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에 카스트를 연구했던 세 그룹 중에서 세 번째 그룹은 행정가 그룹이다. 영국의 동인도 회사는 1600년 12월 31일 영국 왕실의 칙허를 받아 근대식 주식회사로서 설립되었다. 동인도 회사의 활동 범위는 17세기에는 아프리카에서 일본에까지 미쳤는데, 주요 사업은 향료 무역이었다. 그러다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밀려서 17세기 말에는 인도로 후퇴하게 되었다. 설립 이후 1세기 동안 동인도 회사의 이사회는 “우리의 사업은 전쟁이 아닌 무역이다”라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인도에서는 유럽 경쟁국들의 세력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벵골(콜카타)과 마드라스와 봄베이를 주요 활동무대로 삼게 되었다.
동인도 회사는 1680년대 영국의 국왕으로부터 징병권, 사관 임명권, 교전권(交戰權) 등을 부여받아 그 권력이 한층 보강되었다. 그러다가 로버트 클라이브가 1757년에 플라시 전투에서 프랑스 동인도 회사에 승리하면서 18세기 중엽에는 인도에서 독자적인 지위가 확립되었다. 1765년은 토지세로 대표되는 벵골 지방의 조세 징수권을 무굴 제국 황제로부터 양도받으면서 벵골에서는 인도의 지배자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1757년에서 1785년 사이는 벵골주에 있던 동인도 회사가 행정적인 시스템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킨 시기였다. 행정가들은 행정적인 필요를 위해서 인도의 사회구조를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카스트 제도의 연구는 인도에서의 통치를 위해서 가장 큰 연구 프로젝트였다고 할 수 있다.
19세기 들어서 동인도 회사의 전제와 독점이 비난의 대상이 되면서 동인도 회사의 권한은 점차 본국 의회의 감독하에 들어갔다. 1814년 인도 무역의 독점 폐지, 차(茶) 무역의 독점 폐지, 인도 회사령(會社領)의 국왕에게 이양하는 절차가 이뤄졌다. 1857년에 세포이 항쟁이 일어나자, 영국 정부는 그 책임을 물어 동인도 회사의 운영을 정지시켰고, 인도 통치의 기능을 모두 영국의 국왕에게 헌납한 뒤 1874년 동인도 회사를 해산시켰다.
카스트의 기원과 현황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이뤄졌지만, 사회적 구분을 위해서 카스트 간의 순위를 지나치게 중요하게 취급하였다. 이로 인해 인도인들이 그전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던 카스트 간의 서열을 따지고, 다른 카스트보다 더 높은 지위를 차지하려는 시도를 하면서 카스트의 서열구조에 불을 지펴놓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는 행정적인 목적을 위해서 카스트를 조사하면서 오히려 카스트 간의 서열 싸움을 부추기는 고도의 식민 통치 전략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행정관료를 선발할 때도 지나치게 브라만 계급에서만 뽑히는 것을 지양하고, 여러 다른 카스트 그룹에서 골고루 행정관료를 선출함으로써 카스트 간의 경쟁을 부추기고 인도에 대한 통치를 원활하게 하려는 시도가 이뤄졌다.
현재에도 이뤄지고 있는 호혜적 불평등제도라고 할 수 있는 레저베이션이 제도적으로 안착된 것도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이뤄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카스트의 본질에 대한 이해보다 행정적인 필요를 위해서 카스트를 이해하고, 이를 효과적인 식민 통치를 위해 응용하려고 했던 행정가들의 태도에서 나온 필연적인 결과였다.
앞에서 언급한 세 가지 그룹들, 곧 오리엔탈리스트, 서양 선교사, 영국 식민지 정부 행정가의 연구는 초기 카스트 연구에서 서양 중심적인 관점에서 연구가 이뤄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카스트 제도 자체에 대한 이해보다는 외부인의 시각으로 카스트 제도를 바라보면서 인도 문화 전체에 대한 편협한 시각을 고착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서양인들의 사고 속에서 ‘인도의 문화는 힌두이즘이고, 그 힌두이즘의 바탕을 이루는 것이 카스트 제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yoonsik.lee2013@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