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복음주의선교신학회(회장 안희열, KEMS)는 최근 금천양문교회(담임 이훈구)에서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와 함께 "이슬람 선교와 상황화 이론 - 내부자 운동과 비판적 상황화"란 주제로 '제55차 한국복음주의선교신학회 정기학술대회 - 선교단체장 초청 이슬람 상황화 포럼'을 개최했다. 이 날 행사에서는 정흥호 교수(ACTS 선교학, GSN 상임이사, 사진)가 "상황화 과정을 위한 방향성 진단"이란 주제로 발표했고, 여러 선교사들이 패널로 토론에 참여했다. 다음은 한철호 선교사(선교한국 상임위원장)가 발표한 "이슬람 상황화의 관점에서 본 선교동원" (출처 : 선교한국)

들어가는 말

hch3.jpg상황화는 우리가 전달하려는 복음의 핵심을 어떻게 전도 대상자들이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전달할 것인가에 주된 관심이 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상황화 문제를 다룰 때, text와 context를 중심으로 논의가 진행된다. 즉 복음과 문화라는 관점에서 상황화를 접근하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라고 볼 수 있다. 동시에 상황화를 복음이 전달 되도록 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 또 다른 중요한 변수가 있다. 그것은 전달자 자신의 상황화이다. 이것은 마샬 멕루한이 말한 "Medium is Message"(매체가 메시지이다)를 선교적 상황에 적용한다면 '선교사가 복음이다'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복음을 어떻게 상황화 할 것인가도 중요하지만, 선교사가 어떻게 상황화 될 것인가, 혹은 선교사가 어떻게 복음이 될 것인가를 살펴보는 것도 매우 중요한 측면이라고 볼 수 있다. 복음은 진리이기 때문에 분명히 받아들여진다. 따라서 문제는 복음의 상황화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전달하는 전달자들의 상황화가 더 중요할 수 도 있다. 상황화와 선교동원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더욱 그렇다. 따라서 본 발제는 이슬람 상황화와 선교동원과 관련된 선교사들의 정체성의 문제에 대한 짧은 관찰을 나누고자 한다.

최근 이슬람 선교환경의 변화

오늘날 이슬람 상황화 논의에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다. 프론티어스 총재인 릭 러브는 “언행일치의 진실성을 갖춘 정체성‘이라는 글에서(1) 테러, 세계화와 다원주의로 인해서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가 세 종류의 청중에게 동시에 전달되는 시대에 와 있다는 점을 언급한다. 이러한 변화는 모든 영역에서 그렇지만 이슬람과 관련해서 더욱 그렇다. 9.11테러 이후 이슬람과 서구(기독교)와의 긴장이 확산되면서 이슬람에 대한 관심이 극대화 되었고, 따라서 이슬람지역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이슬람권선교와 선교사들이 존재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처럼 이슬람권 사역자들이 주목을 받는 시기가 없다. 언론에서 이를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작은 사건만 발생해도 의도하지 않게 즉각적으로 선교사들과 연관되는 것을 보게 된다. 최근 리비아 사건에서 이런 측면을 보게 된다. 그러면서 이슬람선교에서 선교사들의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둘째로, 세계화는 선교지와 본국의 구별을 무효화 시켰다. 간단한 구글(google) 검색만으로도 세상은 '우리가 누구인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런 일을 왜 하는지'를 단숨에 알게 된다. 이슬람국가에서 사역하는 선교사가 아무리 자신을 비즈니스맨으로 혹은 NOG의 일원으로 소개해도, 본국에 돌아와 교회에서 선교보고 한 동영상을 한 번의 검색으로 확인해 낼 수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이제까지 전략적으로 사용했던 사역자의 두 가지 신분, 즉 파송된 나라에서는 선교사이고 사역하는 곳에서는 텐트메이커로 되어 있는 것이 무의미 하거나, 혹은 선교사의 정체성을 더욱 혼돈스럽게 만든다. 진리(참/진실)를 전파한다는 전도자가 자신의 정체성 자체가 진실하지 않은 것을 수용자들이 확인하게 될 때, 우리가 전하려는 진실은 이미 그 힘을 잃어버리게 된다. 셋째로 다원주의로 인해서 서로 다른 인종과 종교 또는 정치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한 사회 속에서 살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복음을 전해야 할 대상들이 바로 우리 주변에 와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나, 이미 우리 가운데, 타종교의 믿음 체계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자신의 신앙을 핍박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예로, 릭 러브는 호주의 한 교회에서 일어난 사건을 들었다. 호주의 한 교회에서 열린 이슬람 세미나에서, 강사가 무슬림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다가가서 친구가 되라고 신자들을 격려했다. 그리고 무슬림들이 여자와 이교도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와 관련된 코란 몇 구절을 읽었다. 그런데 그 모임 안에 이슬람으로 개종한 호주 사람이 그 사역자를 '증오 발언법'으로 소송했고 그 결과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최근 한국 사회에 이슬람 인구의 증가로 인해 한국교회에서 이슬람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 이에 대한 한국교회의 일차적인 반응은 '이슬람이 몰려오고 있다' 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이슬람선교 방안에 대한 논의였다. 이슬람 선교방안이라는 주제였지만 실재 내용은 한국에 확장되고 있는 이슬람에 대한 대응 방안이었다. 그리고 그 모임의 원래 제목은 '이슬람 쓰나미'였다. 그 모임들을 통해서 발언된 내용의 대부분은 이슬람의 부정적인 부분을 공격적인 내용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는 한국에 와 있던 무슬림 혹은 이슬람으로 개정한 사람들로부터 강력한 저항을 받게 되었고, 결국 법적대응을 당하게 되었다. 그 결과 한국 사회 안에서 무슬림 선교의 문이 오히려 막혀 버린 것이다. 자신의 종교에만 집중하고 있던 대다수의 한국의 무슬림들에게 기독교에 대한 강력한 반감을 가지게 하는 계기가 되어버렸다. 한국교회가 한국에 와 있는 무슬림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는 더욱 제한되어 버리고 말았다.

따라서 오늘날은 이 세 청중 중 어느 하나의 특정 청중을 분리해 의사소통하는 것이 점차 불가능해 지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느 한 상황에서만 말한 내용이라도 결국 전 세계가 듣거나 알게 된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특정 청중에게만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한 청중을 향해 말한 것이 다른 청중에게 들리게 되어 있다. 따라서 서로 다른 청중을 향해 서로 다른 메시지를 전하거나 서로 다른 인물로 나타나는 것이 이제는 더 이상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제는 우리가 복음을 전달할 때 모든 청중에게 동일한 가치와 진정성을 가진 메시지를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의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세 종류의 청중은 첫째로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사람들, 둘째로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세속화된 세계 사람들, 셋째로는 우리를 파송하는 교회들이다. 즉 우리는 일반적으로 상황화라고 했을 때, 첫 번째 대상자를 주로 염두에 두고 말해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상황은 한 메시지에서 세 종류의 청중 모두를 고려한 메시지가 전달되어야 하는 시대에 와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이제까지 상황화를 우리와 그들의 관점에서 어떻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그들에게 전달될 것인가의 관점으로 보아왔다. 그러나 현재는 복음이 우리와 그들에게 동시에 어떻게 동일한 가치와 진정성을 가지고 전달되게 할 것인가에 문제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현실을 고려한 동원과 상황화가 일어나야 한다. 두 영역에 고려가 있어야 한다고 릭 러브는 말한다.

첫 번째는 핵심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 더 이상 축소 할 수 없는 그리고 우리의 전체를 다 헌신할 수 있는 즉 그것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내어 놓을 수 있는 핵심 메시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것이 복음이다. 그리고 그 핵심 메시지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표현 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공개적으로 들어내 놓을 수 있는 핵심 메시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만 아니라 무슬림이 들어도 그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방법이면서도 메시지의 핵심이 전달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최근에 전도의 동기를 지옥의 형벌이라는 관점 보다는 하나님의 영광 혹은 구원을 복이라는 개념(창 12;1-3, 갈3:6`14) 으로 전달하려는 시도는 이러한 의도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로는 전달자의 정체성이 투명하며 통합적(integrated)되어야 한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과거에는 선교사가 두 개의 정체성을 가지고 두 개의 세상에서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이중적 정체성을 유지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실제 이슬람권에서 이 문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심각하다. 이중적 정체성은 실제 상황에서 진리를 선포하고자 진정한 정체성을 감추어야 하는 것에서 오는 양심의 문제 뿐 만 아니라, 실제 복음을 담대히 전하는 일에 오히려 주저하게 되고, 인격적 분열 뿐 아니라, 영적인 분열까지도 가져오고 있다고 릭 러브는 주장하고 있다. 진리는 언행일치가 일어날 때에만 전달 될 수 있다. 이슬람권에서 이미 서구세력 앞잡이의 상징이 되어 버린 선교사라는 패러다임, 이중적 정체성을 가지고 부담을 느껴야 하는 선교사/테트메이커 패러다임 등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역자에 대한 새로운 정체성을 가져다주는 상황화 작업이 필요하다. 릭 러브는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는 사업가이자 사도다'.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는 영어 교사이자 사도다'.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는 구호요원이자 사도다'라고 말함으로서 어떤 상황이든지, 어떤 청중에게든지 동일한 통합된 정체성을 가진, 언행일치의 사역을 할 수 있다고 제안한다. 과연 L Mark가 지적한대로(2) '구글(google) 검색에도 문제없는 투명성'을 가진 어떤 상황에도 동일한 정체성을 가진 통합된 사역자가 될 때만, 우리가 전달하려는 메시지의 핵심이 말로만 아니라 삶과 통합된 진정한 복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정체성으로 가지고 그 정체성이 그들에게 통전적 즉 언행일치로 다가갈 때, 진리가 올바르게 전달될 것이다. 혹은 비록 그들이 그런 사역자를 핍박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고, 이것이 복음의 증거의 뿌리가 될 것이다. 따라서 강력한 이슬람권에서의 선교는 왜곡된 정체성을 가지고 많은 프로젝트를 하는 것보다(이 경우 아무리 신분을 위장해도 그들은 다 알게 된다), 올바른 정체성(하나님의 복은 나누길 원하는 자)을 가지고 언행일치의 삶을 살아가고, 그래서 혹 그들이 사역자를 핍박하거나 추방할 때라도, 그들은 마음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고, 그것이 복음의 씨앗이 될 것이며, 그 씨앗을 통해 하나님께서 선교하실 것이다.

젊은이 선교동원과 상황화의 과제

이런 관점에서 젊은이 선교동원을 본다면 분명한 과제가 등장하게 된다. 동원은 본질적으로 적극적이고 선동적인 메카니즘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동원은 "go and preach"라는 패러다임을 가지고 진행 되게 된다. 역사 속에 등장했던 가장 대표적인 젊은이 선교동원운동은 1888년부터 1930년 때 까지 미국에서 일어났던, 학생자원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이였다. 이 운동은 40여 년 동안 10만 명을 선교에 동원했고, 그 가운데 2만 여명이 타문화권 선교사로 나가는 놀라운 선교동원의 역사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러한 놀라운 역사 뒤에는 당시의 선교 패러다임이 반영되어 있었다. 19세기말은 여전히 식민지 패권주의선교의 시대였고, 그러한 흐름이 학생자원자운동 안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당시 젊은이들을 동원하기 위해 사용했던 구호는 ' 건너 와서 우리를 도우라'(행16;4)와 '세계 복음화는 우리 세대에'(World Evangelization in this generation!)으로 복음화와 서구의 문명을 동일시하던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의 '와서 도우라'라는 동원 구호는 많은 엘리트 젊은이들의 감성을 건드리고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헌신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물론 당시에도 복음의 핵심적 가치(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아야 한다는)에 대한 도전이 핵심 가치였음이 분명하지만, 당시 사회와 문화 안에서 상황화 되지 않을 일방적인 선교가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전혀 다른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오늘날 회자되는 선교중심의 이동 혹은 다변화 그리고 세계화 및 다원주의시대에서 단순히 복음을 상황화 할 뿐 아니라 복음의 전달자들에 대한 상황화를 필요로 하는 시대에 와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더 이상 "from to"의 시대가 아니라 “from everywhere to everywhere" 의 상황에 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슬람권 선교동원에 있어서의 패러다임도 변화가 필요하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메시지의 상황 뿐 만 아니라 메신저들의 상황화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청년들을 선교에 동원하는데 있어서 그들이 어떻게 복음을 상황화 할 것인가의 문제 뿐 만 아니라 그들 자신들이 어떻게 오늘날의 세계에 복음의 전달자로서 적절하게 상황화되고 있는 가를 봐야 하기 때문이다. 릭 러브가 언급한 것처럼 이슬람권 선교를 위해 핵심적 메시지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투명성과 통합됨을 갖추어 모든 상황과 청중들에게 진실로 다가갈 수 있도록 상황화 된 자들이 메신저로 동원되도록 하는 일이 필요하다.

한편 오늘날 젊은이들이 처해 있는 환경은 투명성과 통합성, 그리고 모든 청중에게 상황화 된 동일한 가치를 가지고 다가갈 수 있도록 구비되기에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존 스토트는 최근 자신의 마지막 책 “제자도”에서(3)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을 왜곡하는 시대정신으로, 다원주의, 물질주의, 상대적 윤리관, 그리고 나르시시즘을 언급했다. 한국의 젊은이들 또한 이러한 시대정신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이런 젊은이들에게 그들이 가지고 있는 복음의 핵심 가치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이해하도록 함으로서 다원주의를 극복하고, 그 복음의 핵심 가치에 헌신 하는 것이 최고의 가치임을 깨닫게 함으로서 물질주의의 유혹을 물리치고,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언행일치의 투명성을 갖춘 자가 되어 상대적 윤리관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자를 모두 오게 하리라(사43:7)의 목적을 자신의 존재 목적으로 확인하여 나르시시즘을 거부하는 자들이 되도록 구비시켜 줄 때, 그들은 모든 상황과 사람들에게 진실로 다가 갈 수 있는 상황화 된 메신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한철호 선교사 (선교한국 상임위원장, hanchulho@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