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jh.jpg언어는 사람들이 자신의 머리 안에 있는 생각들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데 가장 필수적인 도구이다. 따라서 타국어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에게는 원만한 언어의 소통이 매우 중요하다. 아프리카의 경우 비록 과거 영국의 식민지이었기에 공식어로 영어를 사용하지만 영어는 그들에게 마음의 언어는 아니다. 이들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따로 있다. 어렸을 때부터 삶으로 듣고 배운 마음의 언어의 자리에 영어가 대치될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의 언어인 Heart Language를 이해 할 수 없다면 선교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없다. 말이 통해야 마음이 통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뜨거운 열정으로 불이 타오른다 할지라도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전달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커뮤니케이션을 잘 한다는 것이야말로 선교사가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자격조건이다. 바울이 사역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헬라어를 잘 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스페인을 무척 가고 싶어 했다. 알렉산더라는 신학자는 그가 스페인에 갔지만 선교를 성공적으로 감당하지 못하고 로마에 돌아와서 다시 감옥에 갇힌 후 순교했다고 말한다. 그가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스페인이 헬라어권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위대한 바울도 언어가 잘 소통되지 않는 곳에서는 복음전파가 어려웠던 것이다.

언어도 중요하지만 그 언어를 적절하게 사용하여 전달할 수 있는 능력도 매우 중요하다. 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같은 정서의 수준으로 내려가서 잘 이해시킬 수 있는 전달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야말로 선교현장에서 유용하게 쓰임 바 될 수 있다. 아볼로 같은 사람을 이런 사람 중에 하나로 뽑을 수 있을 것이다. 사도행전 18잘 24절 이하에 이렇게 쓰여 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물론 여기서 ‘언변이 좋고’라는 말을 헬라어로 직역하면 ‘배운 사람’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우리말 성경은 잘 배운 사람이라면 언변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렇게 번역을 했을 것이다. 아무튼 우리 말 대로 그 의미를 생각해 보면 언변이 좋다는 것은 복음 전파를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자격조건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오랫동안 아볼로는 언변이 좋았는데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을 해왔다. 왜냐하면 고린도후서 11장 6절에서 바울이 “내가 비록 말에는 부족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 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물론 바울 자신도 “하나님의 능력이나 역사가 말에 있지 아니하다” 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 말은 바울이 겸손해서 자신을 높이지 않은 것이지 실제로 바울은 말을 엄청 잘하였다. 이는 성경에서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 사도행전 14장의 루스드라에서 일어난 사건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 바울과 바나바가 한 앉은뱅이를 고쳐 준 사건으로 인하여 그곳의 사람들이 두 사람에게 헬라의 신의 이름을 부여하고 제사를 하려고 했다. 바나바는 제우스 신이요 바울은 헤르메스라고 붙였다. 여기 헤르메스는 신탁의 전달자, 즉 신의 대변자이고 언어의 발명자이며 웅변의 신이었다. 그런데 바울을 그렇게 인정하겠다는 뜻이다. 이것만을 보더라도 바울이 말에 매우 능했던 사람인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를 가리켜 말쟁이라고 부르기도 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에피큐리안과 스토익학파의 사람들과 나누었던 논쟁의 내용을 보면 그의 언변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말에 졸했다면 이런 논쟁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말에 능하지 못 한 것을 타당화 하려고 바울을 샘플로 드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즉 ‘말에 능하지 못한 바울처럼’이라고 하는 말은 맞지 않는 말이다. 바울은 지식과 감성과 영성 그리고 전달능력이 탁월하게 뛰어나 사도이었다. 그는 유대인 종교지도자들과 논쟁을 할 때 한 번도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지식에 휩쓸려 넘어가지 않았다. 어떤 자리에 놓여 있거나 간에 유대인들과의 논쟁에서 이기었다. 그 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복음에 대한 확신을 시켰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나왔다. 결코 바울이 말에 졸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이 복음 전달의 능력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많은 훈련과 노력이 필요하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아볼로가 말에 능하도록 그를 잘 지도해 주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뛰어난 전달 능력을 가지 전도자였다. 이처럼 복음전파를 효과적으로 나눌 수 있기 위해서는 언어의 능력은 필수적이다. 선교사가 현지인들의 모국어를 잘 구사하면 일단 현지인으로부터 신뢰를 얻게 되고 존경을 받게 된다. 마치 바울이 헬라어를 자기 언어처럼 구사하였기에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담대하게 도전하며 넓은 교제권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을 보아도 그렇다. 따라서 선교사의 최우선 업무는 현지 언어를 잘 구사하는데 엄청난 노력을 투자하는데 있다. 마음에 천금 만금의 복음을 담고 있어도 전달할 언어가 없으면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전달할 수 있는 언어습득이 선교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그리고 언어의 전달 능력인 기술이 필요하다. 남을 확신을 시켜야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것이다. 확신을 주지 못하면 확신을 얻어낼 수 없는 것이다. 선교는 확신의 싸움이다. 내게 확신이 없으면 남을 확신 시킬 수 없다. 그리고 또 하나는 지성이다. 아볼로나 바울은 성경지식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총에 실탄이 금새 떨어지면 오랜 전쟁은 가능하지 않다. 성경의 실력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것은 언어라는 그릇에 담을 수 있는 내용물이다. 그릇이 화려하더라도 그 안에 들어 있는 내용물이 먹음직스럽지 않다면 누구도 먹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언어적 사역 안에 성령님의 역사가 없이는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바울은 모든 선교사의 샘플이다. 그를 본받고 그에게서 철저하게 배워야 한다. 눈으로는 대화가 안 된다. 바디 랭귀지로는 불가능하다. 단기 팀으로 선교지에 갔던 사람은 누구나 경험을 하였듯이 마음은 원이로되 언어가 소통되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고 일어나지도 않는다. 몇 마디라도 통해야 통하는 것이다. 통하지 않는 곳에서는 열매를 기대할 수 없다.

이재환 선교사 (컴미션 국제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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