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1.jpg성모 마리아 구원교회(Our Lady of Salvation Church)의 벽에는 핏자국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곳곳에 찢겨진 살점들도 눈에 띄었다.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이후 이라크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최악의 테러 사건이었다.

죽은 사람도 죽은 사람이지만, 생존한 사람들의 피해도 컸다. 테러범의 수류탄과 총탄 그리고 자살 폭탄에 의한 기독교인 살인 행위가 온 이라크를 경악하게 했다.

성모 마리아 구원 교회 맞은편에 사는 16살의 기독교 소년 루디 카리드(Rudy Khalid)는 기독교인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알카에다에 의해 58명이 살해된 이번 테러 사건은 이라크에서 일어난 최악의 폭력 사건은 아니다. 미국의 침공 이래 수만 명의 무슬림들이 죽었다.

이라크는 한때 다양한 신앙과 관습과 전통이 공존하는 놀라운 모습을 가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종교간 충돌은 전쟁과 점령 그리고 빈곤보다 더 심각한 장벽을 이라크에 만들었다. 종교간 정체성이 강화되면서 다양성에 대한 관용은 쇠퇴하였다. 유대인들은 이미 오래전에 이 나라를 떠났다. 기독교 지도자들에 의하면, 한때 80~140만 명에 달하던 기독교인들은 그 수가 줄어들어 절반이상이 이라크를 떠났다.

이번 사건으로 4시간 동안 인질로 잡혀있던 바삼 사미(Bassam Sami)는 테러범들이 파괴한 것은 이라크 주민이 아니라 이라크의 정신과 이라크라는 나라 자체이며, 꿈을 실현하려고 살아가는 이유도 파괴되었다고 말했다.

신기루 같은 이라크라는 나라와 그 나라에서 자행되고 있는 폭력으로 큰 분노와 역겨움을 느끼고 있는 기독교인 소년 칼리드는 이라크에서는 어느 누구도 기독교인을 위한 해결책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이라크 보안 부대가 테러범들을 진압하기 위해 시리아 천주교 교회(Syrian Catholic church)인 성모 마리아 구원 교회로 진입한 이후 기독교인 인질들이 풀려났지만, 풀려난 사람보다 더 많은 이들이 죽었다. 사건은 마무리 되었지만 이러한 무법 천지에 대해 분노를 표출한 이라크 지도자는 없었다. 불합리하고 잔인한 폭력을 비난한 교황 베니딕트 16세도 이러한 사건의 재발을 방지할 해결책을 말하지 못했다. 이번 사태의 피해 정도를 오히려 악화시켰다고 비난을 받고 있는 이라크 치안 책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일요일 저녁 총을 품고 교회에 들어간 이들의 마음에는 오직 하나의 목표만 존재했다. 생존자 사미는 그들이 오직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 왔다고 말했다.

잔악한 사건 현장과는 무관하게 화려하게 장식된 이 교회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는 이라크 경찰에게도 ‘평화의 장소’인 교회에서 피가 낭자하고 살점과 뼈들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는 일은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총탄이 널려 있는 곳에서 붕대를 동여맨 생존자들과 그들의 가족과 친지들은 거리에 남겨져 있었고,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울고 있었다.

와심 사비(Wassim Sabih)는 살해된 두 명의 사제 중 하나였다. 생존자들은 사비 신부가 테러범들에게 신도들을 구해달라고 요청하다가 총으로 난사되어 온몸이 부서져 나갔다고 말했다. 메야스르 알 카스보우트로스(Meyassr al-Qasboutros) 신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라크를 떠나지 않고 남아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어떤 생존자들은 이에 동의를 표했다. 수류탄의 유탄을 맞고 머리를 부상당한 18살의 라디 클리미스(Radi Climis)는 이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라크에 머물러 있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라크의 기독교인 대부분은 이렇게 불안하고 위험한 이라크에 계속 머물러야 할지에 대한 확신이 없어 보인다.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기독교인 마을 카라고쉬(Qaraqosh)에서 바그다드로 온 스테판 카로미(Stephen Karomi)는 이라크 기독교인 모두가 자신을 위해 그리고 제 정신으로 살아가기 위해 이라크를 떠나려 한다고 말했다.알 카에다와 연루된 이들에 의해 자행된 이번 사건으로 혼돈은 계속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미국 정부관계자에 따르면, 테러범들이 행동을 개시했다는 증거를 입수한 뒤에도 이라크 보안군은 개입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또한 이 관계자는 살인자들이 계획적으로 기독교인들을 처형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며, 상황이 더 나빴을 수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내용은 이라크의 관료와 생존자들의 증언과는 달랐다.

이라크 정부 각료에 의하면 보안군이 교회에 도착했을 때, 범인들 중 두 명이 자살폭탄을 터뜨려 23명의 인질이 죽었다고 발표했다. 또 다른 이는 이 발표를 지지하며 자살폭탄 이후에 6~15명이 살해당했다고 밝혔다. 한 정부의 고위 관료는 교회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를 수행하기도 전에 테러범들이 자살 폭탄을 터뜨려 많은 신도들이 살상을 당했다고 밝혔다.

생존자들에 따르면 테러범들이 들어오면서 총격을 난사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만행을 저지른 테러범들은 아랍 국가의 방언을 사용했으며,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고 50세의 생존자인 반 압둘라(Ban Abdullah)는 말했다. 압둘라의 딸 마리 프레지(Marie Freij)는 오른쪽 다리에 총을 맞아 세 시간 이상 피를 흘리며 누워 있어야 했다.

테러범들이 들어오기 전 라파엘 쿠타이미(Rafael Qutaimi) 신부는 한 무리의 신도들을 뒷방으로 피신시켰다. 그리고 두 개의 책장으로 문을 막아 방어벽을 만들었다. 그리고 신부와 신도들은 하나님의 보호를 위해 기도했다. 하지만 그 방에 들어올 수 없었던 테러범들은 창문으로 수류탄을 던졌다. 방 안에 있는 사람들 중 네 명이 죽고 많은 사람들이 다쳤다.

생존자 사미는 운이 좋았다. 큰 부상을 입지 않고 뒷방으로 피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미는 사건 다음날 자신의 여러 친구들이 사망했다는 것을 알았다.

아주 긴 사망자 명단을 본 사미는 분노로 고개를 흔들며 왜 신부들과 친구들이 죽어야 했는지 모르겠다고 슬퍼했다.

한국선교연구원(krim.org) 파발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