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들어 대한민국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대통령의 구속이라는 상황에 직면했다. 또한 미국에서는 트럼프가 그의 두 번째 대통령직에 취임하며 캐나다와 그린란드 합병 및 파나마 운하 지배권 환수를 당당히 주장하고 있다. 오직 미국을 위한, 미국에 의한 세계 질서를 재편하겠다고 거리낌 없이 공표하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이스라엘과 하마스는 휴전을 선포하고 분쟁을 종식하기로 합의했다.

격변하는 이 시대에 수천 년 전 세계최강의 이집트 왕국이 어떻게 쇠퇴하였는가를 고찰해 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물론 고대 민족의 흥망성쇠에 대한 불완전한 기록만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고대 민족과 역사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과 그 안에 담긴 진리를 믿는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역사를 다룬 책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투탕카멘의 죽음』(Mary Nell Wyatt, 리진만 역)은 출애굽 진실에 관한 저자의 30여 년간의 끈질긴 탐구 결과물로, 익히 영어 원서 『Battle for the Firstborn』이 ‘미국 아마존 화제의 도서’로 영어권 크리스천 독자들에게 호평을 받아왔다. 오늘의 시대에 이 책에 나와 있는 이집트의 쇠퇴 원인을 들여다보고 앞으로 우리의 나아갈 길을 찾는데 반면교사로 삼는다면 유의미한 일이 될 것이다. <편집자 주>

투탕카멘의 묘지가 다시 열리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엄격하게 지켜지는 내세에 관한 많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한 가지 믿음은 그들의 왕이 신의 지상 화신이지만 여전히 인간이라는 것이다. 특히 내세에 관한 그들의 복잡한 믿음 때문에 왕실과 측근들은 묘지에 있는 조상을 위해 충분한 준비가 필요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에게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젊은 투탕카멘의 급속한 미라화와 매장 몇 년 후, 그의 묘지는 아마르나 왕가에 의해 다시 열렸다. 아텐 신의 이름을 반영한 새로운 항목이 그의 묘지에 배치되었다. 평생 투탕카멘과 아멘호테프 Ⅲ세의 주요 신은 묘지에 있는 거의 모든 물건의 상형 문자에 분명한 아문 신이었다. 그러나 출애굽의 대재난 이후, 아문은 다른 모든 신들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하나님의 능력으로부터 이집트를 보호하지 못했기 때문에 총애를 잃었다.

이집트 왕국의 쇠퇴 Ⅱ
▲아마르나 벽에 있는 아크나톤의 기괴한 묘사 ⓒWikimedia -PichardMortel
아마르나 가족이 그의 묘지에 넣은 물건에 대한 타원형 윤곽은 아텐의 이름을 반영하여 그의 이름을 투탕크-아텐으로 표시했다. 이 물건들이 원래 매장된 후에 묘지에 놓였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묘지가 처음 발견되고 열렸을 때의 기록에서 입증된다. 1922년에 카터는 이 묘지의 입구에서 아크나톤과 그의 아내, 그들의 딸인 메리에타텐의 이름이 적힌 상자 조각을 발견했다. 이것은 최초의 매장 이후 몇 년이 지났음을 나타낸다. 아마도 아크나톤이 결혼하고 딸을 낳은 지 10년 이상이 지났을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죽은 자의 능력을 얼마나 강하게 믿었는지를 보여준다. 투탕카멘을 매장한 사람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들은 젊은 투탕카멘이 아텐에 의해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보증했다. 그들은 또한 그들 자신의 내세를 보장하고 있었다. 아텐이 진정한 신으로 판명되면, 이것은 그들의 충성심을 증명하는 것이다.

공공건물의 벽에 있는 기록은 대중이 볼 수 있도록 만들어졌지만, 묘지에 있는 부장품은 인간의 눈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신과 죽은 자의 눈만을 위한 것이다. 그들은 옛 신들의 실패 이후 필사적으로 새로운 신을 소환한 것이다. 이것은 선전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 묘지 안을 볼 수 없었다.

나는 초기 고고학자와 역사학자들이 투탕카멘의 통치가 수년 전이 아니라 그의 형제 아크나톤의 통치 이후에 왔다고 믿게 만든 것이 바로 이 발견이라고 믿는다. 그의 이름이 ‘아텐’으로 변경된 부장품은 큰 혼란을 초래했다.

고대 기록에는 알려지지 않은 인물인 스멩카레(Smenkhkare)라는 이름이 누군가에 대한 언급도 있다. 그가 언급되었고 그가 누구였는지에 대한 많은 이론이 있어 나는 내 자료를 제시할 것이다. 말카타(Malqata)에 있는 아멘호테프 Ill세의 집에서 발견된 반지에 그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기 때문에, 나는 그가 아크나톤이 된 투탕카멘의 남동생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아마도 그는 또 다른 남동생일 것이다. 그러나 이용할 수 있는 정보가 너무 부족해서 이 주제에 대해 더 많은 연구 진척은 없었다.

이제 출애굽 한 지 몇 년, 아마 15년, 많게는 25년이 흘렀고 이집트는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나머지 왕족뿐만 아니라 하층 계급도 신을 포기했다. 새로운 왕은 과거의 파라오와 전혀 달랐다. 아크나톤과 그의 가족은 아마르나에 있는 그들의 궁전에 머물렀고 사람들과 교류하지 않았다.

아마르나 편지에서 드러난 혼돈

이집트 왕국의 쇠퇴 Ⅱ
▲베를린의 박물관에 있는 아크나톤의 아내 네페르티티의 흉상 ⓒWikimedia -PichardMortel
새 군대와 새 왕실을 조직하는 데 얼마나 걸렸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애굽 밖에서 그들의 가신들과 다른 나라들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어느 정도 알고 있다. 뒤따른 혼돈의 그림을 드러낸 것이 우연한 발견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아마르나 서신의 이러한 발견이 신성하게 마련되었다고 믿는다.

아마르나에서 발굴된 이 가장 흥미로운 발견은 출애굽 직후 당시의 파라오와 다른 나라의 왕들, 가나안과 시리아에 속해 있던 도시와 작은 왕국의 통치자들 사이의 공식 통신을 나타내는 382개의 점토판의 은닉처였다. 서기 1887년에 발견된 이 편지들은 문자가 이때까지 매우 잘 발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집트가 아카디아어로 외국 세력과 소통했다는 확실한 증거를 제공한다.

이집트는 상형문자, 민중문자, 신관문자뿐만 아니라 설형문자도 보유하고 있었다. 이 문자는 EA에서 참조하고 번역자가 할당한 번호이다.

당시 수년 전에 사망한 아멘호테프 III세에게 보내는 여러 편지가 있었으므로 다른 국가에서 그의 죽음을 알기 전에 보낸 것 같다. 그러나 완전한 그림을 얻으려면 몇 가지 사항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요약하자면, 아멘호테프 III세의 통치 기간 이집트는 더 이상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를 침략할 필요가 없었다. 이 지역은 이미 정복했고 굴복시킨 속국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통제를 유지하기 위해 이집트 수비대가 주둔했다. 사나운 이집트 군대의 보복 위협만으로도 그들이 협력할 수 있는 설득력이 충분했다.

히타이트, 아시리아, 카사이트(바빌로니아)는 강력한 이집트 군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집트와 평화롭게 지내기를 바랐다. 다른 곳에서는 다른 왕국들이 서로 계속해서 싸우는 동안 그들은 애굽과 정중하고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고 정기적으로 조공을 바치고 그들과 서신을 교환했다.

리진만 선교사
▲리진만 선교사

이 편지는 통치자들 간의 협상과 당시 상황에 대한 자세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때때로 우리는 행간을 읽어야 한다. 편지 중 일부는 아멘호테프 III세에게 발송되었으므로 과거에 보낸 선물에 비해 열악한 선물을 보냈다는 불만이 있기 때문에 그의 죽음 후에 다른 사람이 그의 이름으로 답장을 받았을 것이라고 제기한다.

이 모든 것들은 애굽이 더 이상 이전의 풍요함으로 충만하지 않았던 출애굽 이후의 때를 가리킨다. 이스라엘 백성의 수많은 사람은 그들이 떠날 때 많은 양의 금과 은을 애굽에서 가지고 나갔다. <계속>

※이 글은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투탕카멘의 죽음』에서 발췌해 소개합니다.

글: 메리 넬 와이엇(Mary Nell Wyatt) 번역: 리진만 선교사(사진)