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12월호 《the Korea Mission Field》, ‘Thirty-Three Days Of Country Classes’ by Katherine Wambold, 번역 리진만(우간다, 인도네시아 선교사)

‘1908년, 33일간 지방에서의 사경회’ 캐터린 왐볼드

왐볼드 선교사
▲왐볼드 선교사는 독신으로 조선에서 40년간 여성 교육과 여권 신장, 복음 전도에 많은 공헌을 했다.

1908년 10월 26일, 고술(Ko Sool)15)

우리는 아침 일찍 출발해 이곳 고술(Ko Sool)까지 30마일(48Km)16)을 그렇게 캄캄하지 않은 저녁에 도착했다. 주일은 온종일 비가 내리고 월요일 오전 3시까지 계속 내렸지만, 짐꾼들은 길 상태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다.

부녀자들은 다음 마을에서 왔다.
20리 밖 노룸톨(No-rum-tol)17)
25리 떨어진 용머리(Yong-mo-ri)18)
30리 거리의 다대울(Tai-tai-ool)19)
40리 밖 성대동(Sung-dai-dong)20)
20리 거리의 채룬(Chaw-roon)21)

처음 우리에게는 몹시 힘든 시간이었지만 드디어 부녀자들 중 몇몇이 이해하기 시작했다. 모든 이들은 무지한 사람들이었으며 어찌 보면 무식한 부녀자들이었다. 한 부인이 가까스로 다른 이들에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은 아무것도 몰랐고 또한 배울 수 없으리라 말했다. 나의 전적인 노력은 이 부인의 감정을 상하지 않도록 진정시키는 것이었고, 다른 부인들이 깨칠 수 있도록 그들을 격려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새로운 연합찬미가의 첫 부분 8장을 부르는 데 힘을 쏟았다. 부녀자들이 이 찬미가를 계속해 부르는 데 시간을 보낸 관계로 우리는 숫자 공부를 할 시간을 가질 수 없었다. 복음서를 공부하는데 진전이 있었다. 우리는 모두 주위 집들을 방문하며 전도하러 나갔고, 호기심 많은 사람이 교회당으로 왔다.

주민들로부터 달걀과 밤, 그리고 박을 너무 많이 선물 받아 혼자 들고 갈 수 없어 당황스러웠지만, 안내 가마꾼이 이것들을 그의 등짐으로 날라주었다. 성경 공부하러 오는 소녀들은 가끔 따뜻하게 구워진 밤을 손에 꼭 감싸 쥐고 있다가 공부를 마치면 나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내 방은 가마솥에 소여물을 쑤는 관계로 매우 뜨거웠다. 창밖에는 높은 산비탈이 보였다. 여기에 있는 빨랫줄은 매일 이불을 너는데 매우 유용했다.

마지막 날 저녁 사랑스러운 부녀자들과 환송회를 갖고 나는 모든 일정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그들은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모두 거기에 와 있었고 “안녕히 가세요” 하며 여러 차례 인사를 나누고 별빛 아래 출발했다.

아펜젤러가 1902년 촬영한 가마와 지게꾼들 사진
▲(자료사진) 아펜젤러가 1902년 촬영한 가마와 지게꾼들 사진. ⓒGCAH Digital Library

강천평말(Kang Chun Pyun Mal)22)

우리는 이곳에 순조롭게 이동하여 오후 4시에 도착했다. 주일 구루미(Koo-Ree-Mee)23) 교회는 부녀자들로 만원이었다.

예배 후 우리는 이 동네와 강천으로 전도를 나갔다. 우리는 일반 가정뿐만 아니라 ‘양반’(Yang Ban) 집도 전도했다. 우리는 모든 곳에서 환영받았다. 한 부인이 말하기를 자신은 7년 전(1901년)에 예수를 믿었는데 5년 전에 그만두었다고 했다. 나와 함께 전도하던 부인이 말하기를 복음서의 ‘씨 뿌리는 사람 비유’를 기억하여 그 부인을 ‘돌짝밭’이라고 했다.

이곳에 온 부녀자들은 10리밖에 있는 불아위(Poo-row-ee)24)에서, 그리고 구루미(Koo-ree-mee), 강천과 가까운 마을들에서 왔다.

여행길에 많은 꿩을 볼 수 있었고, 이곳에서는 기러기 떼가 지나며 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부녀자들은 나에게 많은 밤, 감, 순무를 선물했다.

정신여학교(현 정신여고) 1회 졸업생
▲(자료사진) 정신여학교(현 정신여고) 1회 졸업생 김배세(오른쪽에서 두 번째)는 1910년 세브란스 간호과 졸업 후 한국 최초 간호사가 되었다. 왐볼드 선교사는 정신여학교에서 1896년 30세 때부터 68세에 은퇴할 때까지 헌신했다. ⓒGCAH Digital Gallery

파리들은 떼를 지어 다녔다. 빈대, 바퀴벌레, 벼룩도 보였다. 윤 전도부인은 내 짐을 잘 챙겨줬고 관리를 해줬다. 그녀는 나에게 새로 만난 신자와 낙심한 신자의 수를 보고할 때 그녀의 열정은 대단했다. 그녀의 몸짓이나 표현은 어떻게 기술할 수 없다. 내가 창문을 통해 볼 수 있는 ‘타작마당’이 있었는데 나는 성경에 나오는 ‘타작마당’을 회상하는 시간을 즐겼다.

이곳의 부녀자들은 배우기를 원했으나, 불아위(Poo-row-ee)에서 온 부인들이 너무 뛰어나서 다른 사람들은 비교당하는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이 지역을 포함해 인근 지역까지도 나는 이곳을 방문한 첫 번째 서양 선교사였다.

우리가 고촌(Kojon)25)을 향해 출발할 때 불아위(Poo-row-ee)에 사는 한 부인은 10리 떨어져 있는 그의 집에 가려고 우리와 함께 출발했다. 그녀의 남편은 기독인의 사랑 안에서 우리와 만났다. 그녀가 집에 가는 동안, 나는 이렇게 걷는 것을 좋아한다고 하며 걸었는데, 그녀가 집에 가는 동안 얼마만큼은 나 대신 가마를 타고 가는 즐거움을 느끼도록 했다.

짐꾼들은 우리가 해가 지기 전에 고촌에 도착했지만, 고촌에서 숙박하기를 요청했다. 그들은 우리가 200리를 왔다고 했다. 나는 거기 여인숙 주인이 짐꾼들과 특별한 친구인 것을 알았다.

정신여학교
▲(자료사진) 1936년 정신여고 학급대항 농구대회 광경. ⓒ정신여고 정신 130년사 상권

여인숙 주인장은 특별히 깨끗한 돗자리가 깔린 방을 자랑스럽게 내주었다. 그 방은 7피트 제곱 크기였고 문은 하나밖에 없었다. 방에는 열어볼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짐꾼들의 방과 바꿨다. 이 방에는 창문이 있었다. 짐꾼들과 여인숙 주인은 돗자리 청소를 위해 자리를 두들겼다. 그 방은 일 년에 몇 차례 청소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그 방을 쓸고는 젖은 걸레로 돗자리를 닦았다. 우리는 완벽한 코골이 콘서트를 했다. 빈대는 여기저기 있었으며 사람들 베개에도 기어올랐고, 목침에도 기어 다녔다. 나중에 알았지만 쥐들도 나와 함께 지냈다.

낮 동안 우리는 길을 지나며 참수된 머리를 볼 수 있었는데, 그에 대해 가마꾼들이 얘기를 해주었다. 그러한 광경은 나에게 미국의 아메리칸 인디언이 승리의 표시로 적의 머리 가죽을 벗겨 사람들을 위압하려는 행동을 생각나게 했다. 평화로운 잠을 자다가 내 머리 가죽이 벗겨진 머리털 위로 쥐 한 마리가 통과해 쏜살같이 마루 위로 도망치는 것이 선명하게 보이는 꿈에서 깼다. 우리는 모두 그 쥐를 손에 잡을 수 없지만, 그것을 잡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다면 꿈틀거리는 목을 잡거나 움켜잡아서 던지거나, 판단과 행동은 자동으로 반응할 것이다.

가마꾼들은 3시에 기상해서 밥솥에 밥이 뜸이 들 때까지 여인숙 주인과 재미있게 웃으며 얘기를 나눴다. 우리는 동틀 녘까지 출발을 기다렸다. 가마꾼들은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가마꾼 중 최고의 사람들로서, 절대 불평을 하지 않았고, 내가 이러한 순행을 또 계획한다면 그들을 고용해 주기를 원했다. 그들은 윤 전도부인을 태우는 것은 좋아하지는 않았다. 윤 부인은 그들에게 끊임없이 복음을 전했고, 더구나 그들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술을 끊고 주님을 믿으라고 했기 때문이다. 치과의사가 그의 제자를 개종시킨 얘기를 들려주고는 그녀는 말이 없었지만, 가마꾼들은 적당한 대답을 하기가 곤란했고 그것은 변화하는 모습이었다.

그 할 말 없는 가마꾼들은 이러한 윤 여사의 계속되는 전도 말씀을 들으며 말없이 몇 마일을 걸어야 했다.

행주교회
▲언더우드 선교사가 시작한 행주교회. 1925년 건축한 모조기와집 15간의 행주교회 전경과 성도들. ⓒ행주교회

행주(Haing Ju)26)

오랜 친구들이 있는 곳에 도착해 기쁘고, 또한 모든 이들이 성경공부에 열망하고 있다는 것을 보고 기뻤다. 벌써 서리가 내렸고 김치와 깍두기를 담그기 위해 배추와 무를 준비했다. 부인들은 일시에 바빠져서 성경공부에 전심할 수 없었다. 반면에 소녀들은 출석을 잘하고 공부도 잘하고 있다.

소녀들은 이탈리아 찬미가도 배우고 포르투갈 찬미가도 배웠는데 이제는 책을 보지 않고도 찬양을 잘한다.

행주에는 번영하는 남자학교가 있다. 학교장은 양복을 입고 있다. 소년들이 나에게 묻기를 그들이 밤에 교회에 가면 찬미가 부르는 것을 배울 수 있냐고 물었다. 그리고는 소년들은 저녁에 교회로 와서 남자들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 교회의 주축이면서 한번은 서울에서 열리는 사경회에 참석한 적이 있는 명은이 어머니(Myung-ny Aminie)는 큰 슬픔을 당했는데, 지난 홍수 난리 통에 그의 남편이 물에 휩쓸려 죽었다. 그 남편은 어부였다.

1910년대 이화학당 숙소
▲(자료사진) 1910년대 이화학당 숙소. 사경회에 온 부녀자들은 이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서 잠을 청했을 것이다. ⓒGCAH Digital Gallery

샘위(SamWee)27)

우리가 성경 공부하러 교회에 가면 소년들은 교회학교 철봉에서 그들의 재주를 보여주기를 좋아했다. 그 학교 교장은 양복을 입는다.

젊은 부인들과 소녀들은 특별히 이곳 학교에서 신작로 덕분에 공부를 잘하고 있다. 한 소녀는 짧은 교리문답서를 이미 50문제를 암기했다.

재장말(Chai Jang Hal)28)

우리는 작년과 같이, 지난해 묵었던 매우 어두컴컴한 방에 묵었다. 내가 여기서 잃어버린 머리핀은 창문 위에 잘 놓여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부인은 3개월이나 두통으로 고생하고 있다. 그녀는 진료소에서 약을 타가지고 세브란스병원에서 돌아왔는데, 그녀는 곧 완쾌되리라 믿고 있다.

8살 먹은 어린 소년이 그의 누이와 저녁 성경반에 참석했다. 그는 잘 읽고 또한 습득도 빠르게 한다. 그의 부모는 문맹이지만 그 소년이 샘위(Sam-wee)학교에 다닌 것이 이러한 대단한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끝>

[미주]
15) 옛 양평군 상동면 고송리(고솔, 고술, 고송), 현 양평군 양동면 고송리.
16) 원주~고술은 약 42km 정도이다. 옛길은 대개 ‘원주 감영~만종~광터~질마재~안창~솔치~양동~고송’이다.
17) 현 지명 추정을 못 함.
18) 고술에서 북쪽으로 약 10km(25리)에 있다. 옛 양평군 상북면 龍頭里(용머리), 현 양평군 청운면 용두리이다.
19) 고술에서 북북동쪽으로 약12km(30리)에 있다. 옛 양평군 상북면 多大里(다ᄃᆡ울), 현 양평군 청운면 다대리이다.
20) 지명 확정을 못 함.
21) 고술에서 20리 거리의 지명을 검색하면 갈운리(葛雲里)가 있다. 따라서 모든 정황으로 보아 Chaw-roon은 가우룬(현 갈운리)을 음차한 것임을 알 수 있다.
22) 여주시 강천면 강천리 평촌(平村). ‘Pyun Mal’은 ‘평말’을 잘못 적은 것이다.
23) Koo-Ree-Mee는 ‘구루미’를 적은 것일 것이다. 이곳은 강천면 부평2리 운무실(雲霧里)로서, 파인캐슬골프장 남쪽 마을이다. 운무실~강천은 약 10km(25리)인데 이곳에서 강천으로 전도를 나간 것으로 되어 있다.
24) ‘Poo-row-ee’는 현 여주시 단현동(丹峴洞)을 말한다. 여주시 강천면 가야리에서 남한강 건너에 있는 마을로, ‘부라우 나루터’가 있는 곳이다. 이곳 지명을 ‘Poo-row-ee’라 하였는데, 1910년대 <조선지지자료>에는 ‘불아위(丹江里)’라 하였다. 나루터 부근에 있는 바위로 단암(丹嵓)이란 글이 음각되어 있고, 한자로 단강(丹江), 단현(丹峴)이라 하였으므로 부라우는 ‘붉바우>불ᄫᅡ우>불와우>불아우>부라우’로 음운 변천한 것이다.
25) ‘Kojon’은 현 김포시 ‘고촌읍’을 말한다. 뮈텔의 일기에 비가 많이 내린 날은 한강이 넘쳐 용주, 고정의 교우들이 못 왔다는 내용이 있으므로 이는 한강 물이 불어나면 강 건너 고촌의 사람들이 강을 건너오지 못하였다는 뜻이다.
26) 연세대와 세브란스병원 설립자로 유명한 미국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한국이름 원두우)가 1890년 10월 19일 세운 행주교회가 있는 곳을 말한다.
27) ‘샘 위’를 말하는 지명으로 보인다. 샘 위에 학교가 있었던 것으로 행주 부근 마을로 추정된다.
28) <한국교회 전도부인 자료집> 기록에 보면, 쉴즈양의 지방 수업에 은율과 함께 53명이 참석할 만큼 큰 마을이었는데, 행주, 능곡 부근의 마을로 추정됨.

※이 글의 옛 지명에 대한 각주는 상지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김은철 교수께서 수고해 주셨음에 감사를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