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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일문화를 자랑해오던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온 세계가 국경이 무의미할 정도로 왕래가 잦아지면서 급속히 다문화 사회로 가고 있다. 따라서 다양한 문화와 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가 않기에 인류는 지금 영적 전쟁 중이며 시간이 흐를수록 그 전쟁의 양상은 더 치열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전쟁터에 나간 사람은 승리하지 않으면 죽거나 포로가 되어 평생을 노예처럼 비참하게 살 수밖에 없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힘, 기술, 무기, 전략 등 4대 요소를 갖추어야 한다.

그런데 승리를 위해 강력한 힘과 무술을 겸비하고 최첨단 무기에 최고의 전략을 완비했다 할지라도 이 한 가지를 갖추지 못하면 반드시 패배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무엇일까? 바로 피아식별(彼我識別) 능력이다. 적들이 나의 생명을 노리면서 철저히 무장하고 점점 다가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을 아군으로 착각하고 방심하고 있으면 반드시 패할 수밖에 없다.

온 세계가 이슬람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다.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대부분을 점령하고 있는 중동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다. 중동뿐 아니라 저출산 때문에 일손이 부족하여 중동의 무슬림들을 많이 받아들인 유럽도 이슬람의 공공연한 공격과 도전 앞에 속수무책인 상황이다. 처음에는 일자리를 찾아서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라는 간판을 앞세우고 유럽으로 밀려들어갔던 중동의 무슬림들은 점점 숫자가 늘어나자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유럽 사회는 뛰어난 지성과 앞서가는 과학과 기술문명을 기반으로 인류의 행복을 지향하며 ‘요람에서 무덤까지’ 완벽한 복지와 인권을 보장해 왔다. 그런 유럽 사회가 자신들의 문명을 파괴하기 위한 목적으로 스며들어오는 이슬람이라는 상대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목을 잡고 목을 조여 오는 그들에게 맥을 못 추고 버둥대며 질식당해가고 있는 상황이다.

필자가 이슬람에 대해서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에 대하여 동의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분노를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리석은 자의 황당한 편견이 아니라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의 가르침이다. 아래 구절들을 보자.

*믿지 않는 자들은 가장 사악한 짐승들이니라. (꾸란 8:55)
*믿지 않는 자들을 친구로 삼아서는 안 된다. (꾸란 4:144) 
*너희들이 얼마나 잔인하다는 것을 이웃이 알 수 있도록 그들과 싸워라. (꾸란 9:123)
*그들을 어디서 만나든지 죽여라. 왜냐하면 (무슬림을) 박해하는 것은 (비무슬림들을) 살해하는 것보다 더 악하기 때문이다. (꾸란 2:191)
*너희가 이슬람을 떠나 자기들과 같이 되기를 원하는 자는 ... 어디서 만나든지 죽여라. (꾸란 4:89)
*무슬림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하면서 자신의 종족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원하는 자들은 ... 어디서 만나든지 죽여라. (꾸란 4:91)
*소동이 사라지고 종교가 알라의 이름으로 통일될 때까지 (온 세계가 이슬람화 될 때까지) 그들과 싸우라. (꾸란 8:39)

이런 구절들은 그 당시 전쟁 등 특수한 상황에서만 적용되었던 구절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의미를 희석시키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무슬림들에게 꾸란의 말씀은 언제나 지켜야 하는 영원불변하는 진리이기 때문에 정직한 무슬림 학자들은 그런 주장이 궤변이라는 것을 인정할 것이며, 평화를 주장하든 전쟁을 주장하든 모든 무슬림들의 목표는 ‘세계 이슬람화’라는 것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기독교에서도 세계 복음화를 말하고 있으면서 이슬람 교리의 세계 이슬람화를 비난한다는 것은 아전인수(我田引水)격인 편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사랑과 섬김과 기도 등 평화적인 방법으로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존중하면서 복음화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반면 이슬람의 교리는 전혀 다른 방법을 말하고 있다.

물론 이슬람도 평화적인 메시지로 시작했다는 것은 사실이나 그 평화의 메시지는 점점 폭력적으로 변해갔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세계 이슬람화를 위한 방법의 단계적 발전은 이슬람의 교리를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의 삶을 통해서 완벽한 모범을 보이고 있다. 그가 이슬람의 확장을 위해 사용했던 방법은 아래와 같은 네 단계로 분류할 수 있다.

첫 단계는 무함마드가 세력이 약하고 그를 따르는 사람이 별로 없을 때 즉 힘이 없을 때 사용하던 평화적 모델이다. 지금도 무슬림들은 이방 지역에서 세력이 약할 때는 언제나 평화를 표방한다.

두 번째 단계는 방어의 단계다. 무함마드가 메카의 핍박을 피하여 메디나로 거점을 옮기고 방어를 위해서 무기 사용을 허용했던 것을 본받는 행위다. 그래서 아직도 지하드는 방어전쟁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무슬림들도 있지만 이것은 무함마드가 아직 메디나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을 때 약 2년도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잠깐 취했던 행동이었다.

세 번째 단계는 공격하는 단계다. 무함마드는 메디나에 정착한지 2년도 되기 전에 그 지역의 통치자가 되었는데 그가 만든 이슬람 공동체의 숫자가 많아지자 경제적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 때 무함마드는 농업, 공업, 상업, 교육 등을 장려하여 경제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지 않고 손쉬운 방법을 택했다. 사막에서 대상무역 경험이 있었던 그는 대상들이 지나다니는 사막의 길을 잘 알고 있었기에 군사들을 이끌고 길목에 매복했다가 그들을 공격하여 남자는 모두 죽이고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삼았고 돈과 물건을 빼앗아 나눠주는 방법으로 공동체의 경제문제를 해결했다. 그는 대상들을 공격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점차 주변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는 유목민 마을을 공격하여 점령해나갔다. 무함마드 자신이 직접 진두지휘해서 공격했던 것이 27회나 되었다고 이슬람 역사가들은 말하고 있는데 심지어는 이렇게 해서 얻은 탈취물을 어떻게 나누느냐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 꾸란 8장은 ‘탈취물의 장’이란 이름이 붙어 있기도 하다.

넷째는 확장단계다. 무함마드는 자신의 통치 영역을 넓혀가며 자신의 고향인 메카까지 점령하여(630년) 아라비아 반도를 통치하면서 세계의 종교가 알라의 이름으로 통일될 때까지 싸우라고 선언했다. (꾸란 8:39) 
어떤 이들은 그것은 과거의 이슬람이고 현대의 이슬람은 평화적 모드로 바뀌어가고 있다고 주장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과 무함마드가 행한 말이나 행동을 기록해 놓은 하디스는 영원히 바뀌지 않으며 누구도 바꿀 수 없는 무슬림들의 행동지침이고 교리의 근본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무슬림들을 죽이는 전쟁을 통해서 주변 지역을 이슬람화했던 무함마드의 모델은 지금도 헌신된 무슬림들에 의해서 계속 재현되고 있다.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꾸란 8장과 9장만 읽어봐도 생각이 바뀔 것이다.

꾸란의 이런 가르침들 때문에 이슬람 세력이 강한 중동이나 북아프리카에서는 타종교인들이 살해 혹은 핍박을 당하며 유럽이나 서양에서조차 타종교인들을 친구로 삼는 자신의 딸이나 여동생을 살해하는 소위 명예살인이 종종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무슬림들이 숫자가 적을 때는 평화를 주장하다가도 숫자가 많아지면 서서히 위의 꾸란의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하는 헌신된 무슬림들의 적극적 활동이 시작되기 때문에 이미 5%에 육박하는 이슬람 인구가 살고 있는 유럽에서는 무슬림들에 의한 테러가 종종 발생하고 있다는 것은 누가 만들어 낸 이야기가 아니라 엄연한 현실이다. 이런 이유로 “이슬람 때문에 다문화 평화공존 정책은 철저히 실패했다”는 유럽 정상들의 탄식어린 고백이 계속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슬람은 꾸란과 하디스를 통한 무함마드의 명령 때문에 온 세계가 이슬람화될 때까지 계속 싸움을 일으키며(꾸란 8:39) 다양한 문화권의 인류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이를 부인하면서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속고 있든지 아니면 알면서도 상황이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리면서 속이고 있든지 둘 중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피아식별을 바로 해야 한다. 이슬람은 우리의 적이지만(요한일서 2:22) 무슬림들은 우리들의 이웃이며 우리가 사랑해야 할 형제자매들이지 절대로 우리의 싸움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의 전쟁은 육체적 전쟁이 아니라 영적 전쟁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사랑스런 형제자매들이 진짜 적(敵)인 이슬람에 속아서 착란 현상이 일어났기 때문에 사랑해야 할 이웃을 대적하여 싸우고 죽이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사랑하는 형제가 병들어 비정상적 행동을 한다고 그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형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그 병의 흉악한 정체를 정확히 진단해 밝혀내고 필연적으로 고통이 따르겠지만 그 원인을 수술로 도려내거나 약물로 치료하여 그가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올바른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무슬림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이 속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슬람의 정체와 위험성을 밝히는 일을 ‘이슬람포비아’라며 경멸하는 사람들은 마치 암환자에게 소독약만 발라 주면서 환자를 아프게 하거나 자극하지 않는 것이 그들을 사랑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주장하는 의사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무슬림들은 알라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는 비무슬림들을 사랑하지 말고 원수로 여기라는 꾸란의 가르침(꾸란 60:1)에 따라 우리를 원수로 생각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 다만 그들을 속이고 그들의 영혼을 비참하게 만드는 잘못된 영의 정체는 알고 있어야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