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버지(Our Father)

(1) 하나님 아버지라는 칭호는 그리스도교의 독특한 신관을 보여준다.

주기도문의 기도 대상은 ‘하늘에 계신’이라는 간구에 이어서 ‘우리 아버지’라고 이어지고 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역사적으로 오신 예수님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이다. 아버지라는 말은 가정의 언어이다. 아버지라는 말은 자녀가 아버지나 노인들에게 존경을 표현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애칭이다. 이처럼 익숙하고 평범한 표현을 하나님에 대해 사용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아빠 혹은 아버지라는 호칭으로 부르는 것은 대단한 불경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죄로 여길 만큼 그들은 아주 좋지 않게 생각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입증이 되고 있다. 요한복음 10장 36~37절 기록에 보면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라고 말씀하고 있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든 기도를 살펴보아도 예수님의 기도문에는 한가지 예외, 즉 십자가상에서 “엘리, 엘리”(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라고 하신 곳 외에는 항상 “아버지”라고 부르셨다.

기도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마음속에 성령이 임재하여 계신다. 이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항상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고 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도 입을 열어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가를 통해 자기 자신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다. ⓒunsplash
신약 성경학자로 알려진 요야킴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는 많은 유대 문헌을 연구, 검토해 보고 “예수님 당시까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사람은 예수님 외에는 한 사람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기도시간에 하나님을 아바(Abba) 아버지라고 부른 사람도 없었고, 또 예수님처럼 제자들을 보고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가르쳐 주신 분도 없었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신학자 부슈넬(Horce Bushnell)은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역사 가운데 놀라운 교훈들이 없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고 가르치신 것만으로 그는 인류 최대의 교사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생각할 수 있는 최상의 이름은 아버지이다”라고 하였다. 이 모든 견해는 하나님이 아버지 되심을 입증하는 그 중요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실로 하나님 아버지의 개념은 그리스도교의 독특한 신관이며 그 면류관이라 할 수 있다.

(2)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가?

첫째, 하나님은 영적으로 믿는 자의 아버지이시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라고 부르시던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버지가 되셨다는 것을 주님은 선포하시었다. 로마서 8장 14~15절을 보면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고 기록되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우리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된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마음속에 성령이 임재하여 계신다. 이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항상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고 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도 입을 열어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가를 통해 자신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다. 만일 당신이 기도할 때에 하나님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당신 안에서 성령님이 사역하고 계신다는 증거이다. 성령님의 사역에 순종하고 의지하여 기도를 많이 하는 분들을 보면, 참으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신앙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둘째,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음으로써 우리의 아버지가 되게 하신다. 갈라디아서 3장 26절에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라고 하였다. 불신자는 하나님을 그의 조물주와 심판주라 부를 수는 있겠지만, 그의 아버지라고는 부르지 못한다. 우리는 믿음에 의하여 그리스도와 연합된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었으므로 우리는 양자가 된 것이다.

(3)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는 삶의 고백을 드릴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첫째, 나의 삶 속에 모든 공포와 두려움이 사라진다. 세상의 모든 어린 자녀들은 아버지가 곁에 있을 때 용감하고 무서움이 없다. 내 아들이 어렸을 때 밤중에 천둥이 치면 잠을 자다가도 깨어서 “아빠”하고 내 방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아빠 곁에서 모든 공포와 두려움이 사라진 듯 단잠을 잤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그러므로 이사야 41장 10절의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는 말씀처럼 세상에서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입을 벌려 삼킨 자를 찾으려 할 때도 모든 공포와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다.

둘째, 나의 삶 속에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을 체험하게 한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 그 말속에는 자식을 무척이나 사랑하시는 ‘사랑의 아버지’라는 의미가 가득 담겨 있다. 우리 아버지 되신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시기까지 사랑하신 분이다. 성경 요한복음 3장 16절에 있는 말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처럼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은 지금도 변함이 없으시다.

우리에게 좋다고 생각하시는 것이면 구하기도 전에 다 허락하시는 아버지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6장 31~33절에서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요 저희 천부(your Heavenly Father)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가르치신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루에 몇 번이나 부르고 있는가? 성도는 하나님 아버지를 많이 부르고 찾을수록 그만큼 더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그 특권과 그 축복을 잊지 말자. 그 생활은 바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시면서 기도하셨던 그 모습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주기도문에서도 체험하고 배우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과 속성이며 성령의 열매인 사랑을 체험한 대로 열매 맺는 성도의 삶을 실천해 나가야 하겠다.

셋째, 나의 삶이 하나님 아버지를 본받게 된다. 자녀는 그의 아버지의 형상을 대부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아버지의 그 행동과 몸짓, 언어를 본받게 된다. 그래서 부전자전(父傳子傳)이란 말이 생겨난 줄로 안다.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우리는 그분을 본받아야 하겠다.

에베소서 5장 1절에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라고 하였다. 그분을 삶의 본보기로 삼아서 사신 분이 예수님이시고, 그렇게 사신 분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하라고 하셨다.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2장 5절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 아버지를 가장 닮아 일생을 사신 분이 예수님이신 것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주기도에서 가르치셨던 예수님은 시편 37편 11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마태복음 5장 5절에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 나의 삶에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을 닮은 예수님처럼 나 자신이 온유한가를 스스로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온유’란 단순한 상냥함이나 기질의 온화함을 포함한 우유부단(優柔不斷)한 성품만은 결코 아닐 것이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온유란 야생말이 길들어져 명마가 되듯이 하나님께 길들임 받아 하나님 앞에 순복하고, 이웃에 대해 말과 행동에 온화하고 부드러운 태도를 가진 자를 말한다고 본다. 뿐만 아니라 나의 삶에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을 예수님처럼 겸손하게 닮았는가를 스스로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은 겸손에 대해 잠언 18장 12절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닮으신 예수님께서 겸손의 최고 순종인 십자가를 지셨던 것처럼 내 몫의 십자가를 지고 아버지 하나님을 닮아가는 겸손을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할 때마다 마음에 새겨 보자. ‘우리 아버지’라고 주기도문을 드리면서 아버지 하나님을 닮아 살아가는 삶을 실천할 때 우리가 접촉하는 많은 사람도 그 삶을 본받게 되지 않겠는가?

우리 아버지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을 닮아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좋은 모범이 되어 보자. 우리 아버지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을 닮아서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조건 없는 실천 강령 그대로의 사랑을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되어보자.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용서의 하나님을 닮아서 내가 먼저 용서할 줄 아는 용기 있는 사람이 되어 보자.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닮아 살아야 할 평생의 삶을 두고, 오늘도 무릎을 꿇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주님이 드리신 기도를 드리는 마음을 게을리하거나 인색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넷째, 나의 삶 속에 그의 자녀된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시편 133편 1절에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고 하였다. 그것은 마치 아름다운 향기가 온 땅에 가득한 것처럼 비유하였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2장 17절에 ‘형제를 사랑하며’라고 하였다. 사도 요한은 아버지 하나님이 사랑의 본체이신 것을 요한일서 4장 7절과 8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언급하면서 사랑할 수 있는 자는 이미 하나님의 영적 자녀로 태어난 것을 언급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을 주기도문에서 아버지라고 부를 때 형제자매를 사랑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은 것이다. 형제나 자매를 미워할 수 없음에 대하여 다시 요한일서 4장 20절과 21절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주기도문을 드릴 수 없는 거짓된 입술로 기도하고 있다면 회개하고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주기도문의 첫 간구에서 ‘우리 아버지’라고 하는 동안 우리 입술과 행동에 사랑의 열매가 없음을 회개하고, 성령 충만의 열매이기도 한 사랑을 열매를 맺으며 주기도문의 참된 간구의 정신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다섯째, 나의 삶 속에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계시는 천국에 대한 영원한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과 관계성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 주기도문 속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예수님은 그의 삶 속에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계시는 천국에 영원히 함께 살게 되는 소망 속에 사셨다. 때문에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동안 성부 되신 아버지와의 관계성을 떠나지 않고, 아버지 되신 성부와 관련해서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집인 성전을 청결케 하시면서도 요한복음 2장 16절에 ‘내 아버지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다. 참된 예배 정신을 가르치시면서도 요한복음 4장 23절에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라고 하셨다. 주님의 날이 된 안식일의 참뜻과 교훈을 가르치시면서도 하나님 아버지의 진정한 뜻을 전하는 것을 평생 사명으로 알고 일하셨던 예수님은 요한복음 5장 17절에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시면서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을 사명으로 알고 사셨다. 하나님의 말씀인 영생의 양식에 대해서 가르치시면서도 요한복음 6장 32절에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라고 하셨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면서도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1장 41절에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라고 하셨다. 예수님 자신이 다시 오시는 재림의 날에 대해서도 마태복음 24장 36절에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고 하셨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 고난의 잔을 준비하시면서도 누가복음 22장 42절에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이라고 하셨다. 십자가를 지시는 동안에도 누가복음 32장 46절에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하셨다. 이처럼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속에서 아버지 되신 하나님과 관계성을 가지고 말씀하셨을 뿐 아니라, 성부께서 계시는 집 천국에 영원한 소망을 두셨고, 그 소망을 우리에게도 주시고 있다.

요한복음 14장 1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라고 아버지의 집인 천국을 말씀하셨고, 가르치셨고, 선포하셨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던 첫 음성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태복음 5장 17절)이다. 그 천국을 예수님은 ‘아버지의 집’이라고 하셨다. 천국 소망을 부여해 주시고, 예수님을 믿고 회개한 자들이 갈 수 있는 천국을 가르치신 주님은 주기도문에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위대한 선언을 해주신 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는 다시 감격하게 되고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게 된다.

이 땅에서 육신의 자녀들은 육신의 아버지가 마련해 놓은 집에서 안식과 평안을 누린다. 그러나 인생이 사는 날 동안 제한된 손으로 지은 집이지 영원한 집이 아니다. 고린도후서 5장 1절에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했다.

누구나 한 번밖에 없는 일생을 산다. 육신의 아버지가 있을 때 아버지는 자녀로부터 분명한 신분과 위치를 가진다. 육신의 아버지가 마련한 집을 자녀는 다른 친구들에게 내 아버지 집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내 아버지는 나에게 어떤 분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땅에 계시는 동안 아버지 하나님을 친아버지(요한복음 5장 18절)라 하여 반대자들은 그를 죽이려고 까지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이 아버지 되심을 부인하지 않으셨다. 또한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아버지’를 기도 중에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게 하셨다.

땅에서 나쁜 아들이 있다면, 육신의 아버지를 자기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고 자기 아버지를 부인할 때일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로마서 8장 15~16절에 ‘양자(養子)의 영을 받았으니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시나니’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분 가운데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양자(養子)의 영이 함께 하심을 확신하신다면 크게 ‘하나님 아버지는 나의 아버지’라고 불러 보시기를 바란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만이 아니라,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로 우리를 인도한다.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라디아서 4장 6절)고 하셨다. 여기서 성령은 우리가 믿음으로 주의 기도에서 ‘아버지’라고 하신 기도를 하도록 도우신다. 또 성령은 우리가 영광스러운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고난 많은 땅에서도 열정을 가지고 기도하게 하신다.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해 간구하심이니라’(로마서 8장 27절)에서 성령은 첫 번째 간구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이 기도를 믿음으로 드릴 수 있게 하며, 첫 번째 기도의 열쇠를 우리 손에 주시고 하늘의 기도문을 열게 하신다. <계속>

김석원 목사
국제기도공동체(GPS, Global Prayer Society) 세계주기도운동연합 설립자 및 대표
CCC 국제본부 신학대학원 교수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