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물도, 십자가도 없는 분당우리교회 이찬수 목사 >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니요, 시련 속에서 예수 찾아야죠
건물도, 십자가도 없는 분당우리교회 이찬수 목사



이찬수 목사는 “하나님의 관점을 기록한 게 성경이다. 나의 관점으로 아무리 읽어봐야 성경은 무협지에 불과할 뿐이다. 그래서 내 관점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관점을 덧입어야 한다. 그게 신앙이고 기도다”고 말했다. [엄지 인턴기자(한국외대 산업시스템학과)]교회 건물도 없다. 십자가도 없다. “여기가 교회 맞나?” 싶었다. 분당우리교회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이매동 송림고교 안에 있다. 주일예배 때는 학교 강당을 빌린다. 이찬수(50) 담임목사는 2002년 5월 이 학교 강당을 빌려 목회를 시작했다. 당시 30명에 불과했던 성도 수가 지금은 1만3000명으로 늘었다. 건물이 없고, 십자가가 없어도 사람들이 찾아온다. 이유가 뭘까. 이 목사는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고 설교하지 않는다. 그 반대다. “고통과 시련 속에서 예수를 찾으라”고 말한다. 교회는 학교 강당에서 예배를 보는 대신 학교 측에 장학금을 보탠다.

 1일 분당우리교회를 찾았다. 교정 귀퉁이 건물에 담임목사실이 있었다. 이 목사를 만났다. 문 옆에 세워놓은 액자에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는 글귀가 보였다. 사도 바울이 끝없이 자아를 죽이며 토했던 성경 구절이다. “문 옆에 왜 저 글귀를 올려놓았나”라고 물었다. 이 목사는 “방을 들락날락할 때마다 보려고 적어놓았다”고 답했다. 다시 물었다. “많고 많은 성경 구절 중에 왜 이 구절을 뽑았나.” 대답은 짤막했다. “아무리 해도 내가 안 죽으니까.” 이 목사는 최근 『보호하심』(규장)이란 책을 냈다. 그는 수시로 자신에게 묻는다. “성공한 목회란 뭔가.”

 -목회자에게 매우 중요한 물음이다.

 “요즘은 성도 수가 늘고, 교회 건물이 크면 성공한 목회라고 여긴다. 그걸 하나님의 은혜와 직결시키는 풍토가 강하다. 나는 묻고 싶다. 예수님의 관점으로 봤을 때도 이게 성공한 목회일까.”

 -예수의 눈으로 본 성공한 목회는.

 “이 물음에 답하려면 먼저 예수님의 관점을 알아야 한다. 나의 눈이 아니라 주님의 눈을 아는 것, 이것이 신앙생활이다. 우리는 다들 세상의 성공, 세상의 가치관, 세상의 관점에 익숙하다. 그걸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으로 덧입으려고 애를 쓰는 것, 몸부림치는 것. 이게 진짜 신앙이다. 목회의 성공도 이것과 직결된다. 그래서 기도가 중요하다.”


분당 송림고 강당에서 열리는 분당우리교회 예배. -크리스천은 누구나 기도를 한다. 무슨 뜻인가.

 “어떤 기도인지를 봐야 한다. 많은 사람이 내가 바라는 것을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거기에 복종하기를 바란다. 그걸 기도라고 부른다. 그게 아니다. 하나님은 알라딘 마술램프 안에 있는 지니가 아니다. 우리의 욕망을 풀어주는 심부름꾼이 아니다.”

 -어떻게 기도를 해야 하나.

 “하나님 앞에서 내 관점을 내려놓을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는 거다. 그런 능력을 달라고 부르짖는 거다. 그게 기도다. ‘제 눈에는 이게 축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니라고 하시면 이걸 내려놓겠습니다. 제 관점을 버리고 하나님 관점을 취하겠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이 목사는 사도 바울 이야기를 꺼냈다. 유대교를 믿던 바울은 기독교인을 핍박하고자 다메섹(다마스쿠스)으로 가고 있었다. 그 길에서 그는 그리스도를 체험했다.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은 말에서 떨어지며 고꾸라졌다. 바울의 첫 질문은 ‘당신은 뉘시오니까’였다. 그러자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란 대답이 들렸다. 바울은 두 번째 질문을 던졌다. ‘주여, 무엇을 하오리까.’ 이 목사는 요즘 많은 기독교인이 두 번째 질문을 잊어 먹고 산다. 이건 심각한 문제다”고 지적했다.

 -왜 심각한 문제인가.

 “‘당신은 뉘시오니까’라고 묻고 ‘나는 예수다’란 답을 들으면 기독교인이 된다. 그걸로 나와 하나님의 1차적인 관계가 회복된 거다. 비유하자면 이집트를 탈출해 홍해를 건넌 거다. 홍해를 건넜더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이 나타난 건 아니었다. 대신 광야가 나타났다. 아직 요단강을 건너진 못한 거다. 그래서 그 다음 물음이 중요하다.”

 -그게 바울의 두 번째 물음인가.

 “그렇다. 광야에 서있는 우리는 ‘주여, 무엇을 하오리까’라고 두 번째 물음을 던져야 한다. 그렇게 매 순간 나의 관점을 내려놓고 주님의 관점을 물어야 한다. 적지 않은 기독교인이 홍해만 건너고서 이미 요단강을 건넌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일부 목회자도 마찬가지다. 자기 뜻대로 목회를 하면서 하나님 뜻이라고 말한다. 요즘은 간이 더 커져서 ‘하나님께서 내게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말한다. 왜 그럴까. 그들은 바울의 두 번째 물음을 던지지 않기 때문이다.”

 -주목 받던 일부 목회자가 최근 이런저런 스캔들로 낙마하기도 했다.

 “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 스캔들로 쫓겨난 목사님 이야기를 들으며 내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내가 안 들켰을 뿐이지, 저건 내 이야기다. 내일의 내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했다.”

 -왜 그런가.

 “제 과거를 돌아볼 때 그런 충동이 있었으니까. 성적인 충동, 더 유명해지고 싶은 충동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살얼음판이다.”

 이 목사는 솔직했다. 그것도 신랄할 만큼 솔직했다.

 “나는 설교에서 우리 교회를 오래 다닌 성도들에게 말한다. 작은 교회로 옮기라고 말이다. 거기에 가서 힘을 보태라고 말이다. 그런데 나의 진짜 속마음은 다르다. 사실은 한 명도 안 갔으면 좋겠다. 그런 이중성이 내게 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제게 ‘이 위선자야!’라고 하시진 않을 거다. 나는 정답을 아니까 정답을 던지는 거다. 내가 푸는 게 나의 삶은 아니다. 내겐 성경 말씀대로 살아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한없는 열등감이 있다. 그래서 날마다 죽으려고 애를 쓴다.” 십자가 없는 교회에 십자가가 있었다.

출저 :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