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에서 보는 아프가니스탄의 간략한 이해

아프가니스탄은 인도양 진출의 부동항을 원하던 당시 소련의 대양으로의 진출로에 걸쳐져 있었다. 소련은 대양으로 나가는 통로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아프가니스탄을 군사적으로 지원했다. 아프가니스탄 군부는 구소련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돌아온 후, 1978년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정권 수립에 성공하지만, 당시 아프간 주민 대다수가 이슬람 수니파였던 주민의 반감을 사게 된다. 이에 수니 무슬림 부족을 중심으로 소련의 공산정권에 저항하는 내전이 시작되었다. 당시 공산정권에 저항하는 반군 게릴라들은 이슬람의 전사라는 뜻을 가진 ‘무자헤딘’이라 부르게 된다.

아프가니스탄 난민 가족
▲아프가니스탄 국경을 가까스로 탈출하여 파키스탄에 안착한 난민 가족 ⓒ김종일 교수
1979년 3월, 아프가니스탄 정부 주력군 17사단이 반군으로 이탈 합류했고, 17사단에 와 있던 소련 군사고문단, 간호사, 군인 가족 500여 명이 반군들에게 학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소련은 이에 보복하고자 같은 해 12월 아프가니스탄을 전면 침공한다. 이때부터 수니 이슬람 반군인 무자헤딘의 지하드 상대는 소련군이 되었으며, 산악지형을 이용해서 게릴라전으로 소련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한편, 옆 나라 파키스탄으로서는 소련의 아프간 내에서의 전투는 결국 파키스탄의 부동항인 과다르항의 점령으로 이어질 것을 두려워하여, 주변 수니 무슬림 국가와 함께 소련 타도를 외치며 지하드를 선언하게 된다.

우리가 20세기 열강의 각축전에서 늘 보아왔던 분쟁 지역에서의 긴장과 견제는 구소련을 향한 견제의 결과로, 미국은 이슬람 무장세력인 아프간 무자헤딘에게 첨단 무기를 제공하기에 이른다. 결국 당시 소련은 10년간의 아프간 전쟁에 62만 명을 투입해서 약 1만5천 명의 전사자를 내며 퇴각한다. 소련이 퇴각한 뒤 아프가니스탄은 무자헤딘과 지방 군벌이 합쳐져 무법천지가 되어버린다.

이 당시 사우디 출신의 빈 라덴은 알카에다라는 이슬람 무장세력을 조직해서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지역에서 세력을 키워나가게 된다. 이미 구소련을 상대로 지하드를 선포하며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지역에 모여든 수니 이슬람 무장세력 손에는 당시 소련 견제를 위해 미국으로부터 받았던 강력한 무기가 있었다. 바로 이것이 탈레반의 시작이다. 탈레반은 종족으로는 인도계 파슈툰족으로서 아프가니스탄 전체 인구에서 가장 많은 40% 정도를 차지하는 이슬람 수니 무슬림이다. 탈레반이라는 말은 이슬람 신학생들을 지칭하는 말인데, 오사마 빈 라덴이 제공하는 막대한 재정에 미국으로부터 구소련 타도를 위해 이미 받아 놓은 강력한 무기, 그리고 지하드 정신으로 똘똘 뭉쳐서 자살폭탄도 불사하는 강력한 이슬람 테러 조직으로 부상하며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한다.

이때 중동에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하는 사건이 1990년에 발생하는데, 위협을 느낀 사우디 왕정은 미국에 군사 지원을 요청하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한다. 왜냐하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은 결국 미국의 배후 때문이었다고 생각하여 그동안 중동의 아랍 무슬림들은 이스라엘과 미국을 같은 원수로 여겨 왔었다. 그런데 사우디의 안보와 국익을 위해 적으로 간주해온 미국을 이슬람 성지 역할을 하던 사우디 땅으로 정당하게 들어오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지난 외교부 앞에서 아프가니스탄에 남아 있는 가족을 구조해달라고 호소한 국내 아프가니스탄인들
▲지난 외교부 앞에서 아프가니스탄에 남아 있는 가족을 구조해달라고 호소한 국내 아프가니스탄인들 ⓒ김종일 교수
그러나 사우디 내 미군의 주둔은 비록 사우디 왕가의 요청으로부터였다고는 하지만, 이슬람 수니 근본주의 무슬림들의 눈에는 과거 구소련이나 지금의 미국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미군은 자신들의 신성한 땅을 더럽히는 이교도 그룹으로 보일 뿐이었고, 그래서 율법대로 처단해야 하는 지하드의 대상이었다. 이때부터 오사마 빈 라덴이 이끄는 알카에다 조직의 지하드 대상이 구소련에서 미국으로 바뀌었는데, 이때의 사건이 바로 2001년 발생한 비극적인 9.11 테러 사건이다.

9.11 사건으로 미국이 오사마 빈 라덴을 찾으러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가면서 당시 탈레반 정권(1996~2001)을 붕괴시키고, 20년(1991~2001) 동안 친미 아프간 정권의 설립을 뒤에서 도우며 오늘에까지 이른 것이다.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이번 사태

역사는 반복된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크게는 우리 조국과 사회에, 작게는 우리 가정과 우리 자신에 교훈으로 적용하기 위해서이다. 역사의 반복을 보면서도 적용이 없으면 역사는 그 가치를 상실하며, 그 집단(국가, 사회, 가족)은 시행착오를 되풀이하면서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에 따라 우리가 이번 아프가니스탄 사태를 반면교사로 삼아 기억해야 할 교훈들이 몇 가지 있다. 사실 우리 민족에게는 불과 수십 년 전에 발발한 한국전쟁(1950~1953)을 통해서 동족상잔의 경험이 아직 생생하다. 그래서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그와 같은 비극을 우리 후 세대들에게 남기지 않겠다고 이를 악물고 지금까지 왔다. 지금의 아프가니스탄과 우리나라가 확연히 다른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첫째, 민족의 구성이다. 단일 민족인 우리나라와는 달리 지금 아프가니스탄은 탈레반이 속한 파슈툰 민족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며, 그 뒤를 타직, 하자르, 우즈벡 민족이 따르고 있다. 그 외에도 수십 민족이 다양하게 섞여서 살아가고 있는 다민족 국가이다. 이로 말미암아 서로의 이해관계가 어긋나 분쟁과 갈등이 끊임없는 땅이다.

둘째, 우리나라 사람은 한국전쟁의 아픔이나, 아프가니스탄의 무능과 부정부패를 반면교사로 삼아 다시는 그런 전철을 밟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이를 충분히 개선해 나갈 강한 역량을 가진 민족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는 역사 속에서 늘 그러하였듯이 남들의 고통과 아픔을 나눌 줄 아는 사람들이다. 조금 덜 쓰고, 조금 덜 먹으면서 아끼며 모은 것을 어려움과 고난 속에 살아가는 이웃을 위해 아낌없이 나눌 수 있는 한국인이 아직 많다고 본다.

아프가니스탄에 남은 가족 구출을 놓고 의논 중인 국내 아프가니스탄인들
▲아프가니스탄에 남은 가족 구출을 놓고 의논 중인 국내 아프가니스탄인들 ⓒ김종일 교수
다시 시작된 긴 난민 행렬

이번 사태로 아프가니스탄 난민의 수가 시리아 난민의 수를 넘을 것이다. 이미 과거 수십 년 동안 발생한 내전 등으로 주변국에서 난민으로 살아가는 아프간 사람들이 수백만 명인데, 이번 사태로 아프간 난민은 더 증가할 것이다.

2018년 유엔난민기구(UNHCR)의 통계에 따르면, 현재 고향을 잃고 세계에서 떠도는 난민(강제실향민)의 수는 약 7,080만 명이며, 이들 중 반 이상이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소말리아 출신이다. 또, 지구촌 안에서는 매일 44,500명의 난민이 발생하고 있으며, 이 난민 중 누군가는 2초마다 집을 잃고 있다. 실제로 전쟁을 포함해서 다양한 이유로,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집, 재산, 가족을 포기하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서 인근 국가로 피해 들어온 난민들에 대한 세계 각국의 보호와 도움이 매우 절실한 상황이다. 지금 이들은 살아가던 지역에서의 향후 정치, 경제, 테러 등에 대한 끝없는 불안과 절망으로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어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고 있으며, 국제적으로도 1951년 난민협약에서 이들의 보호를 이미 약속한 바 있다.

지금 중동 이슬람권을 비롯한 세계 거의 모든 곳에서 이념과 종교적 갈등에 따른 충돌은 무자비한 전쟁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이로 인해 수많은 난민이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난민들의 발생은 셀 수 없는 끔찍한 인명과 재산의 피해가 뒤따른다. 어떤 지역에서는 난민 문제로 말미암아 미처 대비하지 못했던 사회문제를 초래하면서 또 다른 문제에 봉착하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맞이하기도 한다. 그러나 동전의 양면이 있는 것처럼, 이러한 난민의 안타깝고 가슴 아픈 소식 뒤로는 선교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여겨왔던 지역에서 난민의 이동으로 말미암아 선교의 문이 열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부흥의 소식들도 들려오고 있다.

한국교회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삶

그동안 한국교회는 지구촌 곳곳에서 기아 문제에 대책을 마련했으며, 국내로 유입한 이주민들을 향해서도 따듯한 마음을 보여 왔다. 이제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이 고적한 삶을 지속하는 난민들을 향해서도 선교적 관심을 보여줘야 할 매우 시급하고도 절박한 시기를 살아가고 있다.

지난 2018년 6월, 예멘에서 발생한 내전을 피해 제주도에 도착한 예멘 난민들을 계기로 우리나라에서도 난민 문제가 표면으로 떠오른 적이 있다. 당시 우리 국민은 이들의 수용 여부를 놓고 찬반 여론이 들끓었으며, 지금까지도 딱히 해결점을 찾지 못한 채 인도적인 측면에서만 그들을 지원하고 미온적인 태도와 반응은 여전하다.

이런 녹록하지 못한 상황에서 그동안 해외에서 이미 커다란 정치 외교적 사안으로 자리 잡은 난민 문제가 더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어느덧 우리의 이웃이 되어 힘들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우리 교회가 이제는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현실에 직면했다. 누가복음 10장 25~37절에서 우리 주님께서 비유로 설명한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그들이 우리의 이웃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누구도 우리의 이웃이며, 주님은 지금 우리가 어려움을 당한 그들의 이웃이 되어 주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그것이 은혜로 구원받고 영생을 소유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마땅한 도리라고 말씀하신다. <끝>

※참고 영상
지난 9월 8일 KWMA 난민선교위원회는 박은조 목사를 초청하여 ‘아프가니스탄 사태에 따른 한국교회의 난민선교방안’을 주제로 특별좌담회를 개최했다. 다음은 관련 영상이다.

1. 좌담회 시작 인사와 난민 개념 소개(01 좌담회 인사, 02 난민 개념 소개)

2. 아프가니스탄 사태 요약과 전문가가 보는 시각(01 아프간사태 요약, 02 아프간사태 관련 전문가 시각)

3. 한국 교회에 드리는 메시지와 국내 무슬림 사역(01 아프간사태 관련 한국교회에 메시지, 02 한국교회의 국내 무슬림 사역)

4. 아프가니스탄 현지 그리스도인(01 현지 그리스도인 대피 사안, 02 현지 그리스도인 대피)

5. 아프가니스탄 난민의 국내 유입에 따른 한국 교회에 드리는 요청 사항

6. 국내 무슬림 게토화와 무슬림 선교전략(01 국내 이슬람 게토화에 대해서, 02 한국교회의 난민선교 전략)

7. 아프가니스탄 문화와 사회 소개

8. 아프가니스탄 사태에 따른 외교에서 득과 실(01 미국의 아프간 철수에 대해서, 02 이번 아프간 사태에서 외교적인 득과 실)

9. 대한민국의 난민수용국 지위와 난민에 대한 이해

10. 아프가니스탄을 위한 기도제목

11. 국내 아프가니스탄인들 미담과 좌담회 마무리(01 국내 아프간인들 미담 소개, 02 좌담회 마무리)

김종일 교수
▲김종일 교수
◈김종일 교수=예장통합 측 목사로, 현재 KWMA 난민선교위원회 코디네이터와 국내 초교파 이슬람권 선교사 네트워크로 알려진 M. NET KOREA(일명 열무김치)의 회장으로 섬기고 있다. 중동 이슬람권에서 20년 가까이 체류한 후 귀국 후에는 아신대학교(ACTS) 선교대학원 중동연구원 교수로 줄곧 재직하면서 중동학, 중동선교학, 이슬람 관련 과목을 강의하고 있다. 국내 유일한 선교 저널인 『전방개척선교』 편집인과 『선교타임즈』 편집위원 등으로 중동과 이슬람 관련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