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세계선교협의회(대표회장 강승삼, 이하 KWMA)와 한인세계선교사회(KWMF) 주최로 열린 제5차 세계선교전략회의(NCOWE V)가 지난주 막을 내렸습니다. 이번 행사에서 안희열 교수(침신대 선교학, 한국복음주의선교신학회 회장)는 "한국형 에딘버러대회의 요체"란 주제로 Plenary Session을 진행 했습니다. 본지는 한국선교의 역사적인 기점이 되는 이번 대회에서 전해진 내용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NCOWE V 관련기사)

ahy.jpg1. 들어가는 말

1910년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가 열린지 100년이 지난 지금 KWMA와 KWMF가 이를 기념하고 한국형 에딘버러대회의 요체를 발견하기 위해 ‘NCOWE(세계선교전략회의) V’ 대회를 개최하게 되어 감사하다. 사실 에딘버러 선교사대회는 1910년 6월 14일부터 23일까지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에서 열린 세계 최초의 선교사대회였다. 하지만 에딘버러대회는 서구교회의 잔치였다. 159개 선교단체에서 무려 1,215명의 대의원이 참석하였는데 비서구인은 고작 19명에 불과하여 전체 가운데 1.6%만 차지하였다. 그런데 이 19명 가운데 한국대표가 무려 15명이나 참석하여 세계교회와 함께 연합하며 선교동원에 동참하려는 마포삼열(Samuel A. Moffett),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게일(James S. Gale) 선교사 등이 있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서구교회는 1815년부터 1914년까지 선교의 “위대한 세기”를 맞이하면서 세계선교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었다. 이 때 한국교회는 세계의 변방에 있던 작은 나라에 불과하였다.
 
에딘버러대회가 열릴 당시 한국교회는 외부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받는 교회’였다.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교육적으로 타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한국은 오늘날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소말리아처럼 가난하였고 소망이 보이지 않던 나라였다. 하지만 선교사들이 가져온 복음은 한국 사람들에게 꿈을 불어 주었다. 이후 한국교회는 놀랍게 변화하여 세계 2위의 선교강대국이 되었다. 과거에 한국교회가 ‘받는 형’이라면 이제는 ‘주는 형’으로 탈바꿈하여야 한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의 말씀처럼 그저 주어야 한다. 때마침 KWMA를 중심으로 한국교회의 선교패러다임 변화를 요구하며 이번 NCOWE 대회를 통해 한국형 에딘버러대회의 요체를 발견하여 세계선교에 기어코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래서 이번 NCOWE 대회의 표어를 ‘하나님의 선교행적 찾기’라 하였다. 본고에서는 먼저 1910년 에딘버러대회의 선교적 성찰을 통해 긍정적인 면과 수정·보완해야 할 점을 찾아내어 오늘날 한국교회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발견하고, 나아가 한국형 에딘버러대회의 요체를 발견하여 세계선교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 방법을 찾아내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다.

2. 에딘버러대회의 선교적 성찰

20세기 전반기 세계 최고의 선교동원가였던 존 모트(John R. Mott, 1865-1955)는 과다한 경쟁과 사역의 중복을 막고 모든 선교단체들이 함께 연합하여 “이 세대 안에 세계복음화”(The Evangelization of the World in this Generation)를 이루기 위해 제1차 세계선교사대회를 에딘버러에서 가졌다. 그가 기독청년회(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 YMCA)에서 대학생 사역과, 학생자원선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 SVM)의 의장으로서 활동과, 세계기독학생연합(World’s Student Christian Federation, WSCF)에서 활동은 선교동원가로서 탁월한 위치를 갖게 하였다. 그래서 모트는 특별히 젊은층과 평신도들을 선교 동원시키는데 아주 탁월하였다. 모트는 에딘버러대회를 2년 동안 철두철미하게 준비한 끝에 8개 주제를 선택하여 분과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각 분과위원회는 20명으로 제한하여 전체 160명을 구성하였는데 대다수가 미국, 영국, 대륙출신이었다. 에딘버러대회의 주제가 “이 세대 안에 세계복음화”인 것만큼 에딘버러대회는 선교신학을 다루기보다는 선교전략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그래서 에딘버러대회를 “How Mission”이라고도 부른다. 100년 전 서구교회가 논의하였던 에딘버러대회의 전략이 한국교회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져 주고 있는지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2.1. 긍정적인 측면
 
첫째로 선교전략지를 탁월하게 선택하여 협조를 이끌어냈다. 피터 와그너(C. Peter Wagner) 교수는 효율적인 선교를 위해 ‘3R’(right time, right person, right place)을 언급하면서 장소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는 선교 집중지역으로 인도, 극동지역(한국, 중국, 일본, 몽골), 이슬람권을 선택했는데 존 모트의 풍부한 세계여행 경험은 어느 곳이 선교 집중지역인 줄 알았고, 선교단체로 하여금 이곳에 집중적으로 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인도만 하더라도 당시 최대의 선교전략지여서 푼잡 출신의 스튜어트(Robert Stewart) 박사는 인도에 더 많은 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강력히 요청하였다. 중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북경대학교의 중국어 교수인 창(T. Y. Chang) 박사는 중국의 변화하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중국인의 마음은 이제 텅 비워 있어서 그리스도가 자리 잡을 때가 왔다. 4, 5년만 기다린다면 아니 3년 정도면 중국이 변하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그로인해 중국인의 마음은 활짝 열릴 것이다. 5년이 지나면 너무 늦다! 일본의 경우를 보아 알듯이 너무 늦지 않도록 서둘러라. 이제 시작하라.” 당시 중국내지선교회의 영향을 받은 501명의 젊은 중국인들이 중국 복음화에 헌신 한 것은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한국의 경우 제1위원회의 보고에 따르면 “한국인은 동방의 모라비안”이라 극찬을 하였다. 윤치호는 한국은 점차 기독교화 되어가고 있으며, 한국에서 너무 성급한 회심은 덕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화가 된다고 보고하였다. 만주 선교사로 활동하던 로스(Ross) 박사는 한국교회의 자립선교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간증하기도 하였다. 선교 전략지에 속한 한국이 짧은 선교역사 속에서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음을 에딘버러 선교사대회 기간 중 모든 대의원들에게 각인시켜 준 것이다. 에딘버러 선교사대회는 한국, 중국, 인도와 같은 선교 전략지에 선교사들을 집중적으로 파송하기 위해서는 본국 교회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본국 교회가] 이 역할을 못한다면 우리의 과업은 소망이 없다.” 또한 비기독교세계에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모든 크리스천의 일치(unity)가 있어야 함을 강조하여 ‘경쟁’ 위주의 선교 틀에서 벗어나 함께 ‘상생’하는 선교로 탈바꿈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두 번째는 연합과 일치의 추진을 극대화시켰다.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의 가장 큰 목적 중에 하나는 모든 교회가 선교사역에 일치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연합과 일치는 제8위원회의 주제로 다루어졌고, 대회 한 달 전에「월간회보」(Monthly News Sheet)에도 특집으로 실렸다. 그렇다면 에딘버러 대회가 연합을 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 존 모트는 10가지 영역에서 연합을 제안하였다: (1) 선교자문위원회구성; (2) 강력한 선교지분할정책; (3) 학교교육평가; (4) 연합대학설립; (5) 협력의료선교; (6) 선교신문; (7) 선교잡지; (8) 찬송가; (9) 사상교류; (10) 교회연합위원회구성.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는 연합과 일치의 좋은 예로 한국을 소개하였다. 한국 선교사들이 서울에 대학을 설립할 때에 교단별로 경쟁하지 않고 필요한 곳에 대학을 세워 사역의 효율성을 높였다는 것이다.
 
중국에서도 일치가 필요함을 한커우(Hankow) 주교가 보고하였다: “우리는 중국 크리스천들 사이에 리더십을 상실하고 있다. . .중국인들이 더욱 국가주의자가 되려고 하면 할수록 이들은 중국을 위해 하나의 교회를 더욱 요구할 것이다.” 존 모트는 연합의 범위를 사역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교단까지 확대하여 성공회, 장로회, 회중교도, 침례교, 감리교처럼 교단을 따지지 않았고 교파별 연합을 강조하였다. 더욱이 에딘버러 대회는 교단을 뛰어넘어 타종교와의 연합도 강조하였다: “우리는 로마 가톨릭교회와도 연합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기억할 것은 이들은 계급제도의 바티칸이 아니라 우리가 지속적으로 함께 할 수 있는 매우 헌신된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한편 연합과 일치 추진 위원회는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증진시키기 위해 이후 모임에서 이를 계속 발전시켜 나갔다.
 
세 번째로 선교사 준비를 철두철미하게 할 것을 강조하였다. 선교사 준비 위원회의 의장인 더글라스 멕킨지(W. Douglas Mackenzie) 박사는 에딘버러 대회가 열리기 1년 6개월 전부터 모임을 가지면서 보고서를 준비하였는데 그는 세 가지 방향으로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1) 각 선교단체로 하여금 언어훈련과 선교사의 생활과 사역을 다루도록 안내할 것; (2) 선교사 모집을 할 때 목사, 전도자, 교육가, 의사, 비즈니스 선교사처럼 다양하게 할 것; (3) 선교지를 다양하게 하지 말고 선교집중지역을 선택하여 선교사를 파송할 것. 선교사 준비 위원회는 각 선교단체의 선교사 허입위원회, 선교훈련원, 신학대학, 신학교, 성경학교, 다른 기관들에게 공문을 보내어 위의 세 가지 사항을 인지하고 협조하도록 도움을 요청하였다. 20세기 초반에는 학생들의 선교동원이 가장 폭발적으로 일어났는데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선교사 준비위원회는 제5위원회로 소속되어 선교사 자질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모든 것은 파송 받는 선교사의 자질에 달려 있습니다. 이 자질은 단순히 지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입니다. 단순히 영적인 것만 아니라 신체적인 것입니다. 단순히 신체적인 것만 아니라 도덕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중의 하나가 아니라 이 모든 것이 함께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보고서에서는 선교사의 자질 다섯 가지를 소개하기도 하였다. 첫째는 타종교를 연구하여야 하고, 둘째는 선교역사에 대한 지식이 충만하여야 하고, 셋째는 사회학을 알아야 하고, 넷째는 가르치는 기술이 있어야 하고, 마지막으로는 현지 언어를 공부하고 습득해야 하는 것이다. 당시 식민지 팽창주의 시대에 자문화우월주의(ethnocentrism)에만 빠지지 않고 현지언어습득을 강조한 것은 반가운 일이다. 특별히 보고서에는 언어습득훈련을 잘하는 선교단체로 중국내지선교회(CIM)를 소개하였고, 또한 아랍언어훈련을 잘하는 훈련센터가 카이로에 있으며, 인도, 중국, 일본어훈련센터도 동일하게 선교지에 있음을 보고하였다. 일반적으로 “현지어는 혈관과 같다”고 하였는데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는 참석한 대의원들에게 이를 확실하게 인식시켜 주었다.
 
네 번째는 국내 본부 사역을 잘하도록 인도하였다. “선교훈련은 올바른 선교의 시작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선교사훈련이 중요하다는 예기다. 에딘버러 대회는 국내본부사역 위원회 의장으로 터키에서 18년간 선교활동을 하였고, 미국해외선교위원회 해외국장인 바튼(Barton) 박사를 임명하였다. 바튼 박사는 미국에서 탁월한 선교훈련가 중의 한 명으로 선교단체들로 하여금 선교사 훈련을 할 때에 다음 네 가지 사항을 고려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첫째는 현지인교회를 자립하게 하는 것, 둘째는 교육선교의 효과를 높이는 것, 셋째는 의료선교를 잘 감당하는 것, 넷째는 산업선교를 확대해 나가는 것이다. 이처럼 국내본부사역 위원회는 선교단체의 운영을 효율적으로 하도록 안내하는 것과 선교사훈련을 효과적으로 감당하도록 도움을 주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였다.
 
이 위원회는 선교경험이 풍부한 선교사들이 위원회에 선정되어 바람직한 선교사훈련을 만들어 내는데 집중토록 하였다. 무엇보다도 국내본부사역 위원회에서는 ‘모라비안 이상’(Moravian Ideal)을 만들어 지역교회와 신학대학에서 정착되기를 소망했다. 이곳에서 모라비안 이상이 뿌리를 내려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평신도들도 선교사로 헌신하는 자들이 많이 일어나기를 기대하였다: “오늘날 유럽에서는 평신도들이 전면전에 나서서 선교사역을 도와야만 한다. 요청하건데 에딘버러 대회의 실제적인 결과물의 하나로 유럽에서 여러 국가들의 평신도들이 함께 연합하는 것이 연구되어진다면 이 운동은 유럽인을 하나로 묶을 수 있다.” 이처럼 에딘버러 선교사대회는 젊은이들과 평신도들을 선교동원 시키는데 국내본부사역 위원회가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섯 번째는 선교와 정부 간의 관계형성을 주제로 다루었다는 점이다. 사실 에딘버러 선교사대회가 열릴 당시의 선교는 지금보다는 훨씬 수월한 편이었다. 제국주의 시대의 선교는 오늘날에 비해 선교사 추방이나 박해가 적기 때문이다. 당시 선교활동에 큰 어려움을 겪던 나라는 네팔, 부탄, 아프가니스탄 정도였고, 중국은 기독교에 점차 우호적인 나라 중 하나로 바뀌었다. 초기기독교선교역사를 보아 알듯이 선교와 정부가 적절한 관계 맺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정부라 함은 두 가지를 의미하는 데 하나는 선교사 자신이 소속된 정부를 말하고, 또 다른 하나는 선교지의 정부를 말한다. 선교사는 이 두 개의 정부와 긴밀한 관계 형성을 해야만 한다. 관계 형성이라는 것은 법을 지킨다는 말이다. 오늘날 역시 이 두 관계를 무시하고 선교사역에 몰입 한다면 ‘열정’은 있으되 ‘지혜’가 부족한 선교로 전락할 것이다.

2.2. 수정·보완해야 할 측면
 
첫째로 교회개척에 관한 발표를 통해 선교사 자신들이 사용하고 있는 전략을 평가하고 새롭게 제안하는 논의가 없다는 점이 아쉽다.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가 열릴 당시 서구 선교사들은 전통적인 선교기지(mission station)식 교회개척을 선호했다.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길목이 좋은 곳에 땅을 구입하여 자신들의 사역에 필요한 교회, 병원, 약국, 학교 등을 세워 활동해 나가는 것을 선교기지라 말한다. 선교기지의 장점은 현지인들을 쉽게 모을 수 있고, 사역을 용이하게 할 수 있지만 현지인을 세우는 데는 목적을 두지 않는다. 식민주의 선교시대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취약점을 극복하여 현지인 스스로 자립, 자치, 자전하는 ‘3자 원리’로 교회개척 할 것을 주장한 사람이 헨리 벤(Henry Venn)이었고, 당시 ‘3자 원리’식 교회개척은 서구인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그렇다면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 때 8개 위원회가운데 이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었는가? 그렇지 않다. 사실 제2위원회의 ‘현지인 교회와 사역자 위원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자립, 자치, 자전을 강조하기는 하였다. 예를 들어 제2위원회에서는 한국교회의 자립과 자전하는 능력을 잠깐 소개하여 한국인의 탁월한 교회개척을 각인시켜 주었다. 하지만 선교기지식 교회개척에서 왜 자립에 실패하였는지, 왜 성공하게 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고하고 토론하지는 않았다. 연구자는 자립이라고 하는 것은 ‘신앙적’ 자립과 함께 ‘재정적’ 자립이 함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시 서구 선교사들은 교육을 통해 현지인들에게 신앙적 자립을 강조하였지만 재정적 자립에는 큰 관심을 보여주지 않았다. 오늘날 교회개척도 마찬가지이다. 빈곤 지역이나 의존성이 높은 나라에서 신앙적, 경제적 자립을 동시에 갖춘 현지인 지도자를 세우는 것이 무척 힘들다. 선교훈련가는 선교사를 훈련시킬 때 ‘복음전도자’ 수준의 선교사를 길러내야 할 것인지 아니면 ‘교회개척’ 수준의 선교사를 배출해야 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에딘버러 대회는 선교사 동원과 파송을 강조한 것에 비해 안식년 선교사나 베테랑 선교사들이 자신들의 교회개척 사역을 돌아보고 무엇이 잘되고, 잘못되었는지를 지적해 주는 위원회 활동이 없다는 점이 아쉽다. 이것은 서구 선교사들의 계몽주의적 사고가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둘째로 현지인 지도자 양성과 위임에 관한 구체적인 제안이 없어서 아쉽다.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에서 존 모트는 세계복음화의 주역이 점차 서구교회가 아닌 현지인교회가 될 것이라는 그의 판단은 가장 높이 평가받아야 할 부분이다:

우리가 더 강력하게 세계복음화를 바라야 하는 것은 세계복음화가 단지 유럽인과 미국인의 사역 만이 아니라 아시아인과 아프리카인의 사역이 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지인 교회들이 전도와 선교의 정신으로 성장하는 것을 보여 주는 전 세계의 보고를 연구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은 소 망과 확신을 갖게 된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그리스도인들 편에서 자기 부정적 선교 활동과 적극적인 전도를 위한 주도적 발전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반드시 계속해야만 한다. 이로써 잘 훈련된 현지 전도자들과 지도자들의 선교군단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존 모트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현지 지도자들이 많이 일어나 이들이 훗날 세계복음화의 주역이 되리라고 기대했다. 그의 판단은 옳았다. 그래서 그는 에딘버러 대회에서 비기독교세계에 선교를 촉진시키는데 일등공신이 되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각 주제위원회에서 현지인 지도자를 양성하고 위임하는 부분들이 상세히 다루어 지지 못한 점이다. 주제위원회의 의장 중에는 선교지 경험이 10년차, 20년차, 심지어 30년차가 넘는 사람도 있어서 현지인 위임 과정에서 겪던 이야기가 많았을 텐데 다루어 지지 못하였다. 식민주의 선교시대에 선교사 상이라고 하면 전형적으로 부모(parents)단계이다. 소위 선교사의 역할 가운데 1단계에만 머물고 있는 것이 태반이다. 2단계인 갈등단계와 3단계인 위임단계는 별로 나타나지 않는 것이 취약점이다. 선교사 리더십의 꽃은 위임인데 아직 에딘버러 선교사대회에서는 이것까지 다루지는 못했다.
 
셋째로 ‘보여서’(showing) 제자 삼는 훈련을 강조하지 않은 것이 아쉽다. “선교사는 선생이 되지 말고 멘토가 되어라”는 말이 있다. 선교사는 그저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가 아니라 삶과 인격으로 현지인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말이다. 마태복음 28장 19절-20절의 말씀처럼 ‘가르치는’ 것보다 ‘지키게’ 하는 것이 최종 목적이 되어야 한다. 즉, 선교사는 ‘가르쳐서’(teaching) 변화시키기 보다는 ‘보여서’(showing) 일꾼 삼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 때 제3분과의 교육위원회에서는 교육선교에 중점을 두었고 다섯 가지 사항을 강조하였다: (1) 미션스쿨과 정부의 교육시스템과의 관계; (2) 미션스쿨에서의 현지어 교육; (3) 여성과 소녀들을 위한 교육; (4) 농업을 포함한 산업교육; (5) 기독교 문서 제공. 교육선교가 비기독교세계에 질 좋은 교육을 제공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취약점이 있음을 존 모트는 알고 있었다: “유럽에서의 고급 시스템의 근대식 교육의 위험성이라고 한다면 너무 학문적으로 치우치면 치우칠수록 도덕적 회의론에 빠질 수 있다.” 연구자 역시 이에 동의한다.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가 열릴 당시 서구 선교사들은 ‘BE’ 보다는 ‘KNOW’에 중점을 둔 교육을 하였다. 바라기는 ‘BE’와 ‘KNOW’와 ‘DO’가 함께 연합하는 ‘수레바퀴이론’이 강조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마지막으로 포괄적 교리를 수용하는 결함을 지니게 되어 아쉽다. 사실 에딘버러대회는 선교의 지나친 경쟁과 중복을 막기 위해 연합과 일치를 강조하는 초교파적인 모임이었다. 다양한 교단적 배경을 지닌 선교사들과 선교전문가들이 함께 모인 뜻 깊은 자리에서 이들의 주 관심은 오로지 일치에 있다 보니 대회가 마칠 즈음에 어떤 교리적 요소가 담긴 선언문 채택을 하지 않고 다만 기독교 세계교회의 회원들에게, 비기독교 세계교회의 회원들에게 보내는 두 개의 메시지를 채택하는 것으로 대회를 종결지었다.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에서는 줄곧 ‘교파’간의 일치를 강조하였고, 나아가 ‘종교’간의 일치도 강조하여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연합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선포하였다. 따라서 에딘버러대회는 ‘에큐메니칼 선교사대회’의 성격을 지녔고, 이후의 선교사대회는 로마가톨릭과 그리스정교회와의 연합과 일치까지 확대하는 모임으로 전개되어 에딘버러대회는 훗날 에큐메니칼(Ecumenical) 그룹과 복음주의(Evangelical) 그룹으로 나눠지게 하는 불씨를 초래하고 말았다.

3. 한국형 에딘버러대회의 요체

2010년은 한국교회가 125주년이 되는 축복과 감사의 해이다. 1885년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에 의해 기독교가 소개 된지 한 세기가 훌쩍 지났다. 그 동안 한국교회는 수많은 고난과 박해 가운데서도 놀랍도록 성장하여 세계에서 두 번째로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는 선교강대국이 되었다. 이제 KWMA를 중심으로 한국교회는 한국적 선교모델을 발견하여 세계선교에 기여할 때가 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때가 늦은 감이 있지만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지난 2천년 동안의 세계선교는 소위 ‘서구교회’의 선교라 볼 수 있다. 비서구교회는 감히 어떤 선교신학이나 선교전략을 제대로 제시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서구교회는 점차 그 세력을 잃어가고 있고 비서구교회가 급성장하고 있다. 서든침례신학대학원(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의 선교학 교수였던 마크 테리(John Mark Terry) 박사는 2050년 이전에 비서구세계가 세계선교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그 중심에 한국교회가 있다. 본 논문은 지난 125년 동안 한국형 에딘버러대회의 요체가 무엇이지를 발견하여 이러한 한국형 선교전략이 세계선교에 기여되기를 바란다. 사실 한국형 선교전략의 요체는 한국교회 자체 내에서 생성될 수도 있지만, 외부로부터 전달된 것이 우리의 것으로 자리매김 할 수도 있다. 다만 본고에서는 1차와 2차 로잔대회 때 서구학자들이 주장하였던 미전도종족선교와 전방위개척선교는 한국교회가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지만 ‘한국적’이란 관점에서 제외하였음을 밝힌다.

3.1. 네비우스 선교
 
에딘버러대회가 열린 당시 서구교회의 핵심 전략은 ‘3자원리’-자립, 자치, 자전-였다. 감사한 것은 에딘버러대회 제2분과위원회에서 3자원리를 다루며 자신들의 전략을 평가하였다. 그렇다면 한국선교 125주년을 맞이하는 한국교회가 한국적 선교모델을 찾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연구자는 한국적 선교모델 가운데 가장 역사가 깊고 영향력 있는 전략이라면 네비우스 선교를 꼽겠다. 사실 네비우스 선교전략은 중국에서 시작되었지만 꽃을 피운 곳은 한국이다. 그렇다면 2010 세계선교전략회의(NCOWE) V 대회 때 네비우스 선교로 성장한 한국교회를 찾아내어 어떻게 고난을 극복하고 성장·발전하였는지 연구하고 분석하였더라면 훨씬 더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다.
 
네비우스는 1854년 중국 영파에 처음으로 파송 받았지만 실패를 경험한 뒤 자신이 왜 실패하였는지를 헨리 벤(Henry Venn)과 루퍼스 앤드슨(Rufus Anderson)이 주창한 3자원리를 통해 분석 하였다. 이후 1861년 산둥으로 옮겨 3자원리로 사역의 열매를 맛보게 되어, 1885년에 자신의 성공사례를『중국선교보고서』(Chinese Recorder)에 보고하였고, 이를 1886년에는『선교사역의 방법』(Methods of Mission Work)으로 출판하였다. 이것은 1899년에는『선교지 교회에서의 설립과 발전』(Planting and Development of Missionary Churches)으로 재출판 되어 당시 선교사들에게 폭발적인 호응을 받았다.
  언더우드의 요청으로 1890년 한국을 방문한 네비우스는 10가지 선교전략을 소개하였다: (1) 순회전도; (2) 모든 사역이 성경중심이어야 함; (3) 자전; (4) 자치; (5) 자립; (6) 체계적인 성경공부; (7) 엄격한 성경중심 생활-금연, 금주, 금무; (8) 선교지분할협정; (9) 법정문제에 관여치 아니함; (10) 경제적 문제에 도움을 주는 자세. 곽안련(Charles Allen Clark) 선교사는 네비우스 선교정책가운데 한국교회를 부흥시킨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로 성경공부를 지적하였다. 연구자 이에 동의한다. 초기한국교회의 성경공부는 사경회를 통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사경회는 평신도를 대상으로 한 모임과 교회 지도자를 키우기 위한 모임으로 나뉘어 졌는데, 주로 겨울철 농한기나 봄철 제초 작업이 끝난 7월에 각각 두 번씩 열렸다. 사무엘 모펫(Samuel Moffett)은 한국교회가 사경회를 통해 새신자를 양육하고, 자질을 계발시키며, 매서인, 전도자, 조사, 전도부인 등을 발굴하여 파송할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또한 사경회에서 영수, 조사, 권사를 발굴할 수 있어서 한국교회의 필요한 일꾼들은 거의 사경회를 통해서 채울 수 있었다. 사경회를 거치면서 훈련된 일꾼들은 영적인 군사로 무장되었고, 각 지역교회를 조직적으로 운영하거나 교회 문제에 대해 스스로 결정할 수 있었고, 나아가 자력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1909년 모펫 선교사는 한국선교를 25년을 회고하면서 “네비우스로부터 우리 선교사역의 두 개의 위대한 원리-사경회와 자립-의 사상적 씨가 나왔다”며 네비우스 선교정책과 사경회와의 관련성을 언급하였다.
 
한국교회는 사경회를 통해서 평신도 훈련을 강화할 수 있었다. 목사를 집중적으로 배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경회는 평신도 지도자를 배출하는데 가장 큰 영향력을 끼쳤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힘이요 저력이었고 교회를 성장시켰다. 앞으로 한국교회가 10/40 창 지역에 어떻게 현지인 지도자를 양성할 것인가는 영원히 풀어야 할 숙제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서구의 전략만을 수용하는 자세에서 벗어나 이미 120년 전 한국교회에 소개된 네비우스 선교전략을 각 선교지마다 토착화시킬 수 있도록 방안을 모색하여야 할 때이다. 한국교회에 성공적으로 적용된 네비우스 전략이 각 지역마다 똑같이 적용되기에는 어려움이 따를 수 있다. 각 지역마다 세계관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한국형 선교모델인 네비우스 전략을 더욱 연구하여 한국교회가 세계선교에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3.2. 자립 선교
 
한국형 선교모델 가운데 빠질 수 없는 것이 자립선교(self-supporting mission)이다. 자립은 네비우스 선교방법에 소개되어 있지만 한국교회에서 성공한 전략이라 할 수 있다. 1910년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에서도 서구교회의 자립선교에 관한 논의가 있었는데 결론은 실패하였다고 보고하였다. 한국, 중국, 일본 등지에서 ‘일부의 성취’가 있기는 하지만 범세계적으로 적용되지 못하였다고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에딘버러대회에 참여한 모펫 선교사는 한국인의 자립선교를 극찬하며 한국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외국의 돈이 투자되지 않는 나라가 바로 한국이라고 보고하여 참여한 대의원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한국인들은 스스로 우리 선교사에게 와서 “여러분은 우리에게 영적인 부담감을 주었지만, 초기에 우리가 더 많은 돈을 달라는 요구에 여러분들이 반응해 주지 않은 것에 감사하다”고 고마움을 표시하였다. 우리는 “한국에서 해외선교가 현지인 지도자를 돕기 위해 돈을 쏟아 붓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며 한국교회의 자립 선교를 널리 알려 화제가 되었다.
 
곽안련 선교사 역시 네비우스 선교정책 가운데 한국교회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것은 재정적 자립이라고 하였다. 예를 들어 한국교회는 당시 아무리 가난하다 할지라도 선교사의 도움을 받지 않고 값을 기꺼이 지불하려고 하였다. 성도들이 교회에 헌금하는 액수가 엄청나게 늘어나 큰 교회에서는 자기 교회에서 사역하는 조사에게 월급만 줄 뿐만 아니라 작은 교회를 재정적으로 돕는데도 힘을 썼다. 자립의 원리는 교회에만 제한되지 않고 학교에도 적응되어 평양숭실중학교의 경우 선교사의 후원이 어느 정도 있었지만 “각 학생은 매일 한나절 동안 노무과에서 일하고 그 대가로 양식을 제공받았고, 모든 학생들은 방과 후에 길 닦기, 새끼 꼬기와 신발 만들기, 문지기 일, 책 제본하기, 인쇄소에서 일하기 등”으로 자신의 학비와 식비를 자력으로 해결해야만 했다. 세계적인 역사학자인 케네스 라토렛(Kenneth S. Lataurette)이 한국교회는 외부의 도움에만 의존하지 않고 자신들의 힘과 능력으로 교회건물을 세우길 원하는 자들이라고 지적한 것처럼 경제적 자립정신이 무척 강했다.
 
더욱이 곽안련 선교사는 사경회의 성경공부가 한국교회의 자립, 자치, 자전을 실현시키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고 지적했다. 평양 장대현교회가 그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날 당시 장대현교회는 선교사의 의존도가 높은 교회였지만, 부흥운동이 있은 후 길선주 목사가 담임하게 되었고, 재정적으로도 부족함이 없어서 15년 동안 39개 교회나 개척할 수 있었다. 더욱이 길선주 목사가 1905년에 주도한 새벽기도회는 한국의 독특한 기도회로 정착되었다. 이 새벽기도회는 한국교회가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궁핍이 함께 하고 있을 때 오로지 살아계신 하나님만이 이런 고통의 터널에서 해방시킬 것이라 믿고 시작했는데 지금까지 한국 고유의 신앙형태를 만들게 되었다.
 
자립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신앙적’ 자립과 ‘경제적’ 자립이다.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약 10년간 사역하면서 현지인들의 신앙적 자립에만 중점을 두다 보면 한 가지를 놓치게 된다. 그것이 바로 경제적 자립이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에딘버러대회에서 서구교회조차도 자립선교가 실패하였다고 보고하였는데 한국교회는 달랐다. 이처럼 자립은 한국교회의 것이요 한국형 선교모델인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선교사들은 어떻게 한국의 자립선교를 선교지에서 실현시킬 수 있을지 연구해야 할 것이다. 그 중에 하나로 연구자는 현지인에게 십일조 생활을 강조하고 싶다. 교회의 지도자는 십일조 생활이 몸에 베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현지인 스스로가 물질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토록 도와줘야 한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경험들이 무수히 많지만 10/40 창 지역에서 오랫동안 외세에 시달림을 받은 나라들이나, 경제적으로 빈약한 국가에서 현지인들은 선교사에게 대한 의존도가 무척 강하여 자립이 약하다. 앞으로 이런 지역에서 한국형 선교모델인 자립선교를 어떻게 토착화시킬 것인지 논의되기를 바란다.

3.3. 현지인 위임 선교
 
“선교의 꽃은 사람을 키우는 것이다”라고 한다. 한국선교의 특징이라면 ‘프로젝트’가 아닌 ‘사람’을 세우는 선교에 집중해 왔다. KWMA는 2009년 1월말 현재 “2009년도 사역 영역별 현황”이란 보고에서 교회개척과 제자훈련이 한국 선교가운데 68.2%를 차지한다고 보고하였다. 영혼구령의 최대 목표는 현지인 지도자에게 위임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교사의 역할은 ‘부모단계->동역자단계->위임단계’로 서서히 바꿔야 한다. 위임(leaving)이란 선교사가 교회를 개척하고 난 뒤 현지인에게 이양하는 것을 말한다.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교회를 세우고 이들에게 1년간 양육시킨 뒤 이양하고 과감히 떠났는데(행 11:19-30, 13:1-3) 이런 모습을 한국선교에서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이것이 한국선교의 핵심이요 꽃이다. 그런데 선교사는 현지인에게 위임할 때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를 기대해야 한다. 선교사 스스로가 현지인이 잘 될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정말로 잘 되는 것을 말한다. 선교사가 ‘피그말리온 효과’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우선 문화우월주의 사상을 버려야 한다. 초기한국교회 당시 서구 선교사들이 자신의 문화우월주의 사상을 버리는데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날 즈음 현지인 지도자를 세워 사역을 맡기는데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한국교회의 축복이었다. 사람은 ‘보고 배운다’고 평양대부흥운동 이후부터 걸출한 한국 지도자들이 배출되기 시작했는데 이들이 바로 김익두, 주기철, 이성봉 목사 등이다.
 
한국교회 역사 중 가장 위대한 위임은 이길함(Graham Lee) 선교사가 길선주 목사에게 위임한 사건이다. 당시 이길함은 평양 장대현교회의 담임목사로서 길선주 목사를 지속적으로 지켜봤다. 길선주 목사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기 전 장로의 신분으로 신학생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았다. 놀라운 것은 장로의 신분으로 있던 길선주가 1907년 평양대흥운동 마지막 날인 1월 15일에 대중들 앞에서 참회하며 자신의 죄를 낱낱이 고백했다. “나는 아간과 같은 죄인이올시다”며 친구가 임종 1년을 앞두고 자신에게 재산을 관리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미망인의 돈 100 달러를 사취했다고 회개했다. 길 장로가 회개가 있은 후 함께한 1천 5백 명의 회중들은 각자 통곡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사기, 횡령, 음주, 거짓말, 증오, 도둑질을 고백했다. 조지 굳윈(George Goodwin)은 1904년 웨일즈 부흥운동 때 로버츠가 중심 역할을 했다면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때는 길선주 장로가 그 일을 담당했다고 기술했다. 알렌 선교사 역시 길선주가 평양에서 일어나 성령의 불길을 전국으로 확대한 주역이라고 말했다.
 
평양대부흥운동이 장대현교회에서 전국으로 확산될 때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본 사람이 이길함 선교사이다. 그는 길선주 장로의 영성과 인성을 먼저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1907년 10월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길선주에게 장대현교회의 담임목사 자리를 물려주었다. 한국선교가 20년이 채 넘는 시점에 놀라운 변화가 한국교회에서 일어난 것이다. 선교사 중심에서 현지인 중심으로 리더십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축복이요, 변화의 요체가 되었다. 이후 길선주 목사는 약 800명의 목사와 전도사를 세워 일꾼을 길러내는 박차를 가하였고, 60여 교회를 더 개척하였다. 한 사람의 현지인 지도자가 길러지게 되니 선교사의 몫을 10배, 20배 이상으로 감당할 수 있었다. 그래서 “토종 지도자 한 명이 선교사 100명 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선교사는 자신이 사역하는 당대에만 잘해서는 안 된다. 그가 현지인을 세워 교회를 맡기고 떠난 이후에 현지인에 의해 사역이 유지되고 성장하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한국교회는 ‘사람’을 세우는데 중점을 두어왔고 현지인 위임에 매진하여 왔다. 현지인 위임에 중요한 것이 바로 자립이다. 놀라운 것은 한국 지도자들은 위임받은 이후 선교사의 도움 없이 자립하는데 헌신적이었다. 평양 제3장로교회, 의주제일장로교회, 평양서문교회 등이 좋은 실례이다. 특히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이길함 선교사가 길선주 목사에게 위임한 것은 한국교회의 좋은 선례가 되었다. 한국교회는 현지인 위임이라는 고귀한 유산과 전통을 지니고 있다. 한국 선교사들이 어디에서든지 현지인을 지도자로 세울 때 ‘이길함-길선주 위임법’을 생각하길 바란다. 현지인 위임이 왜 한국교회에서 성공했는지 연구하여 각 선교지에서도 적용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때이다.
 
3.4. 순교 선교
 
한국 선교사들 가운데 가장 큰 특징이라면 ‘순교 선교’(martyrdom mission)의 정신이 강하다. 이 말은 복음으로 인해 박해나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 전하는 일에 매진하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순교를 당한다 할지라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 확장에 힘쓰는 것을 말한다. 사실 순교 선교는 초기기독교시기부터 태동하였지만 유독 한국 선교사들에게 강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요즘 한국교회가 전방위개척선교(frontier mission)에 열심을 다하는 것도 순교 선교의 정신이 강하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특별히 일제강점기를 맞이하면서 순교 선교가 강하게 일어났다. 당시 널리 펴져있던 전천년주의 종말론 신앙은 한국인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고 주님 오실 날이 멀지 않았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하는 사상을 갖게 되었다. 전천년주의 종말론은 환란전 휴거설 신앙을 갖게 되어 어떤 박해도 순교도 두렵지 않게 만들었다. 주기철 목사나 손양원 목사는 좋은 예라 할 수 있겠다.
 
한국교회의 야성이라면 순교 선교의 정신이다. 이러한 야성이 아직도 살아 있기 때문에 젊은이들이 전방위 개척지역에 과감히 헌신하려 간다. 이러한 순교 선교는 이미 100년 전부터 한국교회에서 태동되었고 한국교회의 좋은 정신적 유산으로 남아있다. 순교 선교의 정신이 현지인에게 나타나기 위해서는 사영리나 브릿지 전도 같은 구술전도 형태로만 접근해서는 안 된다. 삶과 인격으로 보여주는 성육신적 선교가 일어나야 현지인들이 마음을 열 수 있다. “말씀이 육신이”(요 1:14) 된 것처럼 삶으로 현지인들을 변화시켜야 한다. 그래야 훗날 선교사가 그 자리를 떠나도 순교 선교의 정신이 현지인에게서 나타날 수 있다. 따라서 일시적이거나 빨리 현지인을 배가시키는 선교전략은 가급적 피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이제 우리가 지니고 있는 순교 선교의 정신을 선교지에서 어떻게 꽃 피울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3.5. 가족공동체 선교
 
한국인은 ‘흥’의 문화를 지니고 있다. 한번 흥이 나면 시너지 효과는 상상이상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2002년 한일월드컵 경기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흥을 도우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우리는 ‘가족’(family)이라는 정신이 필요하다. 서양에서는 팀워크(teamwork)라고 사용하지만 우리의 가족 개념과는 차원이 다르다. 가족이란 말은 식구라는 뜻으로 공동체가 혼연일체가 되어 생사고락을 함께하기 때문에 팀웍크보다 훨씬 효과가 탁월하다. 문상철 박사는 한국선교사들의 중도탈락 1순위가 동료선교사들과의 갈등이라고 보고하였다. 그만큼 한국선교사들에게는 팀웍크가 약하다. 오랜 세월동안 경쟁 문화와 일등 문화에 길들어져 있기 때문에 나와 다른 동료들과 팀워크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반면 대륙문화-미국, 독일, 중국-에 속한 선교사들은 한국인보다 팀웍크가 강하다. 이들은 ‘일치’(unity)를 하는데 뛰어나다. 대륙문화의 특징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한국적 전략으로 소개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 연구자는 팀웍크라는 단어 대신 가족이란 용어를 사용하기를 제안한다. 한국인은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가족이란 느낌을 받았을 때는 모든 것을 쏟아 붓는 기질이 있다. 가족은 희생과 눈물이 따른다. 때로는 고난과 순교도 따르지만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바로 ‘가족공동체’란 정신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가족공동체란 정신이 초기한국교회에 있었기 때문에 모진 고난과 박해도 극복하고 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다. 가족공동체란 어느 지역보다도 ‘한국적’이다. 연구자는 앞으로 한국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할 때 ‘가족공동체’의 정신을 훈련시켰으면 한다. 선교훈련은 일반적으로 ‘KNOW’(타문화이해)와 ‘DO’(사역기술)에 집중되어 있는데 ‘BE’(인성과 영성)에 더욱 집중하였으면 한다. 머리만 크고 기술만 있는 선교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격을 지닌 선교사를 배출해야 한다. 연구자는 이것을 ‘수레바퀴이론’이라 부른다. 즉 ‘BE-KNOW-DO’가 한 몸을 이뤄 수레바퀴처럼 돌아가야 우수한 선교사를 배출할 수 있다. 파송 전에 훈련받지 않고는 마가처럼 얼마든지 선교지에서 사고를 칠 수 있기 때문이다. 감사한 것은 21세기 선교전략지인 남반구는 가족의 개념이 강한 지역들이 많다. 한국교회의 정신적 유산인 ‘가족공동체’를 이곳에서 적용될 수 있도록 연구해야 할 것이다.

4. 나가는 말

세계선교는 북반구에서 남반구도 지축이 이동되고 있다. 존 모트는 앞으로 선교지교회가 선교주도국이 될 것이라고 예언을 하였는데 그의 말이 옳았다. 100년 전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 때 제1분과위원에서는 “한국인은 동방의 모라비안”이라 극찬을 하였는데, 이제 한국교회는 동방을 뛰어 넘어 세계선교의 든든한 기둥이 될 것이다. 한국을 중심으로 한 제2/3 세계 국가들이 선교동원과 선교사파송에 큰 몫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경우 향후 40-50년간 선교에 파란불이 켜져 있다는 것은 좋은 징조이다. 2050년까지 1인당 국민소득(GNP)이 8만 불까지 지속적인 고도성장, 2050년까지 한국이 영국과 같은 복합민족국가와 같은 다문화사회 형성, 시니어선교사의 확대, 신학생의 수요증가, MK들의 헌신자 증가는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빨간불도 만만치 않다. 저출산과 고령화로 선교인력 감소와 어린아이와 젊은 청소년의 교회출석 감소는 한국교회가 극복해야 할 과제이다.
 
21세기 남반구 시대 때 세계선교에 기여할 나라는 누구일까? 당연히 한국교회이다.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받는 교회’라면 이제는 ‘주는 교회’로 탈바꿈하여야 한다. 주님께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고 말씀 하신 것처럼 이제는 주어야 할 때이다. 바로 이 시기에 KWMA가 한국선교 125주년을 맞이하여 한국형 선교전략을 발견하여 세계선교에 기어코자 하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무엇보다 한국형 선교모델 가운데 가장 탁월한 것이 네비우스 선교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번 NCOWE 대회 때 한국교회 내에서 네비우스 선교로 성장한 교회들을 찾아내어 연구·분석하여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한국교회가 이제 서구의 전략들을 무조건 수용하는 틀에서 벗어나 한국적 선교모델을 더욱 연구하여 세계선교에 기여한다면 한국교회는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시도할 것이다.

안희열 교수 (침신대 선교학, 한국복음주의선교신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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