 교인들은 입교인 36명, 세례인 351명, 학습인 791명, 원입인 2,182명 등 총 3,360명으로 보고되었다. 1909년 본격적으로 시작한 북감리회의 강원도 지방 선교가 이제 막 시작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종래 서울 지방에서 관리하던 원주에 1911년 6월 원주지방회를 결성하게 되었다.
원주지방회가 결성되자 첫 감리사로 박원백 목사가 파송되었다. 박원백 목사는 1894년 기독교에 입교하였으며, 1900년 3월 평양 남산현교회에서 선교사 노블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1904년부터 전도사 직첩을 받았고, 1908년 미감리회로부터 집사목사, 1911년 장로목사 안수를 받았다. 원주 지방 감리사로 파송되기 전에는 해주 지방에서 목회를 하였다. 이로써 원주 지방은 여주와 원주, 횡성, 평창을 잇는 중부선교 벨트(서-동)와 강릉, 삼척, 울진, 평해를 연결하는 동해안 선교라인(북-남)을 구축하게 되었다.
2-9. 원주 지방을 방문한 첫 감독, 해리스 <1912년>
원주지방회가 결성된 후 처음 원주읍교회당에서 열린 원주지방회에 당시 미감리회조선연회 회장인 해리스 감독이 참석했다.
“최초의 원주지방회는 1912년 2월 7~9일까지 열렸는데, 참석자는 해리스 감독, 노블 감리사, 우래빗 목사, 앤더슨 목사(의사), 박원백 감리사, 권신일 목사였으며, 제반 사무 처리를 할 때 임시회장은 노블 감리사, 서기는 박현일이 담당하였다.”12)
1915년 12월 22일 계출된 조선총독부 관보 규칙에 의거, 신고한 자료 1916년 3월 30일 1094호 7면 포교계출(布敎屆出)에 의하면 원주선교부 첫 파송 주재 여선교사는 힐만 선교사이다.
힐만 선교사는 1892년 오하이오 웨슬리 대학을 졸업하고 선교사 파송 이전, 뉴욕 헤르키머에 있는 폴츠 선교연구소에서 잠시 공부했다. 1915년 말 원주선교부로 전임해 와 10여 년간 원주 강릉지역 선교사역에 임했으며, 1925년 서울로 이전, 정동에서 조선예수교서회 번역 일을 하였다.
힐만 선교사는 1870년 4월 21일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출생했고, 1928년 2월 1일 서울에서 소천해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2-11. 원주선교부 파송 첫 전도부인, 안경숙(安瓊淑) <1915년>
개화 초기 당시 한국의 문화와 관습에 의하여 남녀가 한자리에 모여 예배를 드리거나 교육받을 수 없었다. 1916년 박원백 감리사 보고에는 “마커(Miss Marker) 양이 2회의 사경회를 개최했고, 프레이(Miss Frey) 양이 2명의 전도부인을 보내줬다”라고 나와 있다.
따라서 원주선교부에는 이미 1915년에 2명의 전도부인이 사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당시 1명은 원주 서미감병원 앤더슨의 한국인 조사의 부인 클라라(Clara, 세례명)로, 앤더슨을 도와 여성 환자를 심방하며 전도했다. 그러나 원주에 파송된 첫 전도부인은 바로 강신화 목사와 함께 사역한 안경숙13) 전도부인이다.
2-12. 원주선교부 주재 첫 외국인 감리사, 모리스 선교사 <1916년>
모리스 선교사는 1900년 미국 감리교 해외선교부의 파송으로 한국에 왔다. 내한 초창기 5년 동안 모리스 선교사는 평양에 거주하며 평양 이북지역 선교를 담당했다. 그가 맡은 지역은 영변, 혜천, 원산, 선천, 맹산 등 10여 개 지역이었다. 1906년부터 6년 동안은 평안도 영변선교부 책임 감리사로 활동했다. 1916년부터 원주 선교부에서 원주를 중심으로 문막, 제천, 영월, 평창, 정선, 이천, 강릉 등을 책임지는 감리사로 활동했다. 선교 환경이 가장 열악한 강원도를 담당한 모리스 선교사는 불철주야 몸을 사리지 않고 오지를 오가며 선교에 전념하다가 1926년 말경 동해안 전도여행 중 간과 위에 악성종양이 악화되어 1927년 1월 18일 세브란스 병원에서 소천했다.
강원도 감리사였던 신홍식 목사는 모리스 선교사가 헌신했던 원주읍교회 마당에 ‘모리스 선교사 기념비’를 세워 “선교에 충성을 다하고 힘을 다 쏟았다(宣敎盡忠竭力)”라는 글귀로 그를 기렸다.
2-13. 원주 지방 목회자를 역임한 첫 독립운동 유공자, 이병주 전도사 <1919년>
이병주 전도사는 1924년부터 1925년까지 원주 지방에 소속된 단양교회, 1926년부터 1927년까지 충주 목계교회, 1927년부터 1929년까지 문막교회에서 사역했다. 이병주 전도사는 충남 논산 출신으로, 3.1만세 운동 당시 연희전문학교 학생회장으로서 서울에서 전개된 학생 연합 만세 시위를 주도하고,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였다.
이병주 전도사는 출옥한 뒤 일경의 감시를 피하여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1921년 8월에 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太平洋會議 外交後援會)를 발기 조직하게 되자, 그는 서기(書記)로 피선되었다. 또한 1922년 2월에는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경기도(京畿道) 대의원(代議員)으로 피선되어 활동하였다. 1922년 10월 1일에는 김구(金九), 조상섭(趙尙燮), 손정도(孫貞道) 등과 함께 한국의 독립은 오로지 무력을 양성하여 혈전(血戰)함으로써 실현될 수 있다는 주장 아래 발족된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에 참가하였다고 한다. 1923년 3월에 그는 국내 활동을 위하여 인천을 통해 들어오다가 다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에는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2-14. 독립운동으로 체포된 첫 원주지방 목회자들 <1920년>
1920년 3월 17일 <기독신보>에 감리교 목회자와 교인들이 대거 경찰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고 있다는 기사가 실렸다. “원주지방 순행목사 방기순 씨와 전도사 조윤여 씨, 철원 박연서 전도사, 강릉교회 목사 안경록 씨는 모사건으로 인하여 당국에 체포되었다더라.” 당시 방기순 목사는 횡성교회 담임이었고, 조윤여 전도사는 원주교회를 담임하고 있었다.
2-15. 원주 지방 출신 첫 순교자, 황덕주 목사 <1950년 순교>
황덕주 목사는 원주군 문막읍 반계리 862번지에서 태어났다. 1917년 4월 문막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21년 3월 졸업하고 공주로 내려가 1925년 3월 영명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25년 4월 원주 서미감병원에 취직하여 근무하다가 첫 목회지인 영월구역(1930~1931년)에서 목회한 후 다시 원주로 왔다.
해방 이후 평양이 공산당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자 남하해 대전형무소 교무과장 형목(刑牧)을 하다가 6.25가 발발해 문막면 반계리에 계시는 어머니를 모시고 피난하기 위해 고향 반계리에 와서 여주로 넘어가는 삿갓봉까지 갔는데, 지방 빨갱이들에게 잡혀 그들이 만든 내무서에 구금되었다가, 9.28 수복 이전 북한군이 후퇴하며 처형해 순교하게 되었다.
Ⅲ. 원주지방 첫 교회 창립과 첫 선교 관련 기관
3-1. 원주지방 첫 개신교회 창립, 원주제일교회와 문막교회 <1905년>
『원주제일교회 100년사』에는 교회 창립일을 1905년 4월 15일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문막교회 117년사』에는 교회 창립일을 1905년 4월 1일로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원주 지방의 첫 교회는 어디로 보아야 하는가? 이를 밝히는 것은 복음과 선교의 본질을 생각해보면 그리 중요한 사항은 아니다.
여기에서는 양 교회사에 기록된 교회 창립일의 근거라 할 수 있는 원전 사료가 없어 어느 교회 창립이 먼저 되었는가 하는 명확한 판단은 할 수 없고, 다만 사료에 근거한 교회 설립 경과를 소개하고자 한다.
원주제일감리교회(原州第一監理敎會)는 현재 교회를 대표하는 이름이지만, 시대에 따라 공식 또는 비공식적으로 아래와 같은 별명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 서원촌 예배당: 무스 선교사가 원주읍교회 창립 당시 원주교회가 위치한 상동리 115번지 동리에 따른 옛 이름을 사용했다.
* 읍후동(邑後洞)미감리교회: 원주군 본부면 읍후동. 1916년 4월 13일 포교소 계출 시 사용했다.
* 원주읍교회: 원주교회가 원주읍 내 유일한 교회일 때 일제 치하의 ‘1면 1교회’ 정책하에 있을 때 사용한 이름이다.
* 원주제일교회(원주교회): 제2교회(학성교회)가 1952년 4월 21일 창립하며 원주읍교회 명칭을 변경하여 현재 원주제일교회로 사용하고 있다.
문막감리교회(文幕監理敎會)는 현재 교회를 대표하는 이름이고, 처음 창립할 때 교파명은 사용하지 않았다.
* 문막교회(文幕敎會): 창립 초기부터 현재까지 문막교회를 대표하는 이름이다. 다만, 6.25 전쟁기간 중 몇몇 타교단 교회가 문막에 설립되기 시작하며 교회 공식 명칭을 ‘문막감리교회’로 사용하고 있다.
3-2. 원주 지방 첫 기독교 교육기관
1) 원주읍교회 유치원 <1916년 12월 16일 설립>
원주읍교회에서 운영하던 이 유치원은 설립 이후 ‘정신유치원(貞新幼稚園)’이라 불렸으며 초대 원장으로 힐만 선교사, 초대 보모로 한세련 씨가 맡았다. 문막교회에는 1917년 11월 20일 취학 전 어린이를 위한 유치원이 설립되었다.
2) 매일학교(Day School) <1912년 설립 추정>
원주, 강릉 지방 매일학교 통계표(1912~1918)에 의하면, 1912년 원주 1곳에 매일학교가 있었다. 앤더슨 부인(Mrs. A. G. Anderson)은 보고에서 그들 부부가 처음 원주에 왔을 때, 적은 무리이지만 소망이 있는 교인들이 있었고, 주일학교와 매일학교를 한국인 감리사 부인이 운영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앤더슨 부인은 이 사역에 함께했으며, 이 지역에 파송된 여성 해외선교회 첫 여성 선교사로서 이 지방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
3) 원주 의정학교(義貞學校) <1913년경>
원주읍에 설립된 사립남녀공학 교육기관인 의정학교의 시작은 1913년 어간으로 보인다, 원주 지방 최초의 남녀공학이던 의정학교는 일제에 의해 1917년 원주공립보통학교와 병합되었다. 참고로 1913년 당시 횡성에는 정화여학교가 있었다.
3-3. 원주 지방 첫 근대병원, 서미감병원 <1913년>
1912년 앤더슨 의사가 원주선교부 선교 의사로 파송되며 ‘시카고스웨덴병원’ 설립이 추진되었다. 1913년 8월 앤더슨 의사 가족이 원주에 도착했고, 원주 첫 근대병원인 서미감병원 개원은 11월 15일이었다. 서미감병원은 강원도 남부 지역에 설립된 최초의 서양식 근대 병원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3-4. 원주 지방 첫 근대 교회당 건축물, 원주읍 원동성당 <1913년>
원주읍에 세워진 첫 근대 교회 건축물은 1913년 2월 21일 뮈텔 주교에 의해 성당축성이 이뤄진 원동성당이다. 당시 원동성당은 건평 70평 붉은 벽돌 양옥으로 건축되었다.
원주읍에 건축된 첫 개신교회 건축물은 원주읍교회당으로, 1916년 상동리 398번지에 70평의 연와조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부지 1,200평은 김신해 성도의 기증, 건축비는 미국 스웨덴 교회로부터의 원조”14)를 받아 지었다. 새 교회 건물이 완성되고 1916년 11월 18일(토요일) 첫 예배를 드렸으며, 1916년 12월 17일(수요일) 웰치 감독에 의해 헌당식이 거행되었다.
Ⅳ. 결론 및 제언
원주지방회는 1911년 6월 결성되었고 첫 감리사로 박원백 목사가 임명되었다. 아래 자료는 1912년 연회에서 보고한 원주지방회 소식이다.
“원주 지방은 12개의 면에 약 400,000명의 인구가 있다. 원주 구역에는 전체 2,860명의 등록 교인이 있다. 34개의 교회가 있으며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기도처에 54개의 예배모임이 있다. 원주 구역을 다 순행하려면 2,000리를 걸어야 하고 약 45일이 소요된다. 원주 구역에는 2명의 안수목사가 있고 4명의 본처 전도사와 6명의 권사가 사역하고 있다. 이 구역에 전도부인은 없다. 600여 명이 지난겨울 사경회 때 성경공부를 했다. 우리 지역에는 한 개 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 7개 공립학교, 4개 사립학교가 있으며 전체 학생 수는 800명이다....”
위에 소개한 원주지방회 보고 이후 111년이 지난 2022년 현재 원주에는 366개 지역교회와 8개의 군인교회, 1개의 경찰교회, 그리고 30개의 기독교 기관으로 원주시기독교연합회가 구성되어 있다. 당시 2명의 안수목사뿐이었던 원주읍과 비교해 무려 200배나 많은 목회자가 사역하고 있으며, 200배에 달하는 교회가 설립되어 질적 양적으로 많은 성장을 하였다.
이러한 시점에서 원주에 복음을 전한 첫 사람들과 교회를 정리해 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행적을 몇 개의 문장으로 정리하는 데는 다소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 땅에 살면서 보여준 선교 사역은 파란만장했고, 또한 그들의 삶은 바로 개신교 초기 선교역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는 9월 초 선교역사 화보집 발간을 기화로 계속해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선교역사 자료들을 정리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한다.
첫째, 처음 이 땅에 복음을 전한 선교사들은 성실한 관찰자였다. 그들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철수하게 되던 시기까지 남긴 사진, 보고서, 일기, 편지 등에 묻어 있는 선교자료뿐만 아니라, 그들을 도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사명을 감당했던 토착전도인들의 자료들이 발굴되어 전해지기를 바란다. 이들의 복음에 대한 열정과 목숨까지 바치며 우리 민족을 사랑했던 선진들의 희생 정신이 후세들에게 전해지기를 기대한다.
둘째, 원주 지역에서 처음 조직적으로 선교를 시작한 1911년 이후부터 6.25 한국전쟁 시기까지 개신교 선교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원주지방회의 사료가 안타깝게도 1969년 이전 시기는 정리되어 있지 않다. 타지방에서는 이미 발굴 정리해 출간한 바 있는 이러한 초기 선교역사와 지역교회사 자료들을 정리하는 작업이 더 늦지 않은 시기에 실시되기를 바란다.
또한 개화기부터 원주 지역에는 감리교회, 장로교회, 성결교회를 시작으로 8.15 해방 이후 침례교회, 한국그리스도의교회, 순복음교회, 구세군교회 등이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설립하였다. 이 땅 위에 세워진 처음 교회 역사들을 더 많이 발굴하여 알림으로써 당시 우리 선진들의 뜨거운 영성,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정과 이웃사랑 정신이 원주 지방 모든 교회와 성도에게 다시 살아나기를 간절히 염원한다.
마지막으로, 일부 양반 계층 자제들만이 ‘서당’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던 때에 한국에 온 아펜젤러 선교사는 고종으로부터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는 학교 이름을 하사받았다. 이후 원주 지방에 온 선교사들도 복음 전파와 함께 아동들과 여성들에게도 교육의 문호를 넓히며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원주 최초의 교육기관을 설립한 이들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강원도 최초로 설립된 ‘정신유치원’과 여러 교회에서 운영했던 ‘매일학교’, 교회학교, 여학교, 중등학교, 그리고 성경학교와 사경회 등의 정신이 계속되기를 원한다. 최근 코로나 팬데믹으로 닫혀 있는 우리 이웃들과의 담을 헐고, 우리 교회들이 감당했던 자유·평등교육, 평생교육을 통해 교회가 계속 나아가야 할 선교적 사명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끝>
[미주]
12) <그리스도신문>, 1912년 2월 29일 자, 2면.
13) 제일감리교회 100년사에는 한자 표기가 ‘安敬淑’(안경숙)으로 되어있고, 힐만 선교사 1916년 보고서에는 ‘In Kyung Sook’으로 표기됨.
14) 원주제일교회 역사편찬위원회, 『원주제일교회 100년사』, 237쪽
※리진만 선교사는 우간다와 인도네시아 선교를 마치고 현재는 초기선교역사 자료를 연구하는 일을 하고 있다. 리 선교사는 아펜젤러와 존스가 1889년 8월 처음으로 내륙 지방을 순행한 후 작성한 두 분의 일기를 발굴해 최초로 번역 공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