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에 헌신한 선진들의 정신과 신앙 계승해야
민족통일의 구심점으로 기독교가 자리 잡길 기대”

감리교단 파송기에 따르면 이병주 전도사는 1924~1925년 원주지방에 소속된 단양교회, 1926~1927년 충주 목계교회에서 담임 목회자로 있었지만, 충주 지역 교회들이 1927년 9월 11일 독립교회를 표방하고 감리회교단에서 이탈해 나갔다. 그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이병주 전도사는 마침 담임 교역자가 없는 문막교회로 와서 1928년까지 사역하였다. 그러나 이병주 전도사는 문막교회에 와서 1년을 넘긴 시점에서 사직하게 되었다.

당시 문막교회를 관리하고 있던 원주선교부 맥마니스(孟萬秀, S. E, McManis) 선교사가 1928년 10월 15일 미국 시카고에 있는 오스틴 스웨덴 주일학교(Austin Swedish Sunday School) 선교후원 부서에 보낸 편지에는 이병주 전도사가 1927년부터 1928년까지 문막교회 담임 전도사로 열성적으로 사역한 것을 소개했다. 또한 1928년 10월 첫 주에 열린 감리교연례회에서 이 전도사는 사직서를 제출하고, 목회의 사역을 내려놓고 개인 사업을 하려 한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볼 수 있다.

다시 이병주의 상해 망명 생활을 따라가 보자. <기독신보> 1922년 8월 30일 자 1면에 보면, 이병주 전도사는 출옥 후 상해로 건너가 망명 생활 초기에는 상해 인성학교(仁成學校)에서 교사로 봉사했다는 기사가 상해선인교회사(하)에 나와 있다.

인성학교는 1917년 상해에 있던 기독교 신자들이 한국의 어린 학생들을 교육할 기관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미국 조계지(租界地) 조풍로 재복리(兆豊路 載福里)에 한 칸 방을 세내어 ‘상해한인기독교학교’라 명칭하고 4명의 소학생으로 시작했다. 그 후 인성학교는 학생 수가 증가하여 상해인 교육의 효시가 되었다.

1919년 3.1운동의 여파로 망명객도 늘어나고 소학생도 증가해 법국조계지(法國租界地)24)로 학교를 확장해 옮겼고, 그해 겨울에 또 한 번 진비로 강령리(震飛路 康寧里)로 이전했을 때는 학생 수가 40명이 넘었다. 학교 운영의 주체는 기독교인들이 주로 맡았는데, 이병주 전도사는 바로 이 시기 인성학교에서 교사로 봉사했고, 당시 그와 함께 학교를 위해 일했던 교사들은 다음 기사에 상세히 나와 있다.

“1919년부터 지금(至今)까지 교장(校長)으로 전후노력(前後努力)하기는 김태연(金泰淵), 손정도(孫貞道), 여운홍(呂運弘), 안창호(安昌浩) 제씨(諸氏)요, 교원(敎員)으로 계속 근무(繼續勤務)하기는 김태연(金泰淵), 박영태(朴永台), 정애경(鄭愛敬), 김원경(金元慶), 윤종식(尹宗植), 김종상(金鍾商), 박춘근(朴春根), 김예진(金禮鎭), 김두봉(金枓奉), 김공집(金公緝), 유상규(劉相奎), 이선실(李善實), 이병주(李秉周) 제씨(諸氏)더라. 이들은 대부분 국내 3.1운동과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며, 그 때문에 인성학교는 독립군 양성학교로 인식될 정도였다.”

기사에 언급된 이병주(왼쪽 위 붉은색 네모), 이선실(오른쪽 아래)은 문막교회에서 사역했다. 이병주는 상해에서 독립군자금을 운반하던 규수를 만나 결혼했고, 이선실은 상해에서 독립운동가 김성근을 만나 결혼 후 문막교회가 설립한 의성학교를 운영했다.
▲기사에 언급된 이병주(왼쪽 위 붉은색 네모), 이선실(오른쪽 아래)은 문막교회에서 사역했다. 이병주는 상해에서 독립군자금을 운반하던 규수를 만나 결혼했고, 이선실은 상해에서 독립운동가 김성근을 만나 결혼 후 문막교회가 설립한 의성학교를 운영했다.

이병주 전도사가 문막교회에 오기 전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활동 사항은 독립유공자 공훈록 5권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이병주 전도사는) 출옥한 뒤 일경의 감시를 피하여 상해(上海)로 망명하였으며, 1921년 8월에 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太平洋會議 外交後援會)를 발기 조직하게 되자, 그는 서기(書記)로 피선되었다. 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는 1921년 8월 26일에 상해 법조계(上海法租界)에서 홍 진(洪震) 장 붕(張鵬) 김인전(金仁全) 김태연(金泰淵) 이 탁(李鐸) 신현창(申鉉彰) 조상섭(趙尙燮) 등이 모여서 태평양회의에 대한 외교활동을 후원할 목적으로 발기 조직된 단체이었다.

이들은 태평양회의에 참여한 열강은 동양 평화의 근본문제인 대한 독립을 완전히 승인할 때까지 적극적인 활동을 계속할 것과 내외 각 지방에 있는 각 단체 또는 개인은 모두 상호 협력하여 일치된 행동을 할 것,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대내외적으로 맹렬한 운동을 전개케 하며, 상당한 금전을 수합(收合)하여 경비에 충당할 것 등의 선언문을 발표하고 보다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을 촉구하였다.

또한 1922년 2월에는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경기도(京畿道) 대의원(代議員)으로 피선되어 활동하였다. 1922년 10월 1일에는 김 구(金九) 조상섭(趙尙燮) 손정도(孫貞道) 등과 함께 한국의 독립은 오로지 무력을 양성하여 혈전(血戰)함으로써 실현될 수 있다는 주장 아래 발족된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에 참가하였다고 한다. 1923년 3월에 그는 국내 활동을 위하여 인천에 상륙하다가 다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25)

이병주 전도사의 금강산 신혼여행(1923년)
▲이병주 전도사의 금강산 신혼여행(1923년) ⓒ이병주 가족 제공
이병주 애국지사의 손자 이동호(78) 씨와 연락이 되어 문막교회를 떠난 이후 이병주 전도사의 삶의 발자취를 물어보았다. 1944년생인 손자 이동호는 조부의 행적을 소상히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아래와 같이 실마리가 될 수 있는 기억을 되살려 증언해 주었다.

손자 이동호 씨가 태어난 곳은 금강산 자락 내금강면 장현리이다. 조부께서 일제의 감시대상 인물이라 비교적 일본 경찰의 손길이 느슨한 금강산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한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거기에는 원주교회 2대 담임을 역임한 윤성렬 목사가 금강여관을 운영하며, 감리교단 수양관도 있고 해서 윤 목사의 소개로 그곳으로 가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어쨌든 이병주 전도사는 강화도 자산가였던 처남의 도움으로 큰 땅을 금강산 인근 장현리에 매입해 과수원을 조성해 운영하다가, 해방 이전에 사과 수확 한 번 하고는 다시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 한다.

장손자가 어렴풋이 기억하는 조부 이병주 목사의 교회 사역은 진천교회에서 해방 전에 사역했다고 들었다고 하여, 필자는 진천감리교회로 연락을 해 이병주 전도사의 행적을 따라가 볼 수 있었다. 언제 목사안수를 받았는지 확인할 수 없었지만, 이병주 목사는 1943년 3월 10일 진천교회에 부임하여 홍형준 목사와 함께 1945년 광복이 되던 해까지 그곳에서 목회한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이에 더해 1946년 기독교조선감리회 제9회 동부·중부연회에서 파송된 천안지역 각 구역장 명부에 따르면, 조치원 구역장으로 파송되었다.

또한 진천군에서 1974년 발행한 『진천군지』에는 “…우리 진천에 도입한 것은 이월(梨月) 사람 박재환이 1924년 감화되어 감리교에서 개종하고, 침례를 받아 ‘설법’하기 시작하였다. 그 뒤 1948년도 감리교회의 이병주 목사 등 많은 교직자(敎職者)들이 본 ‘제7일안식일교회’로 개종하고…”라고 되어 있어, 안식일교회로 개종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었다.

1958년부터 1961년경까지 조부와 함께 마포형무소26) 도화동 마현관사 12호에 살았던 손자 이동호는 중학교 시절을 회상하며, 조부 이병주 목사는 마포형무소에서 교화사(형목, 刑牧)로 근무하셨다 했다. 교화사(敎化師)는 재소자들을 교화하고 지도하며, 수감생활을 잘하는 재소자 중 특사로 출감할 수 있는 수형인들을 추천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교화사로 근무하면서 도화동 인근 교회를 돌보았다고 하는데, 손자는 그 교회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렇게 교화사로 근무하던 중 재소자의 사기 행각에 말려들어, 수형자가 가지고 있다는 마그네슘 물질을 생산하는 특허위임장을 받아 형목 활동을 마치고 특허물질을 생산하는 공장을 설립했다. 그러나 온 가족의 재산을 거기에 쏟아부었다가 실패하는 바람에 가족이 풍비박산이 나게 되었다 한다. 가산을 다 잃고 홍제동 산동네에서 조부, 선친, 숙부 세 가족 여러 식구가 어렵게 살았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손자 이동호 씨가 기억하는 조부 이병주 목사는 가족들과 함께 가정 예배를 아침저녁으로 드렸고, 교화사 월급을 받으면 그 급여 대부분을 그가 관리하던 교회의 어려운 교인들을 위해 사용해 조모님이 살림을 꾸리시느라 많은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옆에서 보았다고 전했다.

최근 연락이 된 또 다른 손자 이선호 목사와 이은수를 통해 얻은 소식으로는, 그의 조부 애국지사 이병주 목사는 소천하시기 전까지 서울 신림동에 있던 은정교회에서 목회를 했다고 전해 주었다.

루이스 감독(중앙)과 스미스 선교사 부부(뒷줄 우측에서 첫 번째, 두 번째)와 일본인 관리들(1914~1915년 추정)
▲루이스 감독(중앙)과 스미스 선교사 부부(뒷줄 우측에서 첫 번째, 두 번째)와 일본인 관리들(1914~1915년 추정) ⓒGCAH Digital Galleries
6. 맺음말

지금까지 기독교계나 강원도 지역에 잘 알려지지 않은 원주지방 교회에서 목회했던 3인 전도사의 독립운동 활동을 따라가 보았다. 조선독립을 희망하며 군자금을 모집하고자 했고, 독립을 위해 무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주장도 펼쳤던 선열의 희생과 노고에 숙연해지고, 그들의 거룩한 의지와 행동에 존경과 감사함을 갖는다. 그러나 아직까지 후손을 찾지 못해 유공자 훈장도 전달받지 못한 현실 앞에서 가슴이 먹먹하기도 하다.

대부분 선교사는 자신들의 신학적 경향과 선교본부의 방침에 따라 기독교인들이 독립운동에 관여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한일합방 이후 1912년 원주지방회를 주재하기 위해 원주를 방문했던, 당시 한국 감리교선교부를 관할하고 있던 감리교선교회 감독 해리스(Superintendent Harris, Merriman Colbert)27)가 친일적인 성향을 보이며 교회의 비정치화 노선을 견지했던 것 역시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1912년 연회에서 원주지방 선교 현황을 보고했던 노블(Noble William Arthur, 魯普乙) 선교사는, 1914년 감리교회 동양선교회가 중국 금릉대학에 모였을 때 친일 해리스 감독 앞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먹장 같은 검은 흑인도 백인의 살결같이 결백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백설과 같이 흰 백인도 흑인의 살결같이 검은 마음을 가진 백인이 바로 여기 있는 해리스이다. 이 해리스는 사소한 일본인의 뇌물에 눈이 어두워, 한일합방에 협력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에 많은 해독을 주었다. 우리는 결코 그 일들을 용서할 수 없다.”

3.1운동과 관련하여 가장 비극적인 제암리 잔학행위28)를 전 세계에 알린 스코필드(Francis William Schofield, Junior, 石虎弼) 선교사 같은 분도 계셨다. 그는 제암리교회 방화 사건을 듣고 서울에서 수원까지 기차로 이동하고, 수원역에서는 자신이 가져온 자전거로 태장면, 병점, 정남, 발안을 거쳐 제암리로 이동했다. 교회를 불태운 현장에 도착하여 사진을 찍은 그는 상경해 일인들의 잔악 행위를 언론에 알리고 참상을 보고했다. 이러한 선교사들에 의해 국내 외국인뿐만 아니라 해외 언론에도 한국의 실정을 알릴 수 있게 된 것이다.

3.1운동 발발 후 총독부 관리들은 “선교사들이 한국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한다면 앞으로 더 나은 선교 활동을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선교부 지도자들을 회유했다29). 이러한 총독부의 회유와 제의에 선교사들의 입장은 웰치(Welch, Hebert, 越就)30) 감독이 대변했듯이 “첫째, 우리가 독립운동을 중지시키려 해도 쓸데없을 것이다. 둘째, 그렇게 하면 그들은 분개하여 우리의 영향력이 없어지게 될 것이다. 셋째, 선교사의 본국 정부가 그것을 금하고 있다”31)는 3가지 이유 때문에 협력할 수 없다는 것을 총독부 관리들에게 명확히 전했다.

3.1독립만세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감리교단에서는 2017년도에 ‘삼일운동과 기독교 관련 자료집 인물편 3권’과 ‘문화유산편 1권’을 발간했고, 2019년에는 ‘한국교회 3.1운동 100주년 기념 연합예배’, ‘감리교회 관련 3.1 운동 100주년 기념 화보집’ 제작 및 배포 등 행사를 했다. 장로교단은 ‘장로교회 1919년 3.1운동 전수조사 자료집’을 발간해 433개 교회와 1,440명 성도의 독립운동에 기여한 헌신을 새롭게 발굴 분석해 세상에 내놓았다.

아무튼 기독교 교회와 성도들은 일제의 무단통치 앞에 맞서서 민족의 독립운동을 점화시키고 확산시키는 데 그 일익을 담당하였다. 앞에서 소개한 이러한 분들의 희생과 공헌으로 일제의 무단통치는 문화정치로 바뀌어 갔으며, 이들의 사회 운동을 통해 민초들은 깨어나 점진적으로 실력을 양성해 근대화를 위한 역량을 향상시킬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이제 기독교계에서는 이렇게 잘 알려지지 않은 3.1만세운동 및 임시정부 관련 독립운동에 참여한 민중들의 죽음과 헌신을 찾아내고 연구할 시점이 되었다. 새로워진 인터넷 환경 및 관련 기관의 아카이브를 통해 원 자료의 확보가 용이하게 되었기에, 이들 자료를 좀 더 관심 있게 찾아보고 분석하여 정리해 널리 알릴 필요가 있는 것이다. 교회가 독립운동에 지역적 중심 역할을 했고, 교회 지도자 및 성도들이 이 땅에서 목숨까지 바치고 애국애족하며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공헌했다는 사실을 후대에 잘 전수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독립운동에 헌신한 선진들의 고귀한 정신과 신앙을 계승하는 길이며, 이 시대 크리스천들의 소명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민족통일의 구심점으로 기독교가 자리 잡음을 확실히 할 수 있는데 큰 의의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끝>

[미주]
24) 법국은 프랑스를 말하며, 조계(租界, concessions in China)는 청나라(이후의 중화민국)에 있었던 외국인이 행정자치권이나 치외법권을 가지고 거주한 조차지를 의미한다.
25)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에서 발췌.
26) 1912년 일제가 공덕동 경성형무소를 지어 독립운동가를 고문·단죄하던 곳으로, 8.15 광복 이후 1946년에 마포형무소로, 1961년에는 마포교도소로 각각 개칭했다. 1963년 경기도 안양시에 신설된 안양교도소로 이전하면서 폐지되었다.
27) 1904년 5월 한국과 일본 주재 감독으로 피선되어 일본에 부임, 1916년까지 미감리회 한국연회 감독을 역임했다. 친일 성향이 강했다.
28) 1919년 4월 15일 일본군과 경찰은 강연을 빙자해 마을 기독교와 천도교 남자들을 교회당 안으로 모아놓고 방화해 교회 안에서 22명, 밖에서 6명 등 모두 28명이 살해되었다. 그리고 일본 군경이 지른 불로 민가 31호가 불타버렸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9) 최초 회합은 총독부 내무부장관 우사미의 요청으로 당시 한국에 있는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선교하던 스미스(Smith, Frank Herron, 1914~1926) 선교사의 집에서 1919년 3월 9일 일요일 저녁에 열렸다. 스미스 선교사는 서울에 체재하며, 한국 및 만주에 사는 일본인 선교를 했다.
30) 1916년 미감리회 감독으로 피선되어 한국 감독으로 내한, 1928년 한국 및 일본 감독을 역임 후 귀국했다.
31) “Report of Second Session of Unofficial Conference, Chosen Hotel, March 24th, 1919”

리진만 우간다·인도네시아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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