왐볼드 선교사
▲왐볼드 선교사는 독신으로 조선에서 40년간 여성 교육과 여권 신장, 복음 전도에 많은 공헌을 했다.
왐볼드(Katherine C. Wambold) 선교사는 1866년 미국에서 출생, 미북 장로교회 선교사로 한국에 파송되어 1895년부터 1934년까지 40년간 사역했다. 한국명 ‘황보’(皇甫)인 왐볼드 선교사는 서울 선교부에 부임 후 특별히 독신으로 그의 젊음을 여성 교육에 헌신하여 도티(Susan. A. Doty) 선교사와 함께 정신여학당을 운영, 조선 여성들과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육자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 봉사하였다.

서울 선교부에서 일하는 동안 왐볼드는 여성들이 좀 더 자유롭게 일할 수 있도록 서울에 사설 비단 공장을 세웠다. 여성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고, 여성들이 노동을 통해서 수입을 얻게 해서 남성들과 같은 대우를 받게 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남성이 훨씬 많았다. 그런데도 여성 근로자 수는 점차 늘어났고, 그녀의 노력은 한국 사회의 여권 신장에 소중하고 귀한 작은 씨앗이 되었다.

왐볼드는 이렇게 교육을 위해 온 힘을 쏟아 많은 여성이 그녀를 통해 개화되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새로운 여성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맨 처음 왐볼드의 선교 사역을 보여주는 내용이 ‘그리스도신문’ 1897년 4월 22일 자에 소개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윤문하면 다음과 같다.(http://www.19c.co.kr에서 재인용)

련못골 예수당일(연동교회의 일)

4월 16일 오후 네 시경에 서울 동대문 안 연동교회의 여학당에서 조선 여학생 38명을 교육하는 미국 여인 왐볼드(Miss K.S. Wambold) 씨와 미국 목사 기포드(M.H. Gifford)의 부인 헤이든(Hayden) 씨가 여러 외국 선교사와 부인들과 조선 사람 두어 분을 청하여 그 여학당 여학생들의 공부한 것을 보게 하였는데, 그 공부한 내용은 신구약 성경과 지리와 산술과 찬미가와 체조 공부를 매우 조리 있게 배웠고 또 조선 독립가를 참 잘하고 또 그 가운데 우수한 여학생들은 바느질과 음식 만드는 법과 손님 접대하는 여러 예절을 다 잘 배웠으니 조선에서는 처음 이루어진 일이므로 매우 소중해 보였다. 그때 (초대받은) 조선 사람이 그 학당 교육하는 미국 여인들에게 우리나라를 위하여 애를 써서 이같이 가르쳐주셨으니 참으로 감사하다고 말하면서 또 우리나라가 개화하지 않으려면 모르겠거니와 만일 개화를 하려 한다면 전국에 이런 학교들을 많이 설립하여야 할 것이, 지금 잘 배운 여학생들이 후일에 자녀를 잘 교육할 어머니가 될 것이라 하니, 이 말은 참지식이 있는 말이더라.

정신여자중·고등학교 연혁에 보면, 1887년 6월 의료 선교사 애니 앨러스(Annie J. Ellers)는 고종이 하사한 정동 28번지 주택에 ‘정동여학당’을 창립, 제1대 교장으로 취임했다. 이어서 1888년 9월에 헤이든(Mary E. Hayden) 선교사가 제2대 교장, 1890년에 도티(Susan A. Doty) 선교사가 제3대 교장을 역임했다. 왐볼드가 68세로 은퇴할 때까지 봉사한 정신여학당은 복음을 전하는 전도적 측면에 중점을 둔 복음주의 학교였다. 정신여학당 제4대 교장이었던 배럿(M.B. Barret)은 1905년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학생들은 반나절 공부하고 다른 반나절은 일하고 저녁에는 복습하였다. 학생들은 생활하는 방을 치우고 소제하는 이외에, 밖에서 주문이 들어오는 바느질과 뜨개질 등을 하였다.”

1890년 정신여학당
▲1890년 정신여학당 사진. 앞줄 오른쪽이 도티, 모자쓴 이가 헤이든. ⓒthe Moffet Korea Collction

왐볼드는 조선의 여성들을 미국식의 숙녀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이자 성도로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이 때문에 그녀는 재직 중에도 미국식 옷이 아닌 한복을 즐겨 입으며, 조선의 전통을 학생들이 잃지 않도록 교육하였다. 일제의 억압 하에서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학생들을 신앙으로 교육하였으며, 그녀가 가르친 ‘체조’ 과목은 지금도 수준급의 교과과정으로 알려져 있다.

‘독립신문’(The Independent) 1896년 10월 29일, 1897년 7월 8일 자 등에는 그녀의 또 다른 일면을 보여주는 기사를 볼 수 있는데, 그녀는 서울에서 열린 테니스 대회의 특별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다. 거기에 모인 관객들은 왐볼드의 감미롭고 감동적인 목소리에 열광하며 박수와 찬사를 보냈다. 독립신문 기자는 왐볼드에게 최상의 극찬 표현으로 그들의 열정을 분출할 기회를 주었다고 기록하였다. 왐볼드는 여러 행사에서 노래를 불렀고 그때마다 사람들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아름다운 목소리를 소유한 그녀는 선교사들의 모임이나, 만찬 모임마다 빠지지 않고 함께하며 자리를 빛냈다. 따라서 당시의 유명 인사들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한편 왐볼드는 외국에 한국 선교지를 알리는 일에도 큰 역할을 했다. 1905년 ‘The Korea Mission Field’(더 코리아 미션 필드)가 월간지로 출발하며 임시편집장을 맡았는데, 발간 부수는 매월 700부에서 800부로 증가했다. 그는 아래에 소개하는 보고서뿐만 아니라 1917년, 1933까지 꾸준히 한국선교 소식을 알려 그동안 ‘은둔의 나라’로 감추어져 있던 조선의 모습과 20세기 초반 조선의 모습을 해외에 알리고, 한국출판문화의 지평을 넓히는데도 커다란 공헌을 했다.

‘Fifteen Years In The Korea Mission’(한국선교 15년)에 실린 선교 보고에서 왐볼드는 “당진(Tang Chin)에서 마을의 마지막 주민이 주님을 영접하여 그 작은 마을 전체가 기독교인이 되었다. 모든 사람이 나를 만나러 왔고 나는 마치 내가 고향으로 돌아온 듯한 느낌이었다. 그들은 너무나도 친절하고 사랑스러워 이교도의 나라에 와있는 것 같지 않았다”라고 그의 지방 선교 감회를 적었다.

왐볼드가 은퇴하는 해인 1934년, 장로교 선교사 내한 50주년을 맞아 발간한 ‘The Fiftieth Anniversary Celebration of the Korea Mission of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에서 로드(Harry A. Rhodes) 목사는 50년간의 장로교 선교사들의 문서사역을 소개하며, 1901년 빈튼(Dr. Vinton) 박사가 편집장을 맡아 출발한 ‘The Korea Field’ 잡지가 감리교단에서 발행되는 ‘Korea Methodist’와 통합되어 1905년부터 발행되었고, 이 일을 위해 왐볼드 양(Miss Katherine Wambold), 언더우드 여사(Mrs. L. H, Underwood), 드캄프 목사(A.F. DeCamp), 그리고 케르(William C. Kerr) 목사가 편집장으로, 1905~1906년에는 허스트(Mrs. Sadie Hirst) 부인이 편집 협력자로 수고했고 현재(1934년)는 코엔(R.C. Coen) 목사가 편집장으로 사역하고 있음을 보고했다.

이렇게 다방면으로 한국의 여성 교육과 여권 신장에 커다란 공을 세운 왐볼드 선교사는 조선 선교 초기에 조선 땅을 밟았고, 1934년 은퇴 후 귀국했으며 1948년 5월 12일 팔레스타인 예루살렘에서 소천하였다.

1907년 장로교 제1회 목사 장립식
▲1907년 장로교 제1회 목사 장립식에서 7인의 목사가 안수받았다.

왐볼드가 지방에서 사경회를 인도하던 시기 대한국에는 1907년 9월 17일 장로회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을 한 한석진, 서경조(의주), 이기풍, 길선주, 송인서, 방기창(평양), 양전백(구성) 등 7인의 목사를 장립했을 뿐이었다. 따라서 배출된 목사가 많지 않아 당시 개항 도시 이외에는 목회자를 보낼 수가 없었다. 북장로교 1908년 연차보고에 의하면 왐볼드 선교사는 그해 무려 131일을 지방에서 사경회 인도 등으로 보낸 것으로 보고되었다. 이렇게 열정적으로 선교활동을 한 그가 1908년 ‘the Korea Mission Field’에 기고한 그의 선교사역 보고 중 ‘33일간의 지방 사경회’를 통해, 당시 대부분의 교회에 전임 ‘본처전도사’도 없던 시절 어떻게 선교활동을 하였는지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리진만(우간다, 인도네시아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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