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Tokyo 2010’ 선교대회(이하 동경대회)를 앞두고 최근 방주교회(담임 차영근)에서 열린 ‘Tokyo 2010 Pre-Consultation’은 한 참석자의 말대로 '작은 동경대회'였다. 다음은 한국 발표자로 나선 안교성 교수(장신대)의 요약문으로, 안 교수는 '한국교회와 에큐메니칼 선교' '20세기 3/4분기의 한국교회의 세계선교와 선교동인'이라는 두 가지 주제로 발표했다. (사진과 글 : 2010 동경세계선교대회 한국준비본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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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와 ‘에큐메니칼 선교’
선교와 일치는 기독교의 본질 가운데 하나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요한복음 17장의 기도에서 이를 밝히셨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17: 21, 23b) 이러한 선교와 일치를 하나로 연결한 개념이 바로 ‘에큐메니칼 선교’라고 할 수 있다. 이 개념은 넓은 의미에서는, “선교와 일치를 연결시켜, 선교일치는 물론 교회일치를 추구하는 선교”라고 할 수 있다. 좁은 의미는, 특히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현지교회인 민족교회가 독립성을 띠게 되는데, 이러한 “민족교회가 각자가 처한 지역에서 선교 지도력 혹은 주도권을 가지는 선교”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에큐메니칼 선교’라는 용어 가운데 ‘에큐메니칼’이란 용어가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혼동을 초래하고 있다. ‘에큐메니칼’이란 용어는 크게 세 가지 뜻을 지닌다. 첫째, 교회 일치를 위한 전 세계 교회를 망라하는 의미를 지닌다. 둘째, 특히 20세기 후반에, 신학적 진보와 보수 간의 양극화 과정 중에, 소위 복음주의(evangelical)의 대립어로 나타난다. 셋째, 종교 간의 대화(inter-faith dialogue)를 의미한다. 다만 이 세 번째 의미는 그냥 에큐메니칼이라고 하지 않고, 확대된 에큐메니칼(wide(r) ecumenism)이라고 하며, 세계교회협의회는 이에 대한 논의를 하지만, 공식적으로 수용하고 있지 않다.
여하튼 이 글에서는 주로 첫 번째 의미로 사용한다. 즉 필자는 각 교회들이 두 번째 의미에서는 의견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첫 번째 의미에서는 예외가 있을 수 없다고 본다. 이제까지의 교회 및 선교역사를 볼 때, 이런 노력이 매우 부족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협의의 에큐메니칼 선교를 거부하더라도, 광의의 에큐메니칼 선교는 반드시 필요하며, 이것은 선교일치라고 말할 수 있다.
에큐메니칼 선교의 관점에서 선교역사를 유형별로 분석해보자. 첫째, ‘근대 개신교 선교운동 개시와 에큐메니칼 선교’ 기간이다. 이 시기에는 선교기관 특히 선교사들이 선교일치의 주도권을 지고, 신학적 성향은 주로 복음주의적이었다. 둘째,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와 에큐메니칼 선교’ 기간이다.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사건은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분수령인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이다. 이 대회는 선교기관과 교회가 함께 주도권을 보였지만, 선교기관이 주가 되고 교회가 합류하는 양상을 보였다. 신학적 성향은 복음주의 및 진보주의적인 양면이 다 있었으나 전 세계 선교연합이라는 틀 안에 함께 있었다. 셋째, ‘제2차세계대전 종전과 에큐메니칼 선교’ 기간이다. 이 시기에 소위 협의의 에큐메니칼 선교 개념이 본격화했다. 특히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후기식민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대부분이 서구식민지였던 선교지의 민족교회들이 독립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정치의 독립, 교회의 독립, 선교의 독립이 이뤄졌다. 서구선교기관(교파선교부, 초교파선교회)으로부터 민족교회로 선교 지도력이 이양되고, 현지선교기관 및 선교사들은 현지교회 지도력 하에 있게 되었다. 하고 선교는 더 이상 선교기관이 현지교회를 상대로 한 것, 서구에서 비서구를 향한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교회 간에 각 지역의 선교 과제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협력하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물론 이런 과정에서 많은 마찰이 나타났다. 이런 변화 가운데, 주로 선교기관과 민족교회의 관계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으며, 점차 선교기관이 약화됨에 따라 민족교회와 선교기관의 모교회가 직접 관계를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초교파선교회의 경우는 모교회를 배경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에큐메니칼 선교의 변화의 틀에 맞아들지는 않았다. 넷째, ‘세계교회협의회 및 국제선교협의회의 병합 이후의 에큐메니칼 선교’ 기간이다. 이 시기에 교회가 주도권을 가지며, 선교가 거기에 합류하는 양상을 보였다. 이 과정에서 선교의 주도권을 확보하고, 복음주의적 신학을 강조하기 위하여 로잔대회가 열렸다. 이로 인하여 신학적 진보와 보수 진영이 각각 에큐메니칼 운동을 따로 전개하였다.
협의의 에큐메니칼 선교는 자칫 보면, 전통적인 선교 혹은 소위 복음주의적 선교와 갈등 관계를 갖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러한 선교에 기여할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협의의 에큐메니칼 선교는 현지교회인 민족교회의 존재와 지도력을 강조하는 선교이다. 전통적인 선교 혹은 복음주의적 선교는 민족교회를 무시하거나 제외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로 인하여, 민족교회의 선교적 지도력이 무시되거나, 민족교회의 선교적 자원이 활용되지 못하거나, 나아가 민족교회가 선교적 교회가 되는데 방해를 하게 된다. 그런데 오늘날 전 세계 거의 모든 곳에 민족교회가 있다. 그런데도 선교기관들이 전 세계 거의 모든 곳에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로 인하여, 개척선교를 위한 선교사 재배치 등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만일 민족교회가 선교적 지도력을 맡도록 하고, 선교기관들은 개척선교가 필요한 곳에 집중한다면, 민족교회도 살고, 기존선교도 살고 개척선교도 살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민족교회가 선교적 교회가 되도록 돕는 과정을 통하여 민족교회의 선교(교단선교부나 초교파선교회 모두)를 활성화할 수 있다. 오늘날 비서구선교가 세계선교의 중요한 과제이다. 그런데 이것을 가장 확실하게 수행할 수 있는 방법은 대부분의 비서구교회를 이루고 있는 민족교회들이 선교 지도력을 갖는 선교적 교회가 되게 하는 것이다. 동시에 서구교회도 서구지역의 민족교회로서, 자기들의 지역에서 새롭게 나타나고 있는 선교적 과제들, 특히 세계화에 따른 다문화, 다민족/다인종, 다종교 사회의 선교를 담당하게 될 것이다.
“20세기 3/4분기의 한국교회의 세계선교와 선교동인”
한국교회의 선교역사에 나타난 특징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바로 선교정신이다. 다시 말해,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선교적 교회(a Missionary Church)이었다. 한국교회는 복음을 받아들인 때부터 전도를 시작하였고, 교회 설립 이후에는 자민족 선교 나아가 본격적인 타문화권 선교를 즉시 시작하였다. 더구나 당시에는 객관적인 측면에서 선교를 하기 어려운 때였다. 즉 나라를 잃어버린 식민지백성이었고, 교회도 갓 태어난 신생교회였으나, 그런 가운데서도 선교를 감당하였다. 특히 최초의 타문화권 선교인 산동선교의 경우, 선교를 선교사의 일방적인 입장에서 주도한 것이 아니라, 선교와 관련된 다양한 선교기관과 현지교회인 중국교회와 함께 시작하였다.
이러한 선교전통은 해방 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이 글에서는 해방 후 기간 중, 20세기 3/4분기의 한국교회의 세계선교 역사를 살펴보기로 한다. 이 시기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들이 나타났고, 다음과 같은 다양한 선교가 이뤄졌다.
먼저, 이 시기에 선교의 재건이 이뤄졌다. 한국교회 특히 한국장로교회는 해방 후 교회의 재건을 서두르는 한편, 선교의 재건을 이뤘다. 한국장로교회의 경우, 1947년 재건총회에서 선교의 재건을 결정하였다. 이것은 독노회 결성 시 제주선교를 결정하고, 총회 설립 시 산동선교를 결정한 전통을 고려할 때,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곧 이어진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선교의 재건이 활성화되지 못했지만, 전쟁이 끝나자마자 다시 선교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선교하기 어려운 여건 가운데서도 선교 사명을 잃지 않은 한국교회의 선교정신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교회의 약세를 핑계로 선교에 소극적인 수많은 민족교회들에게 가장 큰 교훈이 되고 도전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 시기는 제대로 이해되거나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20세기 3/4분기를 선교침체기로 보는 경향이 있다. 주로 선교가 본격화되기 시작한 1980년대 이후를 주목하면서, 이 시기를 도외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는 여러 가지로 들 수 있지만, 특히 규모의 선교와 과시적 선교의 경향을 드러내기 쉬운 서구선교의 영향과, 현지교회인 민족교회와의 선교일치 내지 선교협력을 강조하는 에큐메니칼 선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복음주의적 선교의 영향을 들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해, 한국교회가 전통적인 선교관을 지닌 만큼, 20세기 특히 20세기 후반에 나타나기 시작한 선교적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변화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시기는 오히려 가장 다양한 선교가 이뤄진 시기였다. 그리고 당시 현실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거의 모든 선교가 에큐메니칼 선교의 맥락 가운데서 이뤄졌다. 그런데 에큐메니칼 선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이런 선교를 알아보지 못하거나 왜곡되고 편협하게 이해하는 경향을 드러냈다.
이제 구체적인 선교 사례를 살펴보자. 첫째, 1955년부터 태국선교가 이뤄졌다. 원래 한국장로교회는 개척선교를 원하였지만, 당시 아시아교회 상호간의 선교연합 차원에서 에큐메니칼 선교의 일환으로 태국선교를 하게 되었다. 물론 한국장로교회와 한국선교사가 에큐메니칼 선교에 대하여 잘 이해하지 못하여, 선교사 개인적으로는 선교 성과를 거둔 반면에 이런 유형의 선교를 크게 발전시키지 못했다. 둘째, 1957년에 미국선교가 이뤄졌다. 이것은 에큐메니칼 선교에 따라 민족교회들(서구교회와 비서구교회 모두)이 서로 배움을 통하여 더 진정한 교회가 될 수 있다는 관점에서 미국교회가 한국선교사를 초청한 것이다. 선교기관의 모교회인 미국에 선교사를 파송한 셈인데, 물론 이 경우 선교사는 전통적인 선교사라는 명칭보다 선교동역자라는 명칭을 쓰게 되었다. 셋째, 1956년부터 대만선교가 시작되었다. 중국선교를 염두에 두긴 했지만, 공식적으로는 대만의 한인교포전도가 우선적인 과제였다. 따라서 기존의 전통과는 달리, 현지교회인 대만교회와 긴밀한 관계를 발전시키지 못했다. 넷째, 1960년부터 한국감리교회가 이화여자대학교를 통하여 파키스탄선교를 시작하였는데, 이것 역시 에큐메니칼 선교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한국장로교회의 정 성균 선교사가 파키스탄선교를 다시 시작하였을 때도 에큐메니칼 선교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경우에도 에큐메니칼 선교의 의의는 제대로 이해되지 못했다. 이밖에 다른 지역에도 선교가 확장되어 갔으나,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다가 드디어 1980년에 선교사 파송수가 100명이 넘게 되었다. 이상의 다양한 선교가 대부분 에큐메니칼 선교의 일환으로 이뤄졌지만, 막상 선교를 하는 한국교회나 한국선교사는 이러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모습을 드러냈다. 이로 인하여 당시의 선교역사가 제대로 이해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현지교회인 민족교회와 선교일치 및 선교연합을 이뤄나가는 것이 활성화되지 못했다.
당시는 신학적 보수와 진보 진영이 선교 개념, 선교 방식, 선교 주도권 등의 문제로 인하여 갈등을 갖다가 두 진영으로 갈라진 시기이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로잔위원회의 등장이다. 물론 이후 보수 및 진보 양 진영이 선교신학에 있어론 이어느 정도 양극화를 벗어날 수 있게 되었지만, 선교 실천의 측면에론 이여전히 별개의 궤도를 밟고 있다.
이 시기는 또한 한국교회의 선교를 활성화하는데 일익을 담당한 선교사상가들이 등장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가령 한 경직, 김 활란, 조 동진 등을 들 수 있다. 한 경직은 교단선교부 활성화, 김 활란은 학생선교운동 활성화, 조 동진은 초교파선교회 활성화에 기여를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는 한국교회의 교단분열이 집중적으로 이뤄진 시기와 겹친다. 선교기관의 모교회인 한국교회의 교단분열 내지 교회불일치의 문제는 선교에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다음과 같은 것들을 들 수 있다. 교단분열로 인하여 약화된 교회가 잠시 선교를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의 교단분열이 선교지에 재생산되었다. 또한 교단분열이 에큐메니칼 운동과 연관됨에 따라 에큐메니칼 선교가 약화되었다.
안교성 교수 (장로회신학대학교 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