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원주지역 3.1만세운동과 교회 전도사들의 독립운동
총독부 관보 포교 규칙에 의해 1915년 12월 말에 신고된 원주지방 교회는 4개 교회였고, 1916년 9월에 2개 교회가 새로이 허가를 받았는데, 그 현황은 다음과 같다.
원주읍을 중심으로 원주군 본부면 읍후동에 읍후동미감리교회(邑後洞美監理敎會)를 위시하여 건등면(현 문막읍) 문막리에 문막미감리교회(文幕美監理敎會), 호저면 운동에 운동미감리교회(雲洞美監理敎會), 금백산면(현 흥업면) 봉현리에 봉현미감리교회(鳳峴美監理敎會)가 있었다. 계속해서 관보 자료를 보면 1916년 9월 25일 허가받은 교회로 부론면 흥호리에 월봉동미감리교회당(月峯洞美監理敎會堂), 귀래면 귀래리에 고청동교회당(古淸洞美監理敎會堂)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원주지방은 선교지역 분할로 인해 강원도 지역은 북감리회선교부 관할 구역이었다. 1919년 많은 기독교계 인사는 3.1독립운동에 참여하여 일제에 저항하면서 박해를 받거나 구속이 되었고, 이로 인해 손정도 목사20), 이병주 전도사를 비롯한 많은 교회 지도자는 이를 피해 해외로 잠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원주지방 감리교회 전도사와 평신도의 독립운동 참여에 관한 기록은 기독교계나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아니,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최근 문막교회사 자료를 수집하며 필자는 원주지방 전도사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한 의미 있는 자료를 발굴하게 되어 여기에 당시 독립운동에 참가한 전도사 3명을 소개한다.
아쉽게도 국가보훈처 등 관련 기관의 독립운동 자료에는 기독교계 지도자임을 나타내는 활동 사항이 빠져 있었고, 마찬가지로 기독교계 교회사 등에는 선교·전도 활동과는 거리가 있는 독립운동 참여에 관한 사항 기술에 그리 관심을 두지 않아 후세들에게 그들이 독립운동에 헌신한 사실을 알릴 수 없었던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들의 헌신과 수고, 그리고 애국애족했던 모습에 감사하며 여기에 그들의 독립운동 활동 사항을 정리해본다.
1) 원주시 문막교회 박종성(朴鍾聲, 1883~1940) 전도사의 독립운동 이야기
박종성 전도사의 본적은 원주시 건등면(현 문막읍) 포진리이다. 그는 1913년 2월 경성지방회에서 이태원교회 신임 전도사로 파송되었고, 이후 원주 구역 순행전도를 하다가 1916년 문막교회로 파송을 받아 1918년 5월까지 문막교회를 담임했다.
문막교회에 사역하는 동안 박 전도사는 1917년 11월에 교회유치원을 설립했으며, 1918년 3월에는 교인들과 합심하여 문정보통학교를 매입해 새 예배당을 꾸몄다. 이렇게 열정적으로 교회 일을 하던 박종성 전도사는 1919년 3.1 만세운동이 발발한 이후 원주지방회를 떠났다. 문막교회를 떠난 이후 박 전도사의 행적은 1921년 <동아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보>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독립운동유공자 공훈록에 실린 박 전도사의 활동을 살펴보자.
“1921년 4월 서울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독립공채증서를 제작·사용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려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1년 1월 박종성은 경성부(京城府)에서 이재근(李載根)·이영훈(李英薰)·이영휘(李英輝)·전해운(全海雲) 등과 만나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기로 의결한 뒤, 이재근을 책임자로 선정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임시정부 발행의 사령서와 독립공채증서 등이 없는 관계로 군자금 모집에 차질을 빚자, 박종성 등은 중국 봉천(奉天)에서 돌아온 민정식(閔廷植)으로부터 임시정부 발행의 100원짜리 독립공채증서를 빌려 음력 4월 20일 삼청동에서 이재근·이영훈과 함께 증서를 모사·제작하였다. 박종성은 이 모사된 사령서와 독립공채증서 등을 휴대하고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서운면(瑞雲面)의 민만식(閔晩植)으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921년 5월 29일 밤 10시 충북 음성·충주·제천 등지의 자산가들에게 군자금 모집 실행 방침을 논의하기 위해 경성부 종로2정목 중국요리집 제일루(第一樓)에서 모였다가 경기도 경찰부 형사들에게 체포되었다.
1921년 8월 2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대정(大正) 8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21)
2013년 광복절 행사에 박종성의 외손녀 김동분이 참석해 조부의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2) 원주시 귀래면 당우리교회 이재근(李載根, 1885~?) 전도사의 독립운동 이야기
이재근 전도사의 본적은 원주시 귀래면 용암리 778이며 이명으로 이창식(李昌植)으로 쓰기도 하였다. 이재근 전도사의 교회 사역 기록이 처음 나오는 곳은 1916년 2월 18일에 개최된 원주지방회 파송기이다. 이재근은 1916년 어간에 자신의 집에 예배처소를 마련해 예배를 드렸던 것으로 사료되는데, 이는 1915년 12월에 원주선교부에서 포교자로 신고한 이재근 전도사의 집 주소가 원주군 귀래면 당우리(堂隅里, 현 용암1리) 2.1이었고, 1916년 2월 원주지방회 파송기에 원주 당우리교회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막교회 박종성 전도사와 같은 날 파송을 받은 이재근 전도사는 그 이듬해 파송기에는 나타나지 않아, 1917년 이후에는 귀래에 있던 당우리교회를 떠난 것으로 사료된다. 그렇게 소식을 알 수 없던 이재근 전도사 역시 1921년 5월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일명 ‘제일루(第一樓) 사건’의 주모자로, 바로 문막교회 박종성 전도사와 함께 서울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된 것이다. <매일신보> 1921년 7월 9일 자 3면에 이 전도사 관련 기사가 아래와 같은 제목으로 실려 있다.
“제일루사건 결심(第一樓事件 結審)
학생과 공모하고 제일루에서 공모하던 것을 잡아
원적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덕정리(陰城郡 三城面 德井里) 165번지 전해운(全海運, 31세)과 같은 도 같은 군 감곡면(甘谷面) 오형리(梧馨里) 이영휘(李英輝, 26세)라는 연희(延禧) 전문학교 학생 한 명과 이외 이재근(李載根), 박종성(朴鍾聲), 이영훈(李英薰), 박창선(朴昌善), 이태훈(李泰薰) 등 7명은 본지에 임의 보도된 바와 같이 조선독립을 희망하며 군자금을 모집하고자 하였던 바, 마침 민정식(閔庭植)이가 상해 임시정부 100원짜리 공채 증서를 가지고 있음을 알고, 민정식으로부터 석 장을 가져다가 위에 피고되는 이영휘(李英輝)에게 주어서, 안성군 서운면 상평리(安城郡 瑞雲面 上坪里) 민만식(閔晚植)에게서 군자금을 증수하라고 위임하매, 이영휘는 금년(1921년) 3월 14일에 공채 증서를 가지고 민만식의 집에 가서 앞의 증서 한 장을 그에게 내어주고 100원을 받아다가 50원을 전해운에게 내어주고, 나머지 두 장 중의 한 장을 피고 이재근과 이영휘가 가지고 충주군 주덕면 제천리 이석호(李錫浩)에게 군자금을 모집하러 갔었으며, 또 한편으로는 공채증서와 유사한 것을 모조하여 군자금을 모집할 작정으로 이재근, 이영훈, 박종성 3명은 지난 4월 중에 삼청동 산중에서 증서를 작성하기에 종사하였고, 박창선, 이영훈은 신대선(申大善)이란 사람과 공모하고, 지난 5월 18일에 앞에 충주군 이석호에게 현금 3,000원을 보내라고 우편으로 독촉하고, 동월(5월) 19일 그의 집에 가서 군자금을 제공하라고 하였으나, 현금이 없었으므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는데, 그동안에 모조한 공채 증서가 만들어졌으므로, 피고들은 봉투 안에 공채 증서를 넣어 가지고 이재근이 군자금을 모집하고자 5월 28일 오후에 탑골공원에 피고들이 모여서 계책을 의논한 후 그 앞에 있는 중식요리점 제일루에서 요리를 먹고 나갔는데, 경기도 경찰부 형사들은 이것을 보고 있다가 한꺼번에 체포하고, 신체검사를 한 결과 구두 속에서 임명장 한 장과 조끼 속에서 군자금 영수서 3장을 발견하여 경찰부로 즉시 동행했었는데, 며칠 전에 검사국의 조사를 마치고 지난 8일에 공판정으로 넘어왔더라.”22)
위 사건으로 이재근 전도사는 1921년 8월 2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대정(大正) 8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안타까운 일은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조선독립을 희망하며 군자금을 모집하고자 하였던 이재근 전도사는 그의 후손이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았고, 그가 언제 소천했는지 그의 묘지가 어디 있는지조차도 파악이 안 되었다. 2013년 추서된 건국훈장도 전달되지 못했다.
<※혹여 이재근 전도사 후손에 대해 알고 계신 분은 원주시 문막교회 033-734-7579로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3) 원주시 문막교회 이병주(李秉周, 1894 ~1971) 전도사의 독립운동 이야기
이병주 전도사의 본적은 충청남도 논산(論山) 욱정(旭町) 72이며 그가 문막교회에 담임 전도사로 오게 된 것은 앞에서 소개한 박종성, 이재근 2명 전도사와 독립운동에 관한 연결고리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제일루사건’ 공모 현장에는 이영휘(李英輝, 26세)라는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학생과 박종성, 이재근 전도사가 함께 있었고, 이병주는 1919년 3·1운동 당시 연희전문학교 학생회장으로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20년 2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2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3.1운동 직후 이병주 전도사가 검거될 때까지의 활동이 정동교회 125년사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3월 1일이 지나고 일경의 무자비한 탄압이 가해지자 공공연한 시위는 불가능하였고 이 운동은 자연히 지하운동의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3·1운동 직후부터 계속하여 정동교회에서 ‘지하 독립신문’이 제작되었다. 당시 ‘독립신문’은 등사기로 인쇄한 유인물이었다. 이 유인물은 정동교회 강단에 위치한 파이프 오르간의 송풍기 속에서 제작되었다. 이 파이프 오르간의 송풍기는 사람이 들어갈 만큼 컸다. 때로는 이필주 목사 사택에서 작성되기도 하였다. 유인물 작성에는 김진호의 주선으로 창의문밖교회 이병주 전도사가 참여하였다. 교회에서 독립신문의 내용을 철필로 긁은 후 교회 건너편 미대사관의 주방에서 등사를 했다고 한다. 당시 미대사관 의 주방장은 민 씨 성을 가진 기독교인이었다.”23)
1920년대는 일제의 탄압도 심해졌고 목회자들이 많이 부족해 문막교회는 1924년부터 단독 목회자를 파송 받지 못했다. 그러한 시기 이병주 전도사는 복역을 마치고, 상해로 건너가 상해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가 1923년 귀국하며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계속>
[미주]
20) 1919년 4월 13일 상해임시정부가 내외에 선포되고, 손정도 목사는 이동녕의 후임으로 임시의정원 의장에 당선되었다. 1921년 3월 3일에는 대한야소교진정회(大韓耶蘇敎陳情會)를 조직하고 그 회장으로 활동했고, 동년 8월에는 김구·여운형 등 동지들과 함께 한국 노병회(勞兵會)를 조직하고 노공부장(勞工部長)에 뽑혀 독립운동을 측면 지원하였다. 자료: 국가보훈처 공훈록에서 발췌.
21)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박종성)
22) <매일신보> 1921년 7월 9일 자 3면 기사를 리진만이 현대어로 윤문함.
23) 정동제일교회125년사, 301쪽
리진만 우간다·인도네시아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